ファントムオブインフェルノ, Phantom of Inferno ⓒ Digiturbo 2001, 2002 / Nitroplus 2000, 2002 / Princess Soft 2003

대본 작성, 번역 : CARPEDIEM(mine1215@lycos.co.kr)

게재 : C'z the day(http://mine1215.cafe24.com/)

들어가기 전에
-본 문서는 Nitro+의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Phantom of Inferno」 중에서 3부 내용을 번역한 것입니다. PS2판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작업하였으므로 PC판 및 DVD-PG판과는 약간 다른 부분이 존재합니다. 번역자의 주관에 따라 의역을 가한 부분이 있으므로 미리 양해를.
-본문의 엔딩은 PS2판에서 새로 추가된 「달이 빛나는 밤에 홀로(月輝く夜に独り)」입니다. 결말 부분까지 모두 번역되어 있으니 플레이중이거나 예정인 사람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대본에 대한 권한은 작성자에게 있으며, 무단전재 및 링크는 금지합니다.




Phantom of Inferno(PS2) - Ending No.7 「달이 빛나는 밤에 홀로(月輝く夜に独り)」


반장 : 차렷, 경례.

수업이 끝난 후의 해방감이 교실을 가득 채운다. 내일 아침까지의 자유로운 시간을 손에 넣은 학생들은 활기에 차 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변함없는 풍경. 거기에는 아무런 위험도 없고, 타인을 겁내며 움츠러들 필요도 없다.
예전엔 당연하게 생각했던, 느닷없이 빼앗기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평온한 나날.


레이지 : (…그래도 역시 여긴 내 고향이야… 긴 여행 끝에 돌아온 나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맞이해 줬어….)

조용히 감상에 젖어 있을 때, 등 뒤에서 살며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레이지 : (…날카로운 감각만은 전혀 둔해지질 않았군….)

사나에 : 아즈마! 선 채로 자지 맛!

새된 목소리와 함께 등으로 날아드는 가방.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큰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어 본다.

사나에 : 또 멍하니 하늘 보고 있네. 뭐 하냐? 전파랑 얘기했어?

레이지 : 적당히 해라 사나에… 심장마비 걸리면 어쩌려고.

사나에 : 그럼 심장 마사지 해 줄게. 한 번쯤 해 보고 싶었어.

레이지 : (…이런… 요즘엔 완전히 장난감 취급이라니까….
뭐, 등에도 눈이 달렸다는 소릴 듣는 것보단 낫지. 평범한 학생 연기도 나쁘진 않고….
그래, 잃어버렸던 걸 아주 조금은 되찾은 그런….)

사나에 : 저기, 얘기하고 싶은 게 좀 있는데.

레이지 : 또 영어 가사?

팝송을 좋아하는 사나에는 종종 가사 번역에 관해 물어보곤 한다. '귀국자녀'란 딱지 덕분에, 사나에를 비롯한 몇몇 녀석들에게는 걸어다니는 사전 취급을 받고 있다.

사나에 : 오늘은 그런 거 아니야. 너한테도 좋은 이야긴데 기쁜 표정 좀 지어 보시지?

레이지 : …일단 무슨 얘긴지부터 말해 봐.

사나에 : 그럼 먼저 옥상으로 와.
.
.
.
봄이라곤 하지만, 해 저문 옥상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다.

레이지 : (누가 있잖아… 어디선가 봤는데….
맞아, 몇 번인가 인사 정도는 했어. 우리 옆 반이고, 이름은….)

사나에 : 미오!

미오 : 아….
있잖아 사나에, 역시 나….

사나에 : 아~ 안 들려 안 들려. 나 이제 암것도 안 보이고 들리지도 않아. 그럼 이만~

옥상에 남겨진 두 사람 사이에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감돈다.

레이지 : (사나에 녀석, 뭐야… 대체 뭐 하자는 건데?
할 수 없지… 얘한테 직접 물어 볼까.)
으음, 넌… 엘렌 친구 맞지? 후지와라(藤原)… 였던가?

미오 : …후지에다(藤枝). 그, 그러니까… 후지에다, 미오.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옆 반에 있는 '쌍둥이 동생'한테서 둘도 없는 친구라며 소개받은 적이 있다.

레이지 : 사나에랑도 아는 사이였어?

미오 : 으응… 1학년때 같은 반.

레이지 : 헤에… 그런 시끄러운 녀석이랑 지내느라 힘들었겠다.

미오 : 아, 아니… 그렇지는….

레이지 : 근데, 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

미오 : 아… 응.
그게… 그러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뭐라고 해야 되나….

레이지 : 엘렌 때문에 할 말이 있다든지?

갑자기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짐작이 가는 내용은 오직 하나. 공통의 화제라고 한다면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레이지 : (설마… 엘렌이 뭔가 의심스럽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에 그렇다면 일이 귀찮아지는데….)

미오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레이지군에 관한 건데.

레이지 : …나?

미오 : 응….

레이지 : (그것도 좀… 대체 뭔데…?)

미오 : 아즈마군, 지금… 조, 좋아하는 사람… 있어?

레이지 : ?!
(그건… 다시 말해….)

미오 : 그치만… 나같은 앤 무리… 겠지?

내면의 긴장이 얼굴에 드러났던 걸까.

레이지 : (큰일났다… 이거 진짜 위험해….)

신분을 숨기고 숨어지내는 처지에서는 가장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레이지 : (이걸 어쩌나… 당연히 받아들일 순 없지만, 그렇다고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만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캐고 들기라도 한다면….)

엘렌 : 미오?

미오 : 아, 엘렌….

엘렌 : 이런 데서 뭐 해?

악의없는 훼방꾼의 출현으로 방금 전까지의 긴장된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셔버렸다.

엘렌 : 누구랑 얘기하나 했더니만… 오빠, 미오한테 볼일 있어?

레이지 : 아니… 뭐어….
근데 너야말로 여길 왜?

엘렌 : 미오 찾아다녔지. 카네코야에 와플 먹으러 같이 갈까 해서. 안 갈래?

미오 : 난….
오늘은 됐어. 일이… 좀 있거든… 미안.(자리를 뜬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 아쉬움이 채 가시지 않은 공기를 말끔히 걷어간다.

엘렌 : 고생했어.

레이지 : …….

마치 스위치를 바꾸는 것 같다.
아즈마 엘렌(吾妻江蓮). D반 아즈마 레이지(吾妻玲二)의 쌍둥이 동생으로, 함께 시노쿠라 학원(篠倉學園)에 재학중이다.
그 정체는, 예전에 '아인'으로 불리며 '팬텀'이라는 이름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던 암살자.


레이지 : …보고 있었어?

엘렌 : 눈치 못 챘어? …둔해졌구나, 레이지.

레이지 : 그럴지도… 여기선 매일같이 신경 곤두새우며 지낼 필요 없잖아….

이곳 시노쿠라 학원의 학생이 되어 숨어지내게 된 후로 반년이 흘렀다.
창가에 서 있어도 저격수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둠에 몸을 숨긴 적의 기척을 더듬을 필요도 없다.
여기는 일본이다.

미국을 빠져나온 지도 2년이 지났다.
육로를 따라 멕시코에서 페루로, 오세아니아를 거쳐 필리핀으로. 그리고 9개월 전, 우연히 알게 된 화교의 주선으로, 일본인 신분을 위장할 수 있게 되었다.
거액을 들인 만큼, 새로 손에 넣은 호적은 완벽했다. 아즈마 레이지, 아즈마 엘렌… 양친은 일 때문에 홍콩에 출장중. 누군가가 홍콩에 전화를 걸어도 '아즈마' 성을 쓰는 일본인이 빈틈없이 대응을 해 준다.


레이지 : (설마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될 줄이야… 하지만 의외로 숨어있기엔 좋았어.)

겉보기에는 규칙에 따라 엄정히 관리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학교지만, 실제로 들어와 보면 그렇지도 않다. 치안이 안정된 나라들이 흔히 그렇듯이 위기관리가 만성적으로 허술한 것이다.

엘렌 : 그래서, 미오를 어떻게 할 거야?

레이지 : 아아… 역시 곤란하겠지…?

엘렌 :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어. 미오가 널 생각하는 마음.

레이지 : …무슨 뜻이지?

엘렌 : 걸으면서 얘기할게.
.
.
.
엘렌 : 미오는 아버지가 안 계셔.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헤어졌거든. '후지에다'는 어머니 쪽의 예전 성이고, 미오는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자랐어.

레이지 : 만난 적도 없어?

엘렌 : 아버지는 자신이 태어나고 얼마 안 지나 사망… 미오는 그렇게 듣고 자라서, 지금도 그 거짓말을 믿고 있어.

레이지 : 거짓말?

엘렌 : 그애 아버지는 신문에도 이름이 날 만큼 거물이야. 고도우 카이텐(梧桐海天), 조직폭력단 고도우파(梧桐組) 두목.

레이지 : 뭐…? '고도우'… 라고?

2년 전에 벌어졌던, 피로 피를 씻는 음모극의 중심에 서 있던 남자. 또한 조직의 정통 후계자이기도 했다.
애써 숨겨온 과거가 전혀 예상치 않았던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레이지 : …미오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엘렌 : 그애 자신은 물론이고, 조직 내에서도 극소수 인원밖에는 몰라. 미오의 존재 자체마저도.
미오한테는 오빠가 둘 있었는데, 차남인 소우스케는 다섯 살에 죽었어. 조직 내부의 권력다툼에 휘말려서 납치돼 살해당했지.

레이지 : …….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그런 뒷세계 인간이 가정을 꾸린다면….)

엘렌 : 그 사건이 원인이 돼서, 미오 어머니는 갓난아기였던 미오를 데리고 고도우 가문과 연을 끊었어.

레이지 : …당연한 결과로군.

엘렌 : 하지만 장남인 다이스케는 이미 스스로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나이였고. 그래서 조직에 남아 고도우 성을 쓰게 된 거야.
그 이후로 카이텐은 헤어진 부인과 딸에 관해서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어. 딸이 폭력사건에 휘말리는 건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공공연히 나서서 딸을 지킬 수도 없고… 미오는 카이텐에게는 최대의 약점이야.

레이지 : (미오가… 그런 얌전한 여자애가 그런 운명을….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그런 정보를 구한 거야?

엘렌 : 마스터한테 들었어. 이젠 옛날 일이지만.

'사이스 마스터'… 2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이름을 들으면 차디찬 분노를 느낀다.

레이지 : (와이즈멜과의 다툼에서 클로디아가 자멸한 것도, 엘렌과 다시 만난 것도, 전부 그녀석이 꾸민 각본이었어… 예외가 있다면 엘렌이 도망친 정도….)

엘렌 : 마스터가 인페르노를 빠져나와 일본에 머물렀다는 건 전에 얘기했지?

레이지 : 아아….

엘렌과 떨어져 있던 1년. 그 동안 마스터는 엘렌을 데리고 사라진 코카인의 행방을 추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에서 출처불명의 마약을 거래하던 고도우파를 주목했다. 엘렌이 일본생활에 별 탈 없이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의 경험 덕분이다.

엘렌 : 그때… 마스터는 고도우파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어. 만일의 경우에는 마스터도 그 약점을 이용할 생각이었으니까.

레이지 : 마스터'도'라니… 설마 너, 미오를 내세워서 고도우파를 협박하자는 말은….

엘렌 : 위급한 상황에서 마지막 카드로는 쓸 수 있어.

레이지 : …….
(엘렌… 미오랑 친구사이면서… 역시 그것도 연기였나….)

엘렌 : 현재 고도우파의 실권을 쥐고 있는 행동대장은 인페르노의 멤버야.
시가 토오루, 만난 적 있지?

예전의 행동대장 고도우 다이스케의 부하였던 남자. 영리한 분위기가 기억에 남아있다.

레이지 : …그랬군. 나중에 자리를 이어받았단 말이지….
하지만, 그런 소동이 있었는데 인페르노는 고도우파를 일원으로 받아들인 거야?

엘렌 : 고도우파가 장악하고 있는 일본 마약시장은 인페르노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을 거야.
다이스케와 클로디아가 죽으면서 그 사건은 마무리가 됐어.

레이지 : …….

엘렌 : 이제 사정을 알겠지?
만약에 우리 위치가 인페르노에 알려진다고 해도, 미오의 신병을 확보해 두면 고도우파를 협박해서 인페르노에 압력을 넣을 수 있어.

레이지 : …이런 경우에 감정론은 접어둬야겠지만….
왜 지금껏 말 안 한 거야?

엘렌 : 그러게, 미리 말해 둘 걸 그랬어. 미오가 널 좋아하는 걸 알았다면.
.
.
.
어느샌가 옛 예배당 쪽으로 발길이 향했던 모양이다.
옛날, 시노쿠라 학원이 전원 기숙사제 여학교였던 시절의 흔적. 심하게 낡았지만 입지조건 때문에 철거계획이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학생들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고, 금지령 때문이 아니더라도 기분이 나쁘다며 다들 이곳에 오기를 꺼린다. 하지만 엘렌은 종종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곳을 찾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예전에 미션스쿨이었던 시노쿠라 학원은 기독교에 기초한 교육이념을 내걸고 있다. 그리고 엘렌은 처음으로 접한 '종교'라는 것에 큰 의미를 느꼈는지, 자유참가인 신학연구회나 찬송가 동아리 등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열렬한 신앙에서라기보다는, 종교의 철학적인 면에 이끌렸기 때문인 것 같다.


레이지 :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이 조용한 예배당에서 홀로 정적에 잠긴다….
엘렌은 어떻게 생각할까? 신에게 구원을 빌고 속죄한다는 신앙을….)

조용히 기도를 올리는 엘렌. 그녀의 침묵에는, 어딘가 모르게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레이지 : (방금 전까지의 엘렌은… 친한 친구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려 드는 냉철한… 그래, 마치 예전의 살인기계같았어….
그런데 지금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

엘렌… 너 변했구나.

엘렌 : 너만큼은 아니야.
…이 나라에 온 다음부터… 넌 정말로 변했어.

레이지 : …그래?

엘렌 : 곁에서 지켜보면서 느꼈어. 네 마음이 점점 맑아지는 걸.

레이지 : …….

엘렌 : 틀림없이 그런 존재겠지? 고향이란 건.

희미한 슬픈 빛이 엘렌의 눈동자에 감돌았다.

엘렌 : 네가… 인페르노에 대해 기억해내지 않기를 빌었어. 가능하다면 옛날 일은 영원히 잊어버리길 바랐어.

그래서 말하지 않은 것일까.
미오를 이용하려는 냉혹한 계획을 자신의 가슴에 홀로 묻어둔 채.


레이지 : …넌 아무것도 잊지 않았구나.

엘렌 : 그래. 난 하나도 잊은 게 없어.

레이지 : …어째서? 이젠 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일인데….

엘렌 : …고해가 남았어.

레이지 : …아아… 그렇구나….
누구한테 참회하는 거야?

엘렌 : 신께 직접.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레이지 : …….
(그래… 신과 만나는 날… 언젠가는 찾아오겠지.
하지만… 넌 그때까지 계속 이렇게 혼자 기도하고 있을 거니…?)

2년이 흐른 지금도 엘렌은 과거를 바라보며 살고 있다.

레이지 : (그런데 나는… 고향의 공기에 들떠서… 편안함에 물들어서….
엘렌한테 약속했으면서… 진심으로 웃고 기뻐할 수 있도록 과거를 되찾아 주겠다고….)

확실히 엘렌은 웃음을 보이게 되었다.
남들 앞에서 평범한 학생을 연기할 때 외에도, 단 둘이 있을 때도 이따금씩 옅은 미소가 입가에 스쳐지나갈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여전히 허무하고 가슴아프다.


레이지 :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하고, 그런 자신을 동정하는 듯한….
엘렌… 너한테는 무엇 하나 변한 게 없구나… 이 평화로운 나라조차도… 지금까지의 도피생활 중에 잠시 쉬어가는 곳일 뿐이야….
그런데도 난… 이제 다 끝난 것처럼 안심하고… 또다시 널 외톨이로 내버려뒀어. 나 혼자만을 위한 구원을 찾았어….)
엘렌, 난….

엘렌 : 미오를 찾아가 봐. 대답을 듣고 싶어할 거야.
방해해 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그냥 내버려두는 건 가엾잖아.

레이지 : 아, 으응….

작은 동물처럼 잔뜩 움츠리고 옥상에서 바람을 맞고 있던 미오.

레이지 : (…틀림없이 처음이었을 거야. 그런 식으로 고백하는 건. 한 마디 한 마디에 인생이 걸린 듯한 기분으로….)
하지만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하지…?

엘렌 : 잘 구슬려서 이용할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만… 네 성격에 그런 짓은 못하겠지.

레이지 : …….

엘렌 :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녀가 누구인지, 그것만은 확실히 기억해 두고.

레이지 : …알았어.
.
.
.
예배당을 나와 학교 건물로 돌아왔다.

레이지 : (…후지에다 미오….)

고도우파에 압력을 넣기 위해 미오를 이용한다면, 연애관계는 절호의 구실이 될 것이다. 게다가 그녀에게 해를 가할 필요도 없다. 만일 협박을 하게 되더라도, 미오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협상거리는 충분하다.
마지막까지 미오 자신에게는 덮어둔 채 일을 진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레이지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미오 마음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건….
그애는 진심인데….)

이리저리 고민하면서 미오의 모습을 찾는다.

레이지 : (아마 돌아갔을 거야….
그래도 동아리든지 아직 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일단 건물 쪽을 확인해 볼까.)

이미 청소까지 다 끝난 학교 건물은 교실도 복도에도 거의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레이지 : (…아니, 잠깐. B반 쪽이야.)

조용한 복도 안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문 틈으로 안을 엿보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B반 교실에 낯익은 두 사람이 보였다.


레이지 : (…이런, 쓸데없는 녀석까지….)

사나에 : 나 참, 기껏 밥상을 차려줬더니만. 왜 그렇게 요령이 없어?

미오 : …미안.

사나에 : 각본대로 했으면 되는 거잖아. "좋아해. 나랑 사귀자!" 딱 두 마디, 그 다음엔 목을 졸라서라도 YES를 받아내면 땡! 소요시간 달랑 5초. 고백은 전격전이란 말이야! 뭘 그리 우물우물해?

미오 : …그치만, 역시 나 안되겠어.

사나에 : 아아 정말, 학교생활 최후의 봄이라고! 그걸 그냥 날려버릴 거야?

미오 : …….

레이지 : (…저게 진짜….)
사나에!

사나에 : ?!

미오 : 앗….

갑작스런 침입자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린다.

미오 : 아, 저기….

사나에 : 마침 자알~ 됐군 아즈마. 안 그래도 너 찾으러 나가려던 참이다.

레이지 : 찾았으니 됐지?
둘이서 할 얘기가 있으니 그만 사라져 주실까.

사나에 : 뭐? 아아, 그러셔….
그럼 나으리, 말씀하신 대로 쇤네는 물러나겠사와용. 뒷일은 좋으실 대로….

사나에는 도망치듯이 자리를 빠져나갔다. 교실을 나가기 직전에 팔을 이리저리 휘저은 건 손짓발짓으로 미오를 코치해 준 거겠지.

레이지 : (이거야 원….)

또다시 둘만이 남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을 알고 있기에 당황스럽지는 않다.
그렇다곤 해도 어색한 공기는 여전했지만.


미오 : …저어, 그게….

레이지 : 후지에다… 저기 말이지.

미오 : …으응.

레이지 : 아까 대답 말인데….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어. 미오가 널 생각하는 마음.

레이지 : (…제길, 나란 놈은….
쓰레기다. 최악의 쓰레기….)

가슴속에서 자기혐오가 끓어넘쳤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준비해 두었던 대사를 끄집어낸다.

레이지 : 나라도 괜찮다면… 사귀어 줘.

미오 : …….

레이지 : …왜 그래?

미오 : 에? 아니….
미안… 나, 틀림없이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좀 얼떨떨해서….
…고마워. 너무너무 기뻐….

레이지 : (…크윽, 이런 순진한 애를 속이다니… 난, 나는….)

그녀의 웃음을 이용한 대가로, 레이지는 모든 것을 저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평온한 나날을 사랑했던 자신의 마음까지도.

레이지 : (결국 난 그런 놈이야… 피비린내나는 뒷세계 일을 이런 평화로운 일상에까지 끌어들이는….)
.
.
.
하치오우지(八王子)시 외곽, 자그마한 산 중턱에 시노쿠라 학원 건물이 있다. 산기슭의 번화가까지 언덕길로 약 30분. 원래가 전원 기숙사제였던 만큼 교통은 상당히 불편하다.
산 위로 올라가면, 지금은 폐허가 된 여자기숙사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하교시간이 늦어진 덕분에 길에는 다른 학생들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해가 저문 숲 속에서, 정적만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옆에 있는 미오는, 아까부터 여기저기 시선을 던지며 말없이 걷고 있다.


레이지 : (뭔가 생각하나 본데….)

첫사랑을 이룬 소녀가 생각할 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잔혹한 거짓말인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레이지 : (…그렇고말고. 절대로 들킬 수 없어… 속이기로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책임지고 밀어붙이는 거야. 절대로 미오를 상처입히지 않도록….)

다음 달이면 3학년으로 진급한다. 가짜 학교생활도 이젠 1년밖에 남지 않았다. 미오의 마음도 영원히 계속되진 않을 것이다.
첫사랑이란 결국, 젊은 날의 홍역과도 같은 것. 상대방에 관해 하나씩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식어갈 것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그녀의 곁에 머무를 구실만 찾을 수 있다면 목적은 달성하게 된다.


레이지 : (구역질이 나는군… 비열하고 냉혹하고… 더러운 거짓말….
그래도 마지막까지 책임은 져야지… 미오한테는 아름다운 추억만이 남도록….)

미오 : 저기….

레이지 : 응?

미오 : …미안. 무슨 얘길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나 되게 재미없지…?

레이지 : 아, 아니… 그렇지 않아.
그것보다… 나야말로 재미없지 않아?

미오 : 아니, 전혀. 너무너무 즐거워.

레이지 : …즐거워?

미오 : 정말이야. 뭐랄까, 그게… 아무 말 안 해도 답답한 느낌이 없다고 할까?
어쩐지 안심이 돼. 날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레이지 : 그야… 싫진 않으니까.

미오 : 지금 아즈마군이 무슨 생각 하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레이지 : …그래?

미오 : …….
그치만… 역시 내가 싫어?

레이지 : 왜 내가 싫어한다고?

미오 : 잘 알지도 못하는 애가 멋대로 좋아한다니까 귀찮지 않아?

귀찮다… 확실히 처음엔 그랬다.

레이지 : 아니… 근데, 내가 어디가 마음에 들었어?

미오 : …….

레이지 : (이런, 곤란한 걸 물었나 보군….)

하지만, 조용히 앞을 응시하는 미오의 얼굴에서 어색하거나 당황하는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대답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고 있는 듯이 보였다.

미오 : …늘 보고 있었어. 아즈마군이 나무를 바라보거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 그럴 때 아즈마군은 굉장히 감동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한테는 별다를 것 없는 흔해빠진 풍경인데, 아즈마군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이고 있지 않나 싶어서.

레이지 : …….

미오 : 그러니까, 아즈마군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의미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재미없거나 지겨워 보이는 일이라도 사실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데, 단지 사람들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고.

레이지 : …….

미오 : …미안. 대답이랑은 상관없는 얘기만 했네. 그냥 나 혼자 멋대로 생각한 건데.

레이지 : 아니….
여긴 정말로 멋진 곳이야.

죽지도 않고, 죽일 필요도 없다. 누군가를 속이고 함정에 빠뜨려 전부를 빼앗는 일도,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도 없다.
그저 잠들기만 하면 내일은 저절로 찾아온다. 그것이 마치 당연한 일인 양, 모든 것이 허락된다.
이곳은 말 그대로 천국이다.


미오 : …….

레이지 : …왜 그래?

미오 : 역시 아즈마군은 어딘가 신비한 구석이 있어.

레이지 : …귀국자녀니까. 네가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야. 이렇게 일본에 살게 되니 뭐든지 다 신기한 걸.

미오 : 반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낯설어?

레이지 : …….

미오 : 나, 중학교 다닐 때 두 달 정도 홈스테이 한 적 있어. 처음엔 이것저것 다 신기했는데, 조금 지나니까 전부 당연한 듯이 익숙해지더라. 어느 나라를 가도 사람들 사는 모습은 다르지 않나 봐.

레이지 : …그럴지도.

미오 : 그래서 아즈마군은 조금 다른 것 같아. 일본이다 미국이다 그런 걸 신기해하는 게 아니라, 뭔가 좀 더 다른 거… 뭐랄까….

미오와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을 때, 문득 이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길 왼편에 멈춰선 오토바이. 운전자는 시트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마치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체형으로 봐서는 여자같았지만, 머리를 다 덮은 헬멧 때문에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언덕길을 이용하는 사람은 시노쿠라의 학생이나 관계자 외에는 없다.


레이지 : (…집에 가는 학생을 기다리나…?)

곁에 있는 미오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오토바이를 지나쳐 50m 정도 걸었을 때.


레이지 : (이 소리… 중형인 줄 알았는데 배기량이 꽤 되는군.)

그러나 한 가지 더, 엔진 굉음에 섞여 또다른 소리가 울려퍼졌다. 익숙한, 너무나도 익숙한… 하지만 이곳에서는 절대로 듣지 못할 소리.
뒤돌아보는 시야 한구석에서, 하얀 플라스틱 파편이 흩날렸다.


미오 : ??

미오가 손에 든 가방. 거기에 달려 있던 액세서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오 : …어라?

물론 그녀는 알 리가 없다. 방금 전의 소리와 사라진 액세서리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레이지 : (…틀림없어… 지금 그건 6mm 파라블럼… 소음기를 사용한 총성.)

오토바이 주인이 헬멧을 벗었다.

레이지 : …!!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눈동자는 좀 더 부드럽고 밝은 빛이었다.
이런 예리한 눈빛이 아니다. 자신만만한 냉소를 흘리며 이쪽을 쏘아보는, 마치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이.


레이지 : (…그런… 그런 말도 안되는…!)

여자는 헬멧을 손에 든 채 오토바이를 출발시켜, 그대로 두 사람 곁을 지나쳐간다.
스쳐지나는 순간, 커다란 비취색 눈동자가 다시한번 이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증오에 불타고, 살의로 얼어붙은 눈빛을.


레이지 : (…어째서… 왜 그런 눈을 하고 있니…?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아니, 그보다… 정말로 네가 맞아…?
칼… 살아있었던 거야…? 칼….)
.
.
.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어느 고급음식점에서 호화로운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서 : 주(周), 마음 푸욱 놓고 실컷 즐겨라.
우리 구역 매입가는 너희 쪽 절반도 안 되니까 야쿠자 놈들과도 충분히 맞설 수 있어.

연회의 주최자는 서(徐). 요코하마에 근거지를 둔 북경계 중국 마피아의 두목이다.

주 : 감사하우, 서 대형….

초대받은 손님은 마찬가지로 북경계 마피아인 주. 한때는 신주쿠 카부키쵸에서 마약유통을 장악하고 일대 세력을 자랑하던 남자이다.
술자리에는 시중드는 여자 대신 험상궂은 사내들이 가게 안팎을 지키고 있다.
이 자리는 두 사람이 의형제를 맺음으로써 관동지방 북경계 마피아의 결속을 보다 공고히 다지기 위한 것이다.


서 : 근데 신경이 쓰인단 말이야. 카부키쵸 야쿠자 녀석들, 뭘 했는데 그렇게 갑자기 세력이 확 폈지?

발단이 된 것은 조직폭력단 고도우파의 반격. 그들이 품질 좋은 코카인을 싼 값에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주를 비롯한 중국계 조직은 크나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주는, 대륙을 거점으로 한 독자적인 밀수루트를 갖고 있는 서에게 찾아온 것이다.

주 : 그 얘기 말인데… 녀석들 뒤에는 미국 마피아가 있나 봐요.

서 : 미국?

주 : 예….
형님, '인페르노'란 이름 들어 본 적 있수?

서 : 미국 마피아를 꽉 잡고 있다고 소문이 파다한 그거? 이봐, 설마 그런 헛소릴 믿는 건 아니지?

주 : 농담이 아니라니까… 듣자하니 뉴욕에 건너간 장 숙부님도 녀석들한테 당한 모양이더만. '팬텀'인가 하는 암살자인데, 그쪽에선 꽤나 유명한가 봅디다.

서 : 너 말이야… 거긴 만화나 TV, 영화가 판치는 동네라고. 그딴 놈들 얘기를 진심으로 믿을래?

주 : 하지만, 고도우파 녀석들한테 덤볐다간 우리도 위험하다는 소문이….

서 : 바보같으니!
무엇보다 여긴 일본 아니냐. 그 무시무시한 팬텀께서 바다를 건너오기라도 한다는 거야?

주 : …….

물론, 가게를 조용히 포위한 리지 일행의 귀에 이 대화가 들릴 턱이 없었다.

부하 : 전원 배치 완료.

통행인들 속에 숨어 정문을 감시하고 있는 부하에게서 통신기로 보고.

리지 : OK.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5분 후에 돌입한다. 최대한 빨리 해치우도록.
(이런 소동엔 민감한 동네니까 요란하게 설칠 필요가 없지. 시가 녀석 말대로 보스 두 놈 모가지만 따면 끝이다.)

칼 : 리지, 이거 안 좋은데.

리지 : …뭐?! 지금 와서 뭔 소리냐 팬텀.

칼 : 주방 뒷문 쪽에 아무도 없잖아. 그리로 도망친다고.

리지 : 그럴 시간 없어. 단숨에 끝장낸다.
넌 쓸데없는 걱정 말고 엄호나 신경써.

통신기에 대고 응답하면서, 리지는 요리점 대각선 맞은편에 있는 다용도빌딩 옥상을 노려보았다.

리지 : (젠장, 분명히 저기 있으라고 했는데….)

칼 : 이 자리 최악이잖아. 전망도 꽝이고.

리지 : (상관없어! 오늘은 네가 나설 자린 없으니까. 원래는 데려올 마음도 없었는데….)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대답한다.

리지 : 그 얘긴 그만하고, 오늘 밤 네 역할은 엄호다. 알겠어? 이건 명령이다.

칼 : 아, 그러셔.

리지 : 이봐….

다용도빌딩 옥상에서 불의 혀가 넘실거렸다. 돌격소총의 사격이다. 길 가던 사람들의 비명을 시작으로 도로는 아비규환에 휩싸인다.

리지 : 저런 멍청이…!

부하 : 여기는 그레고! 정문 보디가드가 맞았습니다!! 대체 누가… 리지, 다음 지시를!

리지 : 잠깐, 그건….

칼 : 그레고, 안에 있던 녀석들 그쪽으로 우르르 나올 거야. 잘 유인하라고.

리지 : 팬텀!!

칼 : 아 리지, 가게 안은 대혼란이니까 기습하려면 지금이야. 주방 쪽으로는 내가 갈 테니 맡겨두셔. 그럼 잘 부탁해.

리지 : 이런 ○×△□!!

응답이 없었다. 통신기를 끈 모양이다.

리지 : (젠장, 계획이 엉망이 됐잖아….
어쨌든 빨리 돌입해야 돼. 그레고 팀은 양동을 맡을 만한 화력이 없어….)
들이친다!

부하들에게 소리치며, 리지는 비상구를 향해 앞장서서 돌진했다.
.
.
.
혼란한 와중에 간신히 주방으로 도망친 서는, 숨을 헐떡이며 문을 통해 뒷길로 빠져나왔다.
손에는 부하의 시체에서 걷어온 MAC11 서브머신건. 탄환도 아직 10여발 남아있다.


서 : (빌어먹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할 녀석들이 이 나라에 있을 리가….
잠깐, 주가 말했던 놈들… 고도우파 뒤에 있다는 미국 마피아….
아니, 어차피 상관없지. 주 녀석은 이미 벌집이 됐으니… 나도 빨리 도망쳐야….)

한 걸음 내디딘 순간, 등 뒤에 살기를 느꼈다.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돌아서면서 그대로 서브머신건을 난사한다.


서 : (해치웠나…?)

굉음과 함께, 타는 듯한 아픔이 오른쪽 어깨를 꿰뚫었다. 충격으로 벽에 내동댕이쳐지면서 머신건이 손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나뒹군다.

서 : 크으으윽….

격심한 통증으로 흐릿해진 시야에 그것이 나타났다.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저승사자가.

칼 : 동작이 꽤 좋은데? 원래는 킬러나 뭐 그런 거였나?

서 : 너는….

칼 : 팬텀. 인페르노의 팬텀. 일본에선 못 들어 봤어?

서 : 젠장….

소녀를 노려보며, 서는 다치지 않은 왼손으로 뒤춤에 꽂아둔 권총을 더듬는다.

칼 : 그 손은 뭐야? 아직 한 자루 더 있어?
아저씨 제법 끈기가 있구만. 여기까지 와서도 포기 안 한다 이거지? …마음에 들었어.

소녀는 공이치기를 내리고 총을 빙글빙글 돌려서는 허리 뒤쪽 총집에 넣었다.

칼 : 그 승부 받아 주지.

서 : …깔봤겠다.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서는 총을 뽑을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겨오면서 단련된 그의 직감은, 소녀의 겉모습에 속지 않고 그녀의 본성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서 : (이녀석… 진짜 저승사자다. 정면승부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칼 : 신호가 필요한가?

살짝 품 안에 들어갔던 소녀의 손이, 지금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끄집어냈다.

서 : 뭐야…?

놋쇠로 된 자그마한 회중시계. 팬텀은 손끝으로 가볍게 뚜껑을 튕겨 연다.
화약냄새와 피비린내가 자욱한 이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선율이 흘러나왔다.


칼 : 곡이 끝나면 쏴.

서 : (이녀석, 살인을 즐기고 있어… 상대의 죽음을 가지고 노는 거야… 진심으로 즐거워하면서….)

날 얕잡아보고….

하지만, 아무리 살의를 끌어모으려 해도 온 마음을 뒤덮어버린 차가운 공포를 지울 수는 없었다.

오르골의 곡조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한다.


서 : (죽는다… 틀림없이 죽을 거야. 이녀석한텐 이길 수 없어….)

그리고….
오르골의 연주가 끝났다.


서 : 우와아아앗!!

왼손으로 총을 뽑으면서 동시에 터져나온 분노의 외침. 그것은 동시에 공포의 비명이기도 했다.

단 한 발의 총성이 모든 것을 멈춰버렸다.


칼 : Adios, Chinese….
다음에 태어나면 직업을 잘 고르라고.
.
.
.
몇 번이고 전화벨이 울렸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응답이 없다.
한숨을 쉬며, 레이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엘렌 : …왜 그래?

레이지 : …….
…우리 부모님이 전화를 안 받아.

엘렌 : …….

엘렌의 눈에 차가운 긴장의 빛이 감돈다.

레이지 : Mr.후와 연락할 수 있어?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엘렌은 수화기를 들고는,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물 흐르듯 유창한 광동어 대화. 사이스의 영재교육의 결과이다.
엘렌은 영어와 일본어 외에 독일어, 러시아어, 광동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그녀의 외국어 능력은 이전 도피생활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엘렌 : Mr.후는 죽은 모양이야.

레이지 : …….

엘렌 :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몰려와서 우리들에 관해 모조리 캐냈대.

레이지 : …인페르노인가.

엘렌 : 그렇겠지.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레이지 : (그래도….
아니, 우물쭈물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것보다 오늘 저녁 일을….)
오늘, 집에 오는 길에 총을 쏘더군.

엘렌 : …경고?

레이지 : 아마도.

엘렌 : 어째서 일부러….
인페르노는 그런 무의미한 행동은 안 해.

레이지 : 날 미워하니까.
간단히는 안 끝낸다. 계속 몰아붙이고 뒤쫓아서, 실컷 가지고 논 다음에 죽일 테다….
그런 의사표시겠지.

엘렌 : …누굴 만났는데?

레이지 : 죽은 사람.

엘렌 : …….

레이지 : 내가 지켜준다고 맹세하고, 꼭 돌아온다고 약속해 놓고… 그런데도 외톨이로 남겨져서 죽은 사람이 있었지.
오늘 그 망령을… 봤어.

엘렌 : 혹시 살아남아서 인페르노에 들어갔다는 거야…?

레이지 : 사정이야 어쨌든 날 원망하는 건 당연해. 그녀석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건 변함이 없으니까.

엘렌 : …….
도망쳐야겠네.

레이지 : 아아, 그래. 도망쳐야지….
여기 생활도 의외로 얼마 못 갔군….

애써 태연한 척 하는 레이지였지만, 딱딱해진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연약함은 감출 수 없었다.

뒤에서, 엘렌이 그의 등을 살며시 끌어안는다.


레이지 : 엘렌…….

엘렌 : …무리하지 마. 이런 때는 울어도 괜찮아.
지금의 너라면 예전처럼 울 수 있을 거야.

레이지 : 그런 건… 너무 멋대로잖아.

덧없는 고향의 꿈. 아주 잠시 동안, 방랑의 몸이라는 현실을 잊게 해 주었던 고향땅.
하지만 그것은 레이지 혼자만이 취해 있던 꿈이었다.


레이지 : 이 정도쯤… 각오했던 거야. 우리들 쫓기는 몸인 걸.

엘렌 : 아니, 넌 잊고 있었어. 하지만 그래도 좋았어. 나도… 그런 널 보며 기뻤으니까.

레이지 : 엘렌…….

엘렌 : 지난 반년 동안, 네 웃는 얼굴도 잠든 얼굴도 정말 행복해 보였어. 그걸 보고 있기만 해도 나 역시 행복했어.
'고향이란 게 이렇게도 사람 마음을 치유해 주는 거라면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생각하며 꿈을 꿀 수 있었어.
네가 약속해 줬잖아. 언젠가는 나한테도 고향을 찾아 준다고.

레이지 : …….

엘렌 : 그러니까 지금은 슬퍼해도 돼. 오늘까지의 네 행복을 전부 거짓으로 돌리고 싶진 않아.

레이지 : 미안해… 난….

가슴에 둘러진 엘렌의 손을 레이지는 살며시 잡고… 소리없이 눈물흘리며 몸을 떨었다.
아주 잠시 동안, 그녀의 품에 안겨 자신의 나약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동안.


레이지 : 언젠가 다시 돌아오면 돼. 우리가 떠난다고 이 나라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엘렌 : 언젠가 꼭…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정말로 예전의 삶을 되찾을 날이.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닐 뿐.

레이지 : 그래…….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말이었지만, 엘렌의 그 말은 레이지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지금의 엘렌은 다른 사람을 격려할 수 있다. 그것은 예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힘이었다. 엘렌 역시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둘이서 함께 지낸 나날은 결코 헛되이 흘려보낸 시간이 아니었다.

.
.
.
레이지 : …그래서, 계획은?

엘렌 : 타겟은 예전부터 정해 둔 게 있어. 토오호쿠(東北)에서 러시아로 빠지는 루트. 단, 준비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

레이지 : (인페르노가 움직이기 전에 끝내야 하는데….)

엘렌 :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한 타이밍이네. 미오 얘기.

레이지 : …….

어디까지나 '만일의 경우'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다.

레이지 : …서둘러 줘. 할 수만 있다면 미오한테는 끝까지 비밀로 하고 싶어.

엘렌 : …….

레이지 : 여긴 일본이야. 인페르노라도 대놓고 움직이진 못할 테니 시간은 아직 있어.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해질 때까진 미오는 마지막 카드로 남겨두자.

엘렌 : 알았어.

이사오자마자 신발장을 개조해 만들어 놓은 이중바닥 수납공간. 거기에 넣어두었던 기름종이 뭉치를 전부 끄집어내 바닥에 하나씩 늘어놓는다.

레이지 : …내일부터는 맨몸으로 다니지 않는 게 낫겠다.

엘렌 : …그렇군.

엘렌도 꾸러미 하나를 손에 들고 재빨리 포장을 뜯었다.

레이지 : (콜트 파이슨 4인치… 그걸로 할 줄 알았어.)

손에 든 파이슨의 보존상태와 가동을 확인하는 엘렌. 레이지는 357 매그넘탄이 든 종이봉지를 골라내 그녀에게 건네준다.

레이지 : (내 건… 그래, 숨길 수 있는 게 우선이야. 남들한테 들키지 않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총….
교복에 감출 수 있는 사이즈로 골라야 해. )

체육시간에 옷을 갈아입을 경우도 생각해서, 총집은 사용하지 않고 바지 뒤춤에 꽂기로 했다.
.
.
.
요코하마에서 참극이 벌어진 다음날.
리지를 비롯한 인페르노의 전투부대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 고도우파 행동대장 시가 토오루가 나타났다.


사이스 :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Mr.시가, 오랜만에 뵙는군요.

시가 : …당신도 일본에 와 있었나? 귀제페.
아니, 여기서는 '사이스 마스터'였지.

사이스 : 그렇게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팬텀도 제가 길러낸 인재랍니다. 이번 일본 원정에도 함께 참가했지요.

시가 : (팬텀….)

사이스 뒤편의 소파에 엎드려 누워 있는 소녀. 인페르노 최강의 칭호를 가진 암살자는, 그의 방문 따위 신경도 안 쓴다는 표정으로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빠져 있었다.

시가 :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예전에도 이 또래 되는 계집애를 보디가드 삼아 데리고 다녔어….
취미 한번 고약하군. 역겨운 자식….
뭐 됐어. 내가 참견할 입장도 아니고, 이녀석한텐 볼일 없으니까.)
Ms.리지, 일본 신문은 읽을 수 있나요?

리지 : 아뇨, 전혀.

시가 :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대신….
'어젯밤 10시경, 요코하마시 야마시타쵸에 있는 중화요리점 「香林」에 소총 등으로 무장한 5인조 외국인이 난입하여, 사장인 서영중(42)씨를 비롯한 종업원 3명이 사망, 5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리지 : …….

시가 : 고맙게도, 언론에서는 꽤나 호의적으로 각색을 해 줬더군요. 특히나 희생자 수는 겨우 1/3로.
그런 사정도 있고 해서, 이번 사건에는 보도규제가 걸려 있습니다. 경찰 당국에서 손을 쓴 거겠지요.

사이스 : 그야 당연한 말씀. 아무리 봐도 이 나라에서 벌어질 만한 사건이 아니니까요.

리지 : …이봐….

시가 : …어젯밤 습격에 참가했던 분들께는 한시라도 빨리 출국할 것을 권합니다.

리지 : 아아, 그러지요.

시가 : 다행히도, 고도우파가 개입했다는 증거는 일체 남기지 않고 그 두 사람을 제거했습니다. 인페르노 여러분들께는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단지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은, 앞으로 일본에서 활동하실 경우엔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를 것인지에 대해 반드시 저희와 상담을 해 주십사 하는 겁니다.

리지 : …그렇게 배배 꼬아서 말하지 마슈.

시가 : 그럼, 저는 이만.(자리를 뜬다.)

리지 : …손님 앞이라 가만히 있었는데….
케네스도 렉터도,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비행기에 타고 있어야 했어.

어젯밤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두 사람은 시신조차 거두지 못했다. 그들은 이 머나먼 땅에서 신원불명 시체로 처리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리지 : 그녀석들이 왜 죽었는지 알아?

칼 : 멍청하니까 그렇지.

리지 : 네가 쓸데없는 짓만 안 했어도….

칼 : 서는 도망치고 작전은 실패했겠지.
사망자를 내는 게 싫었으면 왜 나한테 전부 맡기지 않은 거야? 그러는 편이 훨씬 쉬웠는데. 그런 녀석들쯤은 10초면 싹쓸이였어.

리지 : 네 머릿속엔 죽이는 것 말곤 없냐?!

사이스 : 자자, 두 사람 진정하시고.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아직 이 나라에서 할 일이 안 끝났지요?
이번 일본 방문의 진짜 목적은 고도우파를 지원하는 게 아니라, 도망친 배신자, 전대 팬텀인 츠바이의 처형.

클로디아의 쿠데타에 가담하고 나서 행방을 감춘 그가 일본에 숨어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때마침 시가로부터 중국계 마피아를 섬멸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 것을 기회삼아, 최정예 멤버들이 일본으로 파견된 것이다.

리지 : …그렇지만… 지금은 일단 물러서야겠어. 시가 말대로, 여기서 더 이상은 큰 소동을 벌이지 않는 편이 나아.

사이스 : 무슨 약한 말씀을….
어째서 이 이상 Mr.시가에게 신경을 써야 합니까? 츠바이를 제거하는 건 고도우파와는 사무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인페르노만의, 말하자면 내무처리란 거지요. 오히려 그쪽에서 간섭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리지 : …저녀석을 계속 일본에 놔두자고?!

칼 : …훗.

사이스 : 하지만 이 일만큼은 그녀가 아니면 감당하기 벅찹니다. 뭐니뭐니해도 사냥감 둘이 모두 '팬텀'이라고 불렸던 자들이니까요.

리지 : …….
(둘 다 네가 그렇게 만든 거잖아. 능구렁이 자식….)
어쨌든 우선은 맥과이어한테 보고한 다음 지시를 기다린다.

칼 : 아, 그래.

리지 : 이봐, 어딜 가려고?!

칼 : 그렇게 열내지 마셔. 잠깐 바람 쐬러 나가는 거니까.(자리를 뜬다.)

리지 : …제길, 도대체… 저 바보녀석은….

사이스 : 성격은 그렇다 쳐도 실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Mr.맥과이어도 그 점은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겁니다.

리지 : 그리고 성격도 점점 비뚤어지겠지?

사이스 :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이군요. 확실히 전 세뇌 전문가이지만, 드라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그녀를 이끌고 온 것은 그녀 자신의 감정입니다.

리지 : …….

사이스 : 드라이는 초조한 겁니다.

리지 : …초조해?

사이스 : 그녀가 인페르노에서 최강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팬텀'의 칭호를 얻어 오늘에 이르렀지만, 그 칭호는 정당하게 계승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최강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전대 팬텀과 자웅을 겨룰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해서 츠바이를 쓰러뜨리고 명실상부한 팬텀의 칭호를 손에 넣는다면, 그때야말로 톱 스나이퍼에 걸맞은 안정성과 관록을 갖추게 되겠지요. 하루라도 빨리 그녀의 소원을 이루게 해 줘야 합니다.

리지 : ……정말로 그런 거야?

사이스 : 그렇다고 한다면?

리지 : 네가 그렇게 즐거운 듯이 떠들어댈 때는 대개가 무슨 기분나쁜 일을 꾸미고 있단 말이지.

사이스 : 그럴 리가, 당치도 않습니다.

리지 : …칫.

사이스 : 우선은 Mr.맥과이어에게 연락을. 저는 팬텀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
.
.
몬스터 머신의 심장이 뛰는 거친 고동소리가 지하주차장에 울려퍼진다.
그 소리를 들으며, 드라이 팬텀은 어제의 만남을 회상하고 있었다.


칼 : (…레이지, 2년 만이로군….
전혀 못 알아봤어. 완전히 어린애같아서….)

스쳐지나는 순간 눈에 들어왔던 경악의 표정.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소녀의 가슴에 잔혹한 희열이 샘솟는다.

칼 : (지금부터라고. 아직 멀었어 레이지. 이자까지 듬뿍 쳐서 갚게 해 줄 테니까….)

사이스 : 꽤나 즐거워 보이는구나, 드라이.

칼 : …치잇….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이 남자는 언제나 이렇게 부른다. 허물없는 사이라도 되는 양, '드라이'라고.

칼 : (아직 난 진짜 팬텀이 아니라는 건가…?)

사이스 : 어제 저녁에 안 보이더구나.

칼 : 잠깐 아는 사람 보러 갔어.

사이스 : 츠바이와 접촉했나?
이런이런, 기습할 절호의 기회를 그냥 내버리다니.

칼 : 당신이 알아서 뭐하게. 녀석들은 내 방식대로 처리할 거니까 참견할 생각 마.

사이스 : 그 기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네가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둘까?

칼 : 그럼 방해하는 녀석부터 박살내 주지.

사이스 : 지나치게 무모한 짓은 하지 마라. 내 입장도 있으니까.

칼 : 아, 그러셔.

사이스 : …오늘은 어디를 갈 셈이냐?

칼 : 방해꾼이 끼어들기 전에 잽싸게 해치울 거야.
…당신 입장이란 것도 있으니까.(주차장을 나선다.)

사이스 : 호오~ 이거 꽤나 재미있겠군….
.
.
.
나른하고 지겨운 수업시간. 그래도 푸른 하늘과 찬란한 신록을 감상할 수 있는 창가 자리라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상황이 바뀌기 전의 이야기다.


레이지 : (이런 위치에서 습격받으면 한방에 끝장이야….)

엘렌이 탈출루트를 확보할 때까지는 계속 이런 압박감을 견디고 있어야 한다.

레이지 : (…후우… 겨우 점심시간인가….)

앞으로 한 시간은 어디에 있어도 괜찮다.

레이지 : (지하매점에라도 가면 일단은 안심이야. 인페르노라도 학생으로 위장하고 습격하진 않을 테고… 인파 속에 있으면 안전해. 겨우 한숨 돌릴 수 있겠군.)

미오 : 저기….

레이지 : …?!
…아, 안녕.

미소를 떠올리면서도 어색한 기분에 말문이 막힌다.

레이지 : (밖에서 기다렸나… 왜 먼저 알아보지 못한 거야?)
…미안. 좀 서두르던 참이라….

미오 : 미, 미안해. 바빴어…?

레이지 : 아니, 별로 그런 건….
배가 고팠거든. 학교 매점은 금방 매진이잖아.

미오 : 아… 그렇구나….

레이지 : (오늘도 긴장하고 있군….

역시 이런 식으로 끌고 가는 건 안 좋은가.
늘 수동적이고 무뚝뚝한 게 버릇이 됐지만… 최소한 미오랑 함께 있을 때만큼은 제대로 리드해 줘야겠지….
지금도 그냥 이대로 얘기만 하고 헤어지는 건 너무하잖아.

…잠깐, 왜 미오가 여기 있담? 반도 다른데….)

자신의 둔감함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레이지 : …저기, 있잖아… 같이 학생식당 갈래?

미오 : 그, 그럴까….

…점심은 늘 사서 먹어?

레이지 : 지금은 부모님이 안 계시니까.
후지에다는 도시락?

미오 : 응.

함께 학생식당으로 가면서도, 미오는 손수건으로 싼 도시락통을 손에 들고 있다.

레이지 : (그러고 보니… 엘렌이랑 학생식당에서 먹을 때도 얜 늘 도시락이었지….
그보다, 이대로 같이 식당에 가면 사나에랑 마주칠지도 모르는데… 괜찮을까?)

그제서야 겨우, 그녀가 들고 있는 도시락 크기에 눈길이 갔다.
크고 작은 케이스가 하나씩. 여자가 먹기에는 꽤 많은 양이다.


레이지 : 후지에다는 밥 많이 먹는구나.

미오 : 저기… 내 몫은… 이게 다야.

그렇게 말하며, 미오는 작은 도시락통을 가리킨다.

레이지 : ……아, 그래… 그럼 남는 만큼 나눠줄 수 있겠어?

미오 : 아마… 맛은 별로겠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레이지 : 그럼, 식당 말고 어디 다른 데서 먹자.

미오 : 으응!
.
.
.
히로노 : 어? 오늘은 미오가 없네?

사나에 : 흐흐흐~ 당분간 미오는 우리랑 점심 안 먹을 거야.

히로노 : 무슨 소리야?

사나에 : 남친 생겼거든. 남·자·친·구! 그치 엘렌~?

엘렌 : 어째 그렇게 된 모양이네.

히로노 : 거짓말! 누구야 누구?

엘렌 : 글쎄 그게 우리 오라버니 아니겠어?

히로노 : 뭐어?! 사나에 반에 있는 그?

사나에 : 맞아. 그 멍~한 녀석.

엘렌 : 잠깐, 남의 오빠한테 그런 말이 어딨어?

히로노 : 그래그래. 엘렌 오빠 꽤 괜찮지 않아? 어딘가 순진해 보이고.

사나에 : 순진하다니… 그것보단 아직 시차적응이 덜 된 느낌이랄까?

히로노 : 나는 사나에가 찍은 줄 알았는데.

사나에 : …화낸다.

히로노 : 근데, 엘렌이랑 오빠는 쌍둥이면서 하나도 안 닮은 거 아니야?

엘렌 : 그야 이란성이니 당연하지.

히로노 : 있잖아, 혹시 너네 오빠, 미국에 있을 때도 꽤 인기 좋지 않았어?

사나에 : 아, 그 얘기 꼭 들어 보고 싶네. 말 나온 김에 식당 가서 동생을 심문해 볼까!

엘렌 : 너희들….

그렇게 웃는 순간, 창밖에서 던져진 반짝이는 놋쇠빛 광채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금속음과 함께 교실 바닥에 뒹구는 그것의 존재를, 누구 하나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엘렌 : …….

창밖에는 이미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사나에 : 왜 그래 엘렌?

엘렌 : 아, 으응… 미안. 잠깐 급한 일이 생각나서.

히로노 : 뭐어?

엘렌 : 금방 갈 테니까 자리 잡아 둬.

그 말을 남기고 엘렌은 교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떨어진 9mm 파라블럼의 빈 탄피를 발로 차 쓰레기통 뒤편에 감춘다.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레이지 : (결국 여기밖에 없군….)

점심시간이 되어도 옥상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햇살은 따뜻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차갑다. 식사후의 휴식을 즐기기에는 약간 때가 이른 모양이다.


레이지 : (…여긴 창가와는 비교도 안 된다고….)

미오 : 왜 그래?

레이지 : …아니.

만일 미오의 눈앞에서 날아든 총탄에 맞는다면….
머리가 산산이 부서진 채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만다.


레이지 : (…괜찮아. 아직 그런 일은….)

지금은 아직, 사람 눈에 띄는 자리에서 습격당할 염려는 없다. 그런 이유를 대서 억지로 자신을 안심시킨다.

레이지 : …여기로 할까.

찬 봄바람을 막아주는 장소를 찾아, 두 사람은 승강구 안쪽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미오 : …정말로 맛은 자신없는데….

레이지 : 직접 만든 거야?

미오 : …응.

레이지 : (손으로 싼 도시락이라….)

미오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꽤나 적극적인 행동. 아마도 사나에가 무책임한 작전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레이지 : (…나 참, 우리 둘 다 완전히 장난감 취급이로군.)

도시락 자주 만들어?

미오 : 엄마가 일을 하셔서 식사는 내 담당이거든. 만든다고는 해도 전날 먹다 남긴 반찬이니까.
아… 오늘은 평소랑은 다른 거야.

레이지 : 알아. 정성껏 만들어 왔잖아.
진짜 맛있다. 고마워.

미오 : …그, 그런… 고마워….

레이지 : (…칼과는 정반대로군….
손으로 만든 요리를 먹는 건 그녀석이랑 함께 지내던 때 이후로 처음이야. 살벌한 일상 속에서 한순간이나마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그 시절….
…그만. 지금은 잊어버리자….
지금 나는 미오의 남자친구. 그렇게 연기하고 있는 이상… 곁에 있는 순간만이라도 미오만을 생각해야 돼….)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간다.

레이지 : 5교시까지 아직 시간 있지?

미오 : 어디 보자….

별 뜻 없이 물어보자, 미오는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목시계를 차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가 꺼낸 것은 회중시계도 아니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묵직한 남성용 고급 손목시계. 고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악취미가 느껴질 만큼 요란스럽다. 미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다.


레이지 : …시계가 멋진데.

미오 : 아, 이거? 이런 시계를 갖고 있다니, 이상하지? 내 팔엔 안 맞아서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녀.

레이지 : 근데 어째서 그런 걸?

미오 : 삼촌 유품이야.

레이지 : (삼촌….)

엘렌의 설명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미오가 삼촌이라 믿고 있는 남자, 고도우 다이스케.


레이지 : …그 삼촌이랑은 사이가 좋았어?

미오 : 응… 무역일 때문에 늘 외국에 나가 있어서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나한테 이것저것 잘해 주셨어.

레이지 : 그래… 그렇구나….

미오 : 아버진 내가 갓난아기일 때 돌아가셨대. 그리고 나서 엄마는 시댁이랑 사이가 안 좋았는지 바로 친정으로 돌아오셨고.
그래서 나, 아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엄마도 얘기를 안 해 주시고. 그치만 삼촌이 아빠 얘길 많이 들려주셨어. 말투라든가 버릇, 좋아하셨던 음식같은 거… 삼촌 만나는 거 엄마한테는 비밀이었지만.

레이지 : 흐음….

미오 : 친가 사람들하고는 지금도 전혀 연락이 없어서 성묘도 못 해. 아빠가 어디에 계신지도 몰라.

레이지 : 그치만… 그럼 그 시계는?

미오 : 삼촌 부하직원이었다는 사람이 전해준 거야.

레이지 : …….

시가일 것이다.

미오 : 출장을 갔다가 사고를 당하셨대… 벌써 2년 전 일인가.

2년 전, 밤안개 깔린 LA항에서 처절한 최후를 맞이한 고도우 다이스케.
어둠을 가르는 총구의 섬광이 기억에 되살아난다.
그날 밤, AK 소총으로 야쿠자들을 잠재운 것은 엘렌이었다. 미오가 친구라고 믿고 있는 엘렌.


레이지 : (…미오한테는 절대 알릴 수 없어… 너무나도 잔혹한 진실이야….)

사나에 : 아, 여깄었네.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로 인해 생각은 중단되었다.

사나에 : 이런, 대화중이셨나?

미오 : …!!

레이지 : 너 말이야… 자기가 부추겨 놓고 이젠 방해하기냐?

사나에 : 나도 내키는 건 아니지만… 바다를 건너온 손님인데 어쩔 수 없잖아.

레이지 : (…뭐라고?)

사나에 : 은사인 귀제페 선생님이 찾아오셨어. 지금 중앙정원에 계셔.

레이지 : …….

칼에 뒤이은 방문자.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연극같은 짓을 즐기는 자라면 짚이는 인물은 하나뿐이다.

미오 : …아즈마군, 얼른 가 봐야지.

레이지 : 아, 그래….
도시락 남겨서 미안… 나중에 또 신세질게.

사과를 하며, 아직 다 비우지 않은 도시락을 미오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식욕은 이미 싹 가신 상태였다.
.
.
.
중앙정원 벤치에 앉은 그 남자는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었다. 학생들로부터 호기심의 눈길이 일제히 쏠렸지만, 본인은 전혀 신경쓰는 기색 없이 친절한 태도와 환한 미소로 응답하고 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학생들이 교실로 돌아간다.


레이지 : (…겨우 주위 시선이 사라졌군….
녀석과 만나는 순간은 누구한테도 보이고 싶지 않아… 관계없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그렇게도 우스운지, 사이스는 조용한 중앙정원에서 변함없이 웃음을 머금은 채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지 재차 확인한 다음, 레이지는 사이스가 기다리는 벤치로 다가갔다.


사이스 : …꽤나 기다리게 하는구나.

레이지 : (대답같은 건 필요없어… 이녀석한테 줄 건 죽음만으로 충분해. 내 손으로 직접… 그 기분나쁜 웃음을 지워 줄 테다.)

사이스 : 그래. 넌 날 죽일 수 있다. 명령을 받거나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순수한 자기 의지만으로.
그것이 네 특징이다. 츠바이.

레이지 : …….

상대의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고 문득 의심이 든다.

레이지 : (이녀석, 대체 무슨 목적으로….)

사이스 : 순수한 살의를 원천으로 삼는 너는, 최면 따위 잔재주로 마음을 감싼 아인과는 광채도 경도도 달라. 비유하자면 다이아몬드같은 거지. 인공 모조품은 아무리 해도 천연 결정에 미치지 못해.
어떤 의미에서 너는 실패작이지만… 그럼에도 내 연구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래서 난 이번에는 '증오'라는 테마에 관해 생각해 봤지.
내 자랑스러운 세번째 작품은 잘 감상했나?

레이지 : (세번째… 라고? 이자식, 질리지도 않고 또 누군가를 암살자로….
설마…?!)
…칼한테 무슨 짓을 했나?

사이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것도 안 했다. 최면도 암시도 없고, 기억이나 가치관도 일체 조작하지 않았어. 단지 그녀가 가진 증오심만을 철저히 갈고 닦았다. 그야말로 다이아몬드 원석같은 재료였으니까.
캐낸 건 너라면서?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용케도 그런 인재를 내 손에 남겨 줬으니.

레이지 : …그런… 그런 건….
(칼만은… 나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빌었는데… 하필이면 이자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눈앞이 캄캄해진다….

레이지 : …네놈만은….

사이스 : 용서할 수 없나? 내가 미운가? 그래도 여기선 죽일 수 없을 걸. 위험이 너무 크니까.

레이지 : (…그 말이 맞아….
죽이는 건 간단해. 비명을 지를 틈도 주지 않고… 하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녀석을 봤어. 사나에는 녀석이 나와 만났다는 건 알고….)

사이스 : 으음, 대단한 자제력이다.
넌 순수한 증오와 더불어 냉철한 판단력도 갖추고 있구나… 훌륭한 밸런스야.
솔직히 말해 드라이는 좀 지나친 감이 있거든. 증오에 사로잡혀 제어가 전혀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혹시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앞뒤 안 가리고 너나 아인에게 덤벼들었겠지.
그래도 사람 눈을 피할 만큼의 지혜는 있더군. 좀 전에도 아인을 어딘가로 끌어내는 모양이던데.

레이지 : …뭐야?!

사이스 : 도망칠 줄 알았는데, 아인도 꽤나 배짱이 있더구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드라이와 만나려는 모양이다.

레이지 : (엘렌… 대체 왜 그런 위험한 짓을?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습격당할 일도 없을 텐데….
아니, 설마… 설마 정면으로 싸우려고…? 칼하고…?!)

사이스 : 도우러 갈 생각이라면 서둘러라. 학교 건물 뒤쪽인 모양이다.

레이지 : …….
(결국 이녀석은 뭘 하고 싶었던 거냐… 아니, 지금은 그런 거에 신경쓸 때가 아니지….)

사이스의 웃는 얼굴로부터 등을 돌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레이지 : (…엘렌이 칼과 만난다… 사람 눈에 안 띄는 장소라면… 그 예배당인가!)
.
.
.
스테인드 글라스의 빛을 받으며, 엘렌은 익숙해진 조용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엘렌 : 이제 그만 나오시지? 여기라면 아무도 방해할 사람 없어.

칼 : 만나는 건 처음이로군… 그래도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 아인.

엘렌 : 너는?

칼 : 사이스한테는 '드라이', 딴 녀석들한테는 '팬텀'으로 통해.

엘렌 : …그래….
요즘 팬텀은 일부러 상대한테 모습을 보이나?

칼 : 등 뒤에서 살그머니 빵~! 하는 건 재미가 없잖아. 후훗~
너랑 레이지를 쫓기 위해 난 인페르노같은 데서 굴러먹었지. 너희 둘을 쫓고, 끝까지 몰아붙이고 나서 해치운다… 2년 동안 이날을 쭉 기다렸다고.
그러니까 실컷 봐야겠어. 겁에 질려 도망치는 네 꼴을.

엘렌 : 그게 네 즐거움이야?

칼 : 그렇고말고.
내 얼굴을 봤을 때 레이지 표정이라니, 걸작이 따로 없더라니까.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벌벌 떨면서.

엘렌 : …….

칼 : 이 다음은… 그래그래. 레이지가 보는 앞에서 꼭 널 죽여버리고 싶어. 그녀석이 어떤 낯짝을 할지 기대되는 걸.

예배당의 공기가 한순간에 차갑게 얼어붙는다.

엘렌 : 그건 무리야. 레이지는 여기에 없고, 네가 두번다시 그를 만날 일도 없을 거야.

칼 : …어째서?

엘렌 : 날 먼저 만났으니까.

칼 : …….

헤에~ 준비성이 좋은데?

엘렌 : 덕분에.

칼 : 몸 바쳐서 레이지를 지키겠다고? 사랑에 빠진 여자란 기특하기도 해라~

엘렌 : 넌 어때?
…버림받은 게 잊혀지지 않았지? 2년 동안 한시도.

칼 : …뭐?

엘렌 : 레이지가 후회했으면 좋겠지? 슬퍼하길 바라?
그래도 소용없어. 너란 존재는 결국 지나간 과거. 하지만 그 사람은 현재를 살고 있으니까.

칼 : 뭘 아는 척 떠들어….

엘렌 : 그 사람은 괴로워하지 않아. 네가 앞길을 막아선다면 후회하지 않고 널 쏠 거야. 그 일로 자신을 탓하지도 않을 거고.
웃기지 마. 이제 와서 네가 레이지한테 뭐였다고?
네가 모르고 있을 뿐이야. 그 사람의 진정한 힘을.

칼 : …!!

레이지 : …그만둬!!
(…어째서 이런 일이….)

칼 : 어라? 안 올 녀석이 왔네.

레이지 : (…역시… 이 목소리, 틀림없다….
2년 전 노르망디 거리의 그 저택에서… 대체 어떻게 그 폭발에서 살아남았는지….
어쨌든 칼은 지금 여기 있어.)

그녀에게 총구를 겨누면서도 마음은 거센 갈등에 휩싸인다.

레이지 : (난 뭘 하고 있는 거야… 칼한테 총을 겨누고….)
…두 사람 다 총 내려.

칼 : 후후후… 저런 소릴 하는데? 얘기가 좀 다르지 않아? 아무 주저도 없이 날 쏠 거라면서.

엘렌 : …….

레이지 : 칼… 부탁해.

칼 : 한심한 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뭐야 레이지? 후딱 쏘면 되잖아. 이제 와서 뭘 쭈뼛거리긴.
한 번은 날 버렸으면서.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레이지 : …….

칼 :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똑같은데 어때서. 얼른 날 죽여 보시지.
…그래도 얌전히 죽진 않아. 이 계집애도 함께 지옥으로 데려갈 테니까.

엘렌 : …!!

레이지 : (…칼… 정말로 쏠 작정인가…?!
나랑 엘렌이 겨누고 있는데도 태연히 웃으면서… 넌 그렇게까지….)

리지 : 그만두지 못해! 이 멍청아!!

레이지 : (…리지? 어째서 당신까지 여기에….)

칼 : …아직도 일본에 있었어?

리지 : 널 혼자 남겨두고 돌아가라고? 걱정돼서 와 봤더니만 역시나. 이게 무슨 미친 짓거리냐?

칼 : 당신이 알 바 아니야.

리지 : 얼간아, 여긴 일본이다!! 대낮에 총질을 해대면 뒤처리는 어쩌겠다고!

칼 : 내가 알 바 아니지.

리지 : …잘 들어. 한 방 쏘기 시작하면 그 뒤로는 몇 방을 쏘든 똑같아. 네녀석이 쏘겠다면 그땐 여기 있는 녀석들 전부 다 내가 날려버린다.

칼 : …….

리지 : 총 내려. 거기 둘은 신경쓰지 말고. 내가 조준하고 있다.

레이지 & 엘렌 : …….

칼 : …….
빵~!
…쳇, 시시하게 끝나는군.

서부영화 주인공처럼 빙글빙글 총을 돌리더니, 칼은 허리의 총집에 총을 꽂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예배당을 나가버렸다.
그 뒤에는 이쪽으로 총을 겨눈 리지가 남아있을 뿐.


레이지 : …우린 여기서 총질을 할 만큼 바보가 아니야.

리지 : 그건 그렇지….
(총을 집어넣고)저게 네 후임이다 츠바이. 덕분에 난 살아도 사는 기분이 아니야.

레이지 : …고생하는군.

리지 : 그래.

레이지 : …….

리지 : …….
어쨌든, 학교놀이는 집어치우고 잽싸게 어디로 사라져. 다음에도 저 미친개를 막을 수 있을지 난 자신없다고.

레이지 : …알고 있어. 최대한 서두르지….

지친 발걸음으로 떠나가는 리지를, 츠바이는 말없이 배웅했다.

레이지 : …진짜 쏘려고 했어?

엘렌 : …….
넌 어때? 그앨 쏠 수 있었을까?

레이지 : …….

칼이 엘렌을 쏜다. 그렇게 확신했던 순간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난다.

레이지 : (…만약에 리지가 조금만 늦게 도착했다면… 난 칼을 쐈을까…?
안 그랬으면 엘렌은 죽었을 거야… 칼보다 먼저 내가 쏘지 않았다면….
그런 건 생각도 하기 싫어….
하지만…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진다면… 그때는… 엘렌? 아니면 칼…?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엘렌 : 시간이 없어.

레이지 : …그래.

엘렌의 속삭임이 갈등을 잠시 뒤로 미뤄 주었다.

레이지 : (그래… 칼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교섭이고 흥정이고 생각할 처지가 아니야… 시간이 너무 없다….)

엘렌 : 인페르노가 그앨 잡아두게 하는 수밖에 없어. 억지로라도.

레이지 : …….
(마지막 카드를 써야 하는가… 시간을 벌기 위해….
미오를 이용하는 수밖에….)
.
.
.
부하 : 형님, 전화가 왔습니다.

시가 : 이 시간에? 어디의 뭐 하는 놈이야?

부하 : 그게… '클로디아의 심복'이라고 하는데요….

시가 : ……돌려 봐.

레이지 : 2년 만이군, 시가 토오루.

시가 : …너 이자식, 대체 누구냐?

레이지 : 아까 말한 대로다.

시가 : (2년 전… 클로디아 맥커넌… 항상 옆에 있던 동양인 꼬맹이….
전대… 팬텀?!
조직을 빠져나와 지금도 추격을 받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녀석이 지금 와서 무슨 볼일로?)

레이지 : 이건 국제전화가 아니야. 우린 지금 당신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있다.

시가 : 그게 어떻다고….

레이지 : 참고로 말하자면 시노쿠라 학원의 학생으로 위장해 있지.

시가 : …뭐야…?

레이지 : 덤으로 하나 더 말해주자면, 후지에다 미오와 친한 친구사이야. 그애가 고도우 카이텐의 딸이란 것도 알고 있다.

시가 : …이놈들이.
알고 있겠지? 너희들은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어….

레이지 : 안심해라. 우리들은 앞으로 1주일 안에 일본을 뜬다.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다면 미오와 다시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도 없으면 말이지.

시가 : …무슨 뜻이냐?

레이지 : 현재 우리들은 인페르노의 자객에게 쫓기고 있다. 시가 토오루, 당신이 그걸 막아 줘야겠어.
지금 일본에 있는 인페르노 녀석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해. 책임지고 말이야.

시가 : …!!
(그러고 보니… 녀석들 출국을 연기했다. 그리고 그 기분나쁜 금발 계집애… 팬텀의 칭호를 계승했다고 했지….)

레이지 : 잊지 말도록. 우리는 2인조다. 언제나 어느 한쪽이 후지에다 미오 곁에 있어.
만일 둘 중에 하나가 죽으면 남은 한 사람이 미오를 죽일 거다. 총에 맞든 사고를 당하든 한 사람이 죽으면 한 사람을 죽인다. 알겠나?

시가 : 잠깐… 잠깐 기다려…!
(농담 말라고… 지난번 차이나타운같은… 그런 짓거리를 하는 놈들을 어떻게 막으라고!)

레이지 : 그리고, 만일 당신네 조직원들이 우리 눈에 띄면… 그땐 미오를 감금하고 모든 사실을 밝히겠다.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을 당했는지 전부 설명해 준 다음, 일본을 탈출할 때까지 인질로 삼겠어.
얘기는 여기까지다. 별로 복잡한 내용도 아니니 잘 알아들었겠지?

시가 : (…제길, 진정해라…!)
…인페르노 녀석들은 우리와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다. 어째서 내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레이지 : 어째서냐고? 후훗… 그건, 미오가 무사하길 바라기 때문이지.
귀여운 아이야. 가능하면 칼자국같은 건 내기 싫은데.

시가 : (…이 꼬맹이가….
인페르노에 쫓기고 있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레이지 : 그럼 열심히 해 보라고, 시가 토오루.
나도 예전엔 '팬텀'으로 불리던 남자다. 인정 따윈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전화를 끊는다.)

시가 : 제기랄!!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시가는 수화기를 내동댕이쳤다.

시가 : (후지에다 미오….
여기선… 조직의 사무실에서는 듣지 말아야 할 이름인데….
…형님…….)
.
.
.
레이지 : …후우….
이 정도면 괜찮을까?

엘렌 : 너도 연기가 꽤 늘었구나.

레이지 : …너만큼은 아니야.

목소리를 깔고 으름장을 놓는 게 고작이었다.

레이지 : (…아직도 무릎이 덜덜거려….
지금 그 협박을 시가가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그자가 인페르노에 미치는 영향력에 기대를 걸 수 있다면… 일단 일본을 떠날 때까진 안심이야.
물론 어떤 경우에도 미오한테 손을 댈 생각은 없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애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어야 해. 마지막까지 계속… 우리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도… 진실을 알게 될 일은 없어….)

엘렌 : 이제 난 오타루(小樽)로 출발할 거야.

레이지 : 왜 그렇게 갑자기…?

엘렌 : 직접 담판을 하고 오겠어.
러시아 국적 화물선인데 일본차를 밀수하는 배야. 액수에 따라서는 밀입국도 받아주나 봐. 어제 선장의 대리인하고 약속을 잡았으니까 이번 주말에 교섭하고 올게.
다음 배는 다다음주… 잘 되면 거기 탈 수 있어.

레이지 : …혼자서 괜찮겠어?

엘렌 : 넌 미오 곁에 있어. 아까 협박이 진짜인지 확인하려고 시가가 움직일지도 몰라. 네가 미오랑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레이지 : 시가가 움직일까? 방금 막 전화했는데….

엘렌 : 그게 대비란 거 아니겠어?

레이지 : …….

엘렌 : 모레 밤까진 돌아올게. 결석은 내일 하루면 되니까 담임한테 얘기해 줘.
.
.
.
사이스 : 드라이, 일이 곤란하게 됐다. 츠바이네가 고도우파를 협박했어.

칼 : 하아? 그 둘이 야쿠자한테서 무슨 꼬투리를 어떻게 잡았다는 거야?

사이스 : 그들이 이유없이 학생 행세를 하고 다닌 게 아닌 모양이다. 그 학교에는 고도우파 두목의 숨겨진 딸이 다니고 있다더군. 그곳 학생으로 변장한 건 그녀를 노리고 한 거겠지.

칼 : …….

사이스 : Mr.시가가 얼마나 화를 내던지… 정말 무시무시하더구나….

칼 : …그래서, 앞으로 어쩔 건데?

사이스 : Mr.시가는 두 사람이 도망치는 것을 그냥 놔두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 사람도 어엿한 인페르노 멤버니 함부로 대할 순 없지. 고도우네 아가씨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는 손을 쓸 수 없겠다.
…유감이지만 이번엔 여기서 끝인 모양이구나.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다.

칼 : …….

사이스 : …어쨌거나, 사정이 그렇게 됐다는 거다. 그럼 난 이만.(방을 나선다.)

(…크큭, 도화선에 불이 붙었군. 모든 것이 내가 예상한 그대로야.
내가 조사해서 아인에게 가르쳐 준 후지에다 미오의 정체… 궁지에 몰린 츠바이라면 반드시 써먹을 줄 알았지.
그렇다고 이런 일로 물러설 드라이도 아니고… 이젠 폭발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군.)

리지 : 이봐, 사이스.

사이스 : 이런, Ms.리지, 안색이 좋지 않으시군요.

리지 : 고도우네 딸 이야기, 팬텀한테는….

사이스 : 아아, 방금 막 얘기했습니다. 얼마 동안은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럼 전 실례.

리지 : …그렇게는 안되지.

(방에 들어서서)팬텀, 츠바이네 건 말인데….

칼 : 중지라고? 사이스한테 들었어.

리지 : …그러게 말했잖아. 네가 장난삼아 얼굴을 내보이니까 그렇게 된 거다.
(…그렇다고 민간인까지 끌어들이는 거냐? 츠바이….)

칼 : …빌어먹을!!
그자식… 그 새끼가!!(의자를 걷어찬다.)

리지 :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야….
2년 전… 츠바이 녀석은 목숨을 걸고 칼을 지키려고 했는데….
처음 만났던 때가 아직도 기억나는군. 사이스한테 이끌려 왔을 때의 그 어두운 눈빛… 츠바이 말처럼 활발한 아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어….
그러던 애가 사이스 밑에서 어느 틈에….)

…그렇게도 그녀석이 밉나?

칼 : …당연하지! 뭣 때문에 지금까지 당신들 손끝에서 놀아났는지 알아? 그자식을 끌어내서 죽여버리기 위해서라고! 오직 그 이유만으로 난 2년을 버텼어!!

리지 : ……솔직히 말해 난 지금 안심했다.

칼 : 뭐어?!

리지 : 너랑 츠바이가 서로 싸우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어… 칼.

리지가 그녀의 본명을 부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칼 : …흥, 나도 꽤나 얕보였군. 내가 질 줄 알았어?

리지 : 그게 아니야. 아닌데….
…틀림없이 녀석은, 2년 전에 모두를 속이고 이용해먹었어. 나 역시 마찬가지로 당했고. 그래도 너 하나만 놓고 말한다면….
칼, 그녀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널 지키기 위해서였다.

칼 : 지킨다고…?
흥! 웃기지 마셔. 그자식이 지키고 싶었던 건 자기 자신뿐이라고!
난 인페르노에 들어와서 모든 사실을 알았어. 녀석은 그게 두려웠던 거지. 날 끝까지 속일 수 없게 되는 게.
…그래서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가르쳐 줬어. 날 인페르노에서 떼어놓으려고 따돌린 거야.

리지 : 하지만 너라고 좋아서 암살자가 된 게….

칼 : 되고 싶었어. 암살자란 거.
…최고 아니야? 지금 이 몸은 울던 아이도 뚝 그친다는 팬텀이라고. 거리에서 설치는 갱들도 내 이름만 들으며 벌벌 떨어. 그런 녀석들을 엉망으로 만들고 실컷 가지고 놀다 죽여버린다. 이렇게 즐거운 생활이 또 있나?

리지 : …….

칼 : 그녀석은 날 두려워했어. 내가 너무 강해질 게 뻔히 보였거든. 언젠가는 나한테 밀려난다는 것도, 날 속이고 이용한 대가를 비싸게 치를 것도.

리지 : ……앞으로 며칠 동안은 상황을 지켜보겠지만… 짐은 잘 챙겨 둬. 멋대로 나가 돌아다니지도 말고. 알았어?

칼은 이쪽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지만, 리지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지 :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 귀국할 때까진 눈에 불을 켜고 있어야 하나….
저렇게 돌아버렸을 때의 칼은 그냥 야수나 다를 게 없다. 앞뒤 안 가리고 터무니없는 짓만 하고… 지금까지 몇 명이나 거기에 말려들어 당했어….
그런데도 자기는 지금껏 상처 하나 없이 적을 해치우고… 확실히 저녀석은 천재야. 윗대가리 녀석들도 인정하는 바고….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이건 불꽃이라고. 불타 스러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반짝 빛나는… 저런 식으로는 얼마 못 가서 숨이 다하고 말아.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손을 씻게 만들려고 했는데….
뭐라고 해도 칼이 이렇게 된 건 내 책임이니까… 내 실수로 와이즈멜한테 알려지는 바람에….
그러니까… 아무리 다른 녀석들이 칼을 미워하더라도 나만은 저녀석을 버릴 수 없어… 나만은….)
.
.
.
토요일. 수업은 오전만으로 끝이 났다. 2학년 B반 아즈마 엘렌이 결석한 사실에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가 높이 뜬 한낮에 수업을 끝낸 학생들은 평소보다 들뜬 모습으로 교문을 빠져나간다. 학생들 틈에 섞이자 묘하게 다급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레이지 : 어째 다들 급해 보이는데?

미오 : 다다음주 월요일이 기말고사라 그런가….

레이지 : (…역시나… 마음껏 놀 수 있는 주말은 오늘 내일 이틀뿐이군.
기말고사라… 엘렌 계획대로 잘 되면 이미 모든 일이 끝나 있겠지… 진학 걱정은 나랑은 관계없는 얘기야.

어째 아쉬운데… 이런,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지. 이쪽은 성적이 아니라 목숨이 걸렸으니까.
엘렌… 잘 되고 있을까? 낯선 거리에서 밀수상과 접촉해서….)

미오 : 아즈마군, 기말고사 위험해?

레이지 : 응? 뭐어… 그, 그런 거지….

미오 : 나도 좀 아슬아슬한데. 학기초에 감기 걸려서 많이 쉬었거든.

레이지 : 그렇구나….

미오 : …….

레이지 : (…이럼 안되지. 얘기를 건성으로 듣고 있잖아. 좀 더 진지하게 대답을 해야….)

……아아, 그, 그렇지….
있잖아, 우리도 내일….

미오 : ?

레이지 : …어디 놀러 안 갈래?

미오 : 에?!
저, 저기… 나….

레이지 : 아, 아니야… 미안….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시험준비로 힘들다는 얘길 방금 전에 해 놓고서….)

미오 : …….

레이지 : 그러니까 그게…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힘들면 관두지 뭐.

미오 : 아니….
가자. 모처럼 주말인데.

미오의 해맑은 웃음을 보며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이 이 소녀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레이지 : (…생각할수록 난 비겁한 놈이다… 이런 애를 속이다니….)

지금의 데이트 약속은 엘렌의 지시이기도 했다. 언제나 미오 곁에 붙어서 고도우파를 협박하는데 이용하라는.

레이지 : (…그래도… 만약에 고도우파가 사적인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미오를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녀한테 접근하는 건 무의미… 아니, 그것뿐만 아니라 미오를 위험에 빠뜨리게 돼.)

뒤춤에 찔러넣은 총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레이지 : (…이제 와서 무슨… 결심한 거잖아. 끝까지 미오를 속이기로….)
.
.
.
오후 1시.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일요일의 북적이는 인파 속을 느긋하게 걸어 본다.

레이지 : (…그러고 보니, 이렇게 거리를 걷는 건 처음이군. 고생해서 일본에 돌아와 놓고서….)

문득 돌아보자, 이쪽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던 미오와 눈이 마주쳤다.

레이지 : (그러고 보면 사복 입은 걸 보는 것도 처음이네….)

미오 : …미안. 많이 기다렸어?

레이지 : 아냐. 내가 너무 일찍 나와서… 일단 점심부터 먹을까?

미오 : 그러자.

레이지 : (…이렇게 웃는 모습 처음 봐. 평소에는 얌전하고 소극적인 인상인데… 이렇게 환하게 웃기도 하는구나. 오랜만에 밖에 나온 사람같아….
학교에서도 친구가 별로 없어 보이지만… 평소에도 이렇게 밝게 지내면 친구들이 많아질 텐데.)

그녀의 웃는 모습에 이끌려서였을까.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레이지 : (뭘까… 이 편안한 기분은.
미오를 속이고 이용하고 있는데… 방금 전까진 죄책감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면서….
이러고 있으면 인페르노도 고도우파도 마치 꿈속나라 이야기같아….
이렇게 마음이 가벼운 건… 저 웃음 때문일까…?)
.
.
.
레이지 : 영화 재밌었어?

미오 : 응.

잠깐 쉬려고 찻집에 들어갔지만, 미오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오 : 오늘 아즈마군은… 좀 다른 것 같아. 평소보다 생기가 있다고 할까….

레이지 : …그렇게 보여?

미오 : 응.

레이지 : …….
(그러는 너야말로 평소와 달라 보이는데.)

미오 : 나, 사람 많은 데는 익숙치가 않아서… 평소같으면 금방 지쳐버리는데, 오늘은 어쩐지 하나도 안 피곤해.
시간이 흐르는 게 왠지 아까워서… 계속 이렇게 돌아다니고 싶어.

레이지 : 그렇구나….

시간은 흘러간다. 그리고 마지막은 반드시 찾아온다.
설령 지금의 위기를 무사히 넘긴다 해도 빠르면 다음 주, 늦어도 월말까지는 다시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


레이지 : (그때까지 조금만 더… 이런 기분으로 지낼 수 있다면….
이제 다시는 못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그런가… 그런 거였어… 나는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게 이렇게도 괴로웠던 거야. 이 소중한 시간이….)

당연한 것처럼 이 나라에 태어나 평범하게 생활했더라면 다음 주도, 다음 달도, 내년도….
쭉 이런 날들이 계속됐을 것이다.


레이지 : (…그래, 이건 새로운 나의 가능성…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를 다른 인생이야. 4년 전에 접어들 수도 있었던 또다른 인생….
그날 LA 빈민가에서 길을 잃지 않았다면… 인페르노에 붙잡히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손에 넣었을지도 모르는 생활… 이런 편안함도, 행복도… 변함없이 그대로였을 거야….
미국에 가기 전엔 생각조차 안 해 봤어. 똑같은 매일이 반복되고, 지루하기까지 했어… 그런 기억이 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지나버리고 또 잃어버린 지금… 바로 지금이기 때문에 이 시간이 행복하다고 가슴 깊이 실감할 수 있는 거야….
이제 와서… 이미 다 늦어버린 지금에 와서야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니….
이런 잔인한 행복을….)

미오 : 어디 안 좋아?

정신을 차리자, 앞에 앉은 미오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이쪽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렇기에 자신의 무지함에 까닭 모를 불안을 머금은, 무구하면서도 근심스러운 눈빛.


레이지 : ……있잖아, 만약에 내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산다면… 평범하게 태어나 계속 일본에 살면서….

미오 : …?

레이지 : 그래도 우리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면… 오늘처럼 이렇게 데이트를 할 수 있었을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미오 : 그야 물론… 아마 그렇게 됐을 거야. 어떤 삶을 산다고 해도 아즈마군은 아즈마군이잖아? 그러니까 아즈마군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난 틀림없이 좋아했을….
아, 그렇더라도 그때가 돼서 아즈마군이 OK할지 어떨지는 얘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레이지 : …….
(……미오… 넌…….
이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대답해 주는구나….
그런 너와 함께 있어서 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행복을 느낄 수 있어. 그것이 한순간의 덧없는 행복일지라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자제심을 잃어버릴 만큼 강렬한 충동이 치밀어올랐다.

레이지 :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다 고백해 버리고 싶어…! 내 정체도, 과거에 지은 죄도, 지금의 처지도…!
…그래도 미오는… 날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모든 진실을 알고 나서… 그래도 미오가 이렇게 미소지어 준다면… 틀림없이 난… 내 마음은 구원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떠한 '아즈마 레이지'라도 미오가 받아들여 준다면….
이 세상에선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 나지만, 미오 안에서만큼은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어….)

미오 : …?

레이지 : 후지에다, 난….

미오 : 뭔가 말하기 어려운 거야?

레이지 : …아니…… 하하하… 그, 뭐랄까….
우리들,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미오 : 그렇네.

레이지 : (…미오… 그 웃음이 눈부신 것도,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녀가 순수해서 그런 거야….
미오한테 의지할 순 없어… 당연한 거잖아. 바라보고, 동경하고…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건 미오와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야. 그녀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사치라고.)

그렇게 자신을 다잡는 일에 정신을 빼앗겨 경계가 느슨해졌다.
평소 습관처럼 가게 출입구가 시야에 들어오는 위치에 앉았으면서도,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피는 것을 게을리하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다. 그녀가 두 사람이 앉은 자리 바로 앞까지 와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칼 : 방해가 됐나?

다른 손님들이 눈에 띄게 술렁이기 시작한다. 금발에 비취색 눈동자, 유창한 영어같은 눈에 띄는 요소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의 온몸에서 뿜어져나오는, 마치 육식동물과도 같은 폭력적인 기운 탓이다.

미오 : 저기… 이쪽은?

레이지 : …아, 그러니까…….
저쪽에 있을 때… 친구.
(칼… 설마 여기서 시작하려고…?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거기에다 미오까지 말려들어서….
그럴 리가… 하지만… 칼이 조직보다도 날 향한 원한을 앞세운다면….)

미오 : 저기… 그럼 나, 먼저 돌아갈게.

레이지 : ……으응.
(다행이다… 미오는 이 자리에 없어야 해….)

칼 : …저게 야쿠자네 공주님?

레이지 : 그래….

칼 : 아인에, 나… 다음은 저 계집애? 넌 여자만 보면 닥치는 대로 이용해먹는구나….

레이지 : ……!
…말했을 텐데. 허튼 수작 하면 저애를….

칼 : 죽이겠다고? 어떻게?

레이지 : …….

칼 : 뻥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나 예상대로군.
24시간 내내 쟤한테 붙어있다고? 웃기지도 않네. 아인은 어디 있어? 너 진짜 거짓말 못하는구나.

레이지 : …….
(…제길, 역시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칼 녀석, 그저께는 학교 안에서도 거리낌없이 총을 뽑아들었는데, 이제 와서 인질 따위에 신경을 쓸 턱이 없지. 흥정같은 건 안 통해….
더 이상은 도망갈 길이 없군….)

칼 : 만사 끝장났다는 얼굴이잖아. 겨우 그 정도 근성으로 용케도 2년 동안이나 도망을 다니셨구만.

레이지 : …….

칼 : 그래도 네 어설픈 거짓말, 저기 겁쟁이 녀석들한텐 꽤 먹히고 있나 봐. 사이스도 리지도 바짝 쫄아가지고.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지 알면 거품 물고 쓰러질 걸.

레이지 : 그런데 넌 어째서….

칼 : …간단히 말해서, 네가 생각한 대로 고도우와 인페르노는 꼼짝 못하고 있어. 여기서 나만 해치우면 아직 기회는 있다는 거지. 지금도 맨몸은 아니잖아?

레이지 : (도발하는 건가…?
칼, 대체 어쩔 생각이야…?)

칼 : 사람들 눈은 신경쓰지 마. 경찰이 움직여 봤자, 어차피 며칠 있으면 너희들은 바다 건너 아닌가?
딴 사람들이 다치는 게 싫다면 장소를 바꿔 줄 수도 있어.

레이지 : …그렇게까지 해서 나랑 싸우고 싶어?

칼 : 훗, 당연하지. 널 해치우지 않으면 '팬텀'이란 이름도 빛이 안 나거든.
…자아, 전대 팬텀씨. 누가 진정한 팬텀인지 결판을 내자고.

레이지 : …그만해….
팬텀은… 너야. 지금의 난 그저 평범한 학생이고.

칼 : 웃기지 마 츠바이. 여기까지 와서 질질거리냐?

레이지 : 내 목은… 너한테 주마.

칼 : 이봐… 너 뭣 때문에 지금까지 그렇게 도망다녔어? 죽기 싫은 거 아니었나?

레이지 : 칼, 네 손에 죽는다면 그건 당연한 결과다. 죽어도 싼 짓을 했으니 어쩔 수 없지.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칠 생각도 없어. 다만….
조건이 하나 있다. 내 목을 줄 테니 엘렌… 아인은 그냥 도망치게 해 줘. 그녀는 이 일과 상관없으니까.

칼 : 그 여자 대신 죽겠다고?

레이지 : 아인은 더 이상 사이스나 인페르노에 해를 끼치지 않을 거야. 나만 해치우면 그걸로….

꺼내려던 말이 도중에 멈춰버렸다. 섬뜩하기까지 한 상대방의 침묵에.

칼 : ……죽어도 지키고 싶단 말이지. 그 계집애만은.

레이지 : 칼….

칼 : 나 대신 500만달러를 짊어지고 내뺀 너같은 자식한테도…… 그렇게까지 해서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거지? 그런 거군.

레이지 : 아니야. 그때 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의 주먹이 광대뼈에 묵직하게 얹혔다.
지금까지 팽팽하게 긴장해 있던 가게 안의 공기가 일순간에 얼어붙는다.


칼 : …넌 소원대로 죽여 주겠어. 단, 조금 더 가지고 놀다가.
좀 더 혼내주고, 괴롭힌 다음에… 그리고 나서 숨통을 끊어 줄 거야. 맨 마지막으로.

레이지 : 칼…….

종업원과 손님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칼은 거친 발걸음으로 가게를 나갔다.
.
.
.
칼에게 얻어맞은 왼쪽 뺨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저리고 아팠다.

레이지 : (그만 갈까… 여기 계속 있어 봤자 소용도 없고….)

일어나서 카운터로 가 계산을 끝내고, 눈에 띄게 어색해진 가게 분위기에 내몰리듯이 침묵에 잠긴 찻집을 나왔다.

레이지 : (…어째서… 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돼서 이렇게 된 거야….
칼을 잃어버린 그날… 난 내 자신을 원망했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칼이 살아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그보다 몇 배는 더 괴로워하고 있어….
칼과 함께 지낸 날들… 그땐 정말로 행복했어. 암살자로서는 절대 맛볼 수 없었던 행복, 그걸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건… 거짓말 위에 또 거짓을 쌓아올려서, 주변을 온통 거짓말로 덮어버렸기 때문이야….
그래도 하나만은 맹세할 수 있어… 그때 칼을 보고 사랑스럽다고, 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만큼은 절대 거짓이 아니야….)

미오 : …아즈마군.

레이지 : …아아, 걱정 끼쳐서 미안해….

미오 : 아니야….

레이지 : 돌아간 줄 알았는데.

미오 : 건너편 가게에서 기다렸어.
저기… 얼굴 괜찮아?

레이지 : 응?

미오의 말을 듣고, 칼에게 얻어맞은 뺨의 통증을 생각해냈다.

레이지 : (멍이라도 들었나 보군… 인정사정 없이 내갈겼으니까….)

미오 : …….

레이지 : (…설명을 해야겠지. 앞뒤가 맞는 설명을….
하지만 어떻게? 핵심부분… 알려져선 안되는 부분만 덮어두고 칼에 관해서 설명할 수 있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야. 칼 이야기를 하려면 미국에 있을 때 얘기도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해서 진실이 알려질 바엔 오해를 받는 편이 차라리 나아….)
………….
……돌아갈까.

미오 : ……으응.

조금 전까지 1분 1초도 아까웠던 시간이, 지금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역 앞에서 헤어질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거의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레이지 : …그럼 내일 봐.

미오 : 응….
저기… 오늘은 고마웠어.

레이지 : 나야말로….

'미안'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레이지 : (…지난 일을 다시 끄집어내서 어쩌자는 거냐. 숨기기로 한 이상은 없었던 일로 하는 수밖에 없어. 최악의 사태를 각오하더라도….)

어색한 작별인사를 나눈 다음, 미오는 개찰구로 향하는 인파에 섞여 사라졌다.

레이지 : (결국 미오한테도 전부 거짓말로 덮어버리는 수밖에 없겠군… 칼에게 그랬던 것처럼.)
.
.
.
레이지에게 주먹을 날리고 헤어진 후, 칼은 정처없이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해가 지고 네온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하면 거리는 또다른 얼굴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어느 나라에서도 변함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이 나라의 밤의 얼굴은, 칼에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한 것이었다.


칼 : (어린 것들이 떼거리로 뭉쳐가지고… 꼬라지가 저게 뭐야? 거리 갱단이라도 되는 줄 알아? 이녀석들한테는 사우스센트럴의 생지옥도 디즈니랜드 가장행렬과 다를 게 없어….
보고만 있어도 구역질이 나… 저 차림 그대로 LA 거리에 내던져 주고 싶군. 블러디즈 녀석들이 뼛골까지 쪽쪽 빨아먹겠지.
…빌어먹을! 시비라도 걸어오면 늘씬하게 두들겨 줄 텐데…!)

그럴 생각으로 주위를 잔뜩 노려봤지만 맞받아서 대드는 사람은 없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본어로 뭐라 비웃듯이 떠들며 모르는 척 지나칠 뿐이다.

칼 : (젠장… 이딴 나라,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거짓말쟁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거짓으로 뒤덮인 개떡같은 나라야…!)

고통이나 빈곤 따위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쾌락만이 흘러넘치는 거리. 이따금씩 눈에 띄는 노숙자도 세상을 다 산 듯한 노인들뿐. 아이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는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
말 그대로 가축이었다. 단체로 사육되고 그저 목숨이 붙어있을 뿐, 긍지도 이빨도 아무것도 없는 가축.


칼 : (…여기가 레이지가 태어난 나라….
용서 못 해… 물러터진 레이지랑 똑같이 곯아빠진 이 나라… 무사태평 되는 대로 살아가는 인간들… 가만 안 놔둬….
…그래도….
만약에 레이지가 아인이 말한 그대로였다면… 내가 앞을 막아서도 개의치 않고, 날 쓰러뜨려서라도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했다면… 그랬으면 레이지를 용서했을지도 몰라….
그렇게도 꼴사납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으려고 하는 녀석이었다면… 날 버린 것도 당연하니까.
그자식이 자기 목숨과 날 저울질해 보고서 날 버린 거였다면… 가진 것을 전부 잃어버리고 맨 마지막으로 버린 게 나였다면….
레이지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테니까. 예전의 나처럼… 녀석한테 버림받았을 때의 나처럼 껍데기만 남은 인간이었다면….
나도 용서해 줬을 거야….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그자식은 아직도 지킬 것이 남았어… 나랑 맞바꿔서 손에 넣은 게….)

레이지는 행복해 보였다. 거리에서, 학교에서, 레이지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가슴에 뚫린 구멍을, 그는 이 나라에 흘러넘치는 썩어빠진 환상으로 메우고 있었다.
그렇게 레이지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살아남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칼 : (…용서 못 해… 몽땅 다 박살내 버릴 거야.
레이지를 저렇게 만든 것들, 그 마음에 들어찬 허접한 환상도….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날려버리겠어….)
.
.
.
긴박한 분위기였던 칼과의 재회. 이후로는 다시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레이지 : (…칼은 알고 있어. 내가 진짜로 미오를 이용할 생각이 없다는 걸… 인페르노나 고도우파가 알면 그대로 끝장인데… 전혀 움직임이 없잖아.)

침묵 속에서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이 끝난다. 벨트 안쪽에 찔러넣은 총의 무게만이 유일한 비일상이었다.

레이지 : (그야말로 폭풍전야로군….
대체 어떻게 가고 있는 거야… 이대로 괜찮은 건가?)

유일한 위안이라면,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것.
학생들에게는 우울하기 짝이 없는 시험기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도 학년말 시험. 성적에 따라서는 진급도 영향을 받게 된다. 곳곳에서 우울한 표정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레이지 : (그렇다곤 해도… 찻집에서 칼이 화내던 모습… 누구도 못 말릴 줄 알았는데….)
.
.
.
수요일 점심시간.
예배당을 살피러 왔더니, 늘 그랬던 것처럼 엘렌은 거기에 있었다.


엘렌 : 기분나쁠 정도로 조용한데.

레이지 : 꼼짝 못 하고 잡혀 있는 건가?

엘렌 : …그랬으면 좋겠지만.
오늘까지 해서 앞으로 닷새… 방심은 금물이야.

레이지 : (앞으로 닷새… 긴 건지 짧은 건지 모르겠군.)

지난 주말, 엘렌과 대리인의 교섭은 성공리에 끝났다.
밀수선의 출항은 월요일 한밤중. 밤까지는 오타루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대편과 합류해야 한다.


레이지 : (…다시 말해 월요일 아침까진 도쿄를 출발해야 한다는 거군.
작별인사도 못 하겠지…? 사나에도, 미오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금요일에 헤어져서… 그걸로 끝이야.)

어느 날 갑자기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진 남매. 홍콩에 출장중인 '양친'도 연락 두절.
남겨진 자들은 어느 누구도 진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간다….


레이지 : (그게 당연한 거야….)
.
.
.
리지 : 사이스!

사이스 : (…이런, 단단히 화가 나셨군….)

리지 : 팬텀 어딨어! 너 또 뭔가 꾸미는 거 아니야?!

사이스 : 팬텀? 글쎄요. 오늘은 그쪽이랑 함께 있는 줄 알았는데.

리지 : ……모습이 안 보여. 젠장,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며칠 전에도 멋대로 호텔을 빠져나가서는… 그땐 아무 일 없이 밤중에 돌아오긴 했는데….
이번엔 달라. 정말 위험하다고!)
그녀석이 들고 나간 무기와 탄약, 양이 장난이 아니야… 이번엔 틀림없이 사고를 칠 거라고!

사이스 : 흐음, 그거 위험하군요. 혼자 내버려두면 무슨 짓을 할지 저로서도 판단이 안 섭니다.

리지 : 갈 만한 곳이라면 대충 짐작은 가….
맥과이어랑 시가한테 연락해. 내가 지금 따라간다!(방을 나선다.)

사이스 : 두 사람 잔소리는 내가 들으라고? 이런이런….
큭큭큭…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건가….
.
.
.
미오 : …하아.

노트에서 얼굴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며, 미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오 : (너무 몰아쳤나…? 무지 졸리네. 문장 외울 게 아직 한 페이지 더 남았는데….
……하아… 집중력이 떨어졌나 봐… 다른 때였으면 시험 전이라도 이렇게 힘들진 않았는데….
지난번 아즈마군이랑 데이트할 때 만난 여자… 도대체 누굴까…?
평범한 사이같진 않은데… 그때 두 사람 분위기, 도저히 난 끼어들 수 없었어….
…….
아니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
과거 일까지 함부로 참견하면 안돼… 역시 그런 건 좋지 않겠지? 괜히 그랬다가 아즈마군 기분이라도 상하면… 그땐 모처럼 좋은 분위기에서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
…그치만… 어제도 오늘도 아즈마군을 봤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부러 그 여자 얘기를 피하는 것 같아.
…….
…아니… 역시 생각하면 안되겠어. 지금은 시험에 전념해야지.

후우… 커피라도 마실까.
아, 엄마 출장 가셨구나….)

평소에는 원두를 직접 갈아서 제대로 끓여 마시지만, 오늘처럼 혼자만 있을 때는 기계를 꺼내기도 귀찮았다.

미오 : (…캔커피면 뭐 어때서.)

다행스럽게도, 집 바로 근처 네거리에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다.

미오 : (…혼자 있으면 금방 게을러진다니까….)

동전을 손에 쥐고 미오는 현관을 나섰다.

미오 : …?

자판기 앞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오토바이가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공격적인 느낌을 주는 새빨간 몸체.

미오 : (저 오토바이, 지난번에 집에 가다 본….
?! 저 사람은….)

칼 : 여어.

미오 : (이 여자… 뭐 하는 거야? 이런 밤중에….)
저기….

홈스테이 시절에 썼던 단어들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 주저주저 말을 건넨다.

미오 : 당신… 어째서 이런 데 있지?

칼 : 호오, 영어 할 줄 알아? 그럼 얘기가 빠르지.
잠깐 나랑 어딜 가 줬으면 하는데.

미오 : …? 그러니까….

칼 : (총을 꺼내들며)이 나라에선 낯선 물건이겠지만, 어쨌든 진짜라고.

미오 : (에? 설마… 권총?)
자, 잠깐만….

칼 : 복잡한 설명은 나중에 해 줄게. 어차피 너한테는 남김없이 몽땅 가르쳐 줄 테니까. 고도우네 공주님.

미오 : (…고도우? …공주님? 그게 무슨 소리야…?
'고도우'라면, 2년 전에 돌아가신 삼촌? 그치만 어떻게 이 사람이 그걸…?)

칼 : 어서 타.

미오에게 권총을 겨눈 채, 소녀는 오토바이에 올라타고는 뒷자리를 가리켰다.

미오 : (이 여자… 무서워….
외국인이라 그런가…? 아니야. 홈스테이를 할 때도… 맞아, 국가나 인종은 달라도 또래 친구라면 다들 똑같았어.
하지만… 이 사람은 달라… 우리랑은 완전히 다른 생물같아.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상처입히는… 그런 느낌이 들어. 마치… 그래, 야수같은….
저 권총도 모조품같진 않고….)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칼 : 너네 학교 근처.

역시 그녀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공포로 움츠러든 미오는 거절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오토바이가 출발하자 그보다 더한 공포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오 : (…싫어… 무서워… 제발 내려줘…!)

처음으로 타 본 오토바이의 느낌. 온몸을 감싸는 속도감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밧줄 따위가 없어도, 엄청난 스피드에 대한 공포가 미오를 소녀의 등에 붙들어매고 있었다.


미오 : (…죽을 거야… 떨어지면 죽을 거야….)

핸들을 잡은 소녀는 그녀에게 헬멧조차 씌워 주지 않았다. 코너에서 차체가 기울 때마다 목에서 터져나오는 비명을 간신히 참아넘기는 미오.
견디지 못하고 눈을 꼭 감은 채 운전자의 등에 얼굴을 파묻지만, 강렬한 바람은 그녀의 머리칼을 낚아채서는 사정없이 뒤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
.
.
얼마 동안이나 그런 공포와 싸운 것일까. 오토바이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속도를 늦추고, 이윽고 정지했다.

미오 : (…다 온 건가…?)

살며시 눈을 떠 본다.
밤이라곤 해도, 그곳은 눈에 익은 장소였다.


미오 : …여긴… 학교 가는 길…?

칼 : …칫.

그녀의 어깨 너머로 앞을 살피자,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길 한복판에 누군가가 우뚝 서 있었다.

미오 : (…누구지? 일본인이 아닌가…?
…?! 저 사람도 총 가지고 있어…!)

리지 : (…왔나. 제대로 찍었군….
이 학교… 시노쿠라 학원이랬나? 여기서 기다리면 틀림없이 올 줄 알았지.)

언덕길을 올라온 오토바이는 길 한복판을 막아선 리지의 10m 정도 앞에서 정지했다. 눈부신 라이트의 빛이 꺼지고, 헬멧을 벗은 운전자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에 드러났다.

리지 : (팬텀… 뒤에 매달려 있는 여자애가 시가가 말하던 그애인가….
젠장, 나쁜 예감이 이렇게까지 맞아떨어지다니….)

팬텀은 아무 말 없이 오토바이에서 내려… 미오의 손을 잡고는 수갑을 끄집어내서 오토바이 핸들에 채워 놓았다.

미오 : 앗!

칼 : 잠깐 기다려.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마침 잘 됐군 리지. 당신하고 야쿠자 녀석들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리지 : …칼….

칼 : 게임은 계속한다. 규칙도 츠바이가 말한 대로. 그 두 사람이 죽거나 쓸데없는 녀석들이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면, 저기 있는 후지에다 미오는 내가 죽일 거야.
둘을 해치울 때까지 쟨 내가 데리고 있겠어. 더 이상은 누구도 끼어들지 마. 내 사냥감에 손대지 말라고.

리지 : …도대체… 얼마나 더 바보짓을 하면 속이 시원하겠냐?

칼 : 뻔히 다 알면서 묻지 말라고. 츠바이랑 아인을 죽여버릴 때까지 아니겠어?

리지 : ……민간인만큼은 끌어들이지 말라고, 언젠가 내가 말했을 텐데.
그렇게도 츠바이가 미운 거냐?

칼 : 몇 번이나 말해야 돼? 다 아는 얘기 묻지 말라니깐.

리지 : 배신하는 녀석도, 민간인한테 손대는 녀석도 난 절대 용서 안 해. 넘지 말아야 될 선이 있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

칼 : …….

리지 : 이제 그만 정신차려. 이게 마지막 선이다. 여길 넘어서면 넌 진짜로 갈 데까지 가는 거야.

칼 :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리지, 어째서 나한테 그렇게 친절한 거야?

리지 : …….
널 암살자로 만들기 싫었어. 나도, 츠바이도 그렇게 생각했다.

칼 : 난 인페르노의 팬텀. 불만 있으면 지금 여기서 막아 보시지.

칼은 품 안에 손을 넣더니, 리지가 경계하지 않도록 천천히 회중시계를 끄집어냈다.

칼 : …늘 하던 대로 이녀석을 써서.

왼손에 시계를 얹은 채 손끝으로 뚜껑을 튕겨 열자, 귀에 익은 선율이 밤 공기 속으로 퍼져나간다.

칼 : 곡이 끝나면 나도 뽑는다. 그래도 못 쏜다면… 당신은 진짜로 물러빠진 인간이야. 죽어도 할 수 없어.

리지 : …이녀석이!!
(…자, 잠깐만… 이게 뭐야… 이대로라면… 클로디아랑 헤어질 때와 똑같잖아…!
빌어먹을… 어째서 마지막은 늘 이렇게 되는 거냐….
단순한 으름장이 아니야… 저녀석은 오르골 멜로디에 맞춰서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어. 의리도 인정도 안 통하는 극한상황까지….
단 한 순간도 망설임이 없게 하려고… 상대가 옛 동료일지라도….
…그런 식으로 난 칼을 쏠 수 있을까…? 만약에 칼이 포기하지 않으면… 인페르노에 거역한다면… 이 손으로 칼을 죽일 수 있을까…?)

클로디아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리지 : …칼, 제발 멈춰… 난 널 쏘고 싶지 않다….

칼 : 후훗….

오르골의 선율이 느려진다. 어딘가로 빨려들 듯이 리듬이 흐트러지고, 사라져 간다.
곡이… 멈춘다.


리지 : 카아아알!!!!

미오 : …!!

칼 : …….
왜 쏘질 못하는 거야. 당신은.
.
.
.
사이스 : 이런 새벽에 몸소 찾아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시가 : …더 이상 전화로는 해결이 안 되겠어.
당신이 키운 팬텀은 마지막에 배신하는 게 습관인가?

사이스 : 이것 참, 면목이 없군요.

시가 : …그래서, 상황은? Ms.리지에게서 보고는?

사이스 : 그게 말입니다… 방금 전 중상을 입고 실려온 참이라서.

시가 : 뭐….

사이스 : 아무래도 팬텀과 접촉한 모양입니다.

시가 : 어디서! 자세한 얘기는 들었나?!

사이스 : 이거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시가 : 무슨 일인데!

사이스 : 팬텀이 후지에다 미오양을 납치했답니다….

시가 : …너, 너희들은…!!

사이스 : 이 건에 대해서는 저희 인페르노가 책임지고 사태를 수습하겠습니다. 고도우파를 번거롭게 만들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시가 : 헛소리 마… 전부 네놈이 꾸민 대로 돌아가는 거 아닌가? 귀제페!

사이스 : 그럴 리가요. 이 일에는 인페르노의 위신이 걸려 있습니다. 저는 후지에다 미오양을 보호하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입니다.

시가 : 그 말을 믿으라고!

사이스 : 걱정하시는 바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또다시 요코하마와 같은 대소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거지요?

시가 : …….

사이스 : 이번엔 인페르노가 아니라 제가 사적으로 데리고 있는 요원들을 불렀습니다. 완벽하게 훈련받고 통제되는 궁극의 병사들이지요. 병사의 이상형을 보여주는 자들입니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이러한 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고도우파 여러분들께서 팬텀을 상대하기는 버겁습니다.

시가 : …치잇.
(젠장… 이자식이 말하는 대로다… 그렇다곤 해도 더 이상 인페르노에 의지할 순 없어.
이녀석들과 손을 잡고 나서… 대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나.)
…알고 있겠지만, 무슨 일을 하든 앞뒤 보고는 해 주시오. 이 나라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건 용서 못 해.

사이스 : 알고 있습니다.
.
.
.
미오 : (그 사람, 죽었을까…?)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밤의 냉기와는 다른 오한이 미오의 등을 타고 올라온다.

지금 미오가 있는 곳은 시노쿠라 학원 건물에서 채 2km도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미오 : (소문은 들었지만… 와 보는 건 처음이야.)

옛 여자기숙사 건물. 학교 뒤편의 예배당과 더불어, 여기가 기숙사제 여학교였던 시절의 유물이다.
울타리도 자물쇠도 없는 방이지만, 미오는 완전히 포로신세였다. 아까 손목에 채워져 있던 수갑이, 지금은 오른쪽 발목을 붙들고 있다. 수갑의 다른 쪽은 긴 쇠사슬에 연결되어, 그 끝은 천장의 대들보에 단단히 감겨 있다.
쇠사슬 길이가 곧 미오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였다. 실내에서 움직이기에는 불편이 없었지만, 복도까지 나가기에는 무리이다.


미오 : (으으, 추워… 산 속이라 그런가… 옷을 더 입고 나올 걸 그랬어….
그 사람들, 무슨 얘길 한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협박하려고 날 인질로 삼았나 봐… 도대체 누굴…?)

이미 바깥은 먼동이 트고 있었다.

미오 : (오토바이 소리)(…돌아왔구나….)

거친 발걸음으로 삐걱거리는 나무바닥을 울리며 칼이 들어온다. 양손에 든 편의점 비닐봉지에는 통조림이나 생수병이 꽉 들어차 있었다.

칼 : 일이 끝나려면 사나흘은 있어야 될 거야. 그때까지 안 모자라게 잘 나눠 먹어.

미오 :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해 줘. 아까 뭐든 다 가르쳐 준다고 했지?

칼 : 아아, 그거?

그러면서 칼은, 미오에게서 빼앗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칼 : 이거 주소록 어떻게 불러내지?

미오 : …….

칼 : 뭐, 됐어.
(…훗, 어떤 도구라도 사용자 편의를 생각해서 만든 거라면 사용법도 쉽게 찾을 수 있지. 그걸 찾아내는 게 내 특기고….)
오, 이건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칼은 메모리에 저장된 내용을 액정화면에 불러냈다.

칼 : (흥, 친구가 별로 없구만. 등록된 건수가 이게 다라니.
…어디 보자. 제일 나중에 추가된 번호가….)
이녀석이 가장 최근에 사귄 친구로군. 이 한자 뭐라고 읽어?

미오 : …….

칼 : 아즈마 레이지… 맞지?

미오 : …어떻게…?!
당신은… 당신은 아즈마군의… 뭐야?

칼 : 옛 애인이자 옛 제자.
날 여자로 만들어 준 건 그녀석이야.

미오 : …거짓말.

칼 :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넌 그 남자에 관해서 얼마나 안다고.

미오 : 그, 그건….

칼 : 하나 더 말해 줄까?
(총을 꺼내들고)이거 다루는 법도 녀석한테 배웠어. 사람 죽이는 방법도.

미오 : 사람… 죽이는 방법…?

칼 : 그자식이 미국에서 뭘 했는지 알아? 암살자였어. 그것도 초일류. 혼자서 몇 명이나 죽였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라고.

미오 : 그럴 리가….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뭔가 잘못된 게….

칼 : 하핫….
2년 전에 LA에서 고도우 다이스케란 남자가 죽었어. 네 삼촌이었다며?

미오 : 어떻게 그걸….

칼 : 너보다 자세히 알지.

미오 : ……대체 당신은….

칼 : 네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셋 있어.
하나, 고도우 다이스케는 무역상이 아니라 갱 멤버였어. 너희 나라 말로 야쿠자란 거.

미오 : …야, 야쿠자?

칼 : 둘, 고도우 다이스케는 네 삼촌이 아니야. 너와 피를 나눈 친오빠지. 다시 말해 넌 야쿠자 가문의 딸이란 말씀.

미오 : 거짓말이야…… 말도 안되는 엉터리 거짓말이야….

칼 : 셋, 고도우 다이스케는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암살자에게 당했어. 네가 사랑하는 아즈마 레이지한테.

미오 : 거짓말!!
도대체 어쩔 생각이야?! 그런 터무니없는 말만 늘어놓고.

칼 : 네가 그렇게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 잘난 척 새침떠는 아가씨란 게 짜증나서 말이지. 고상하신 거죽을 확 벗겨버리고 싶어지지 뭐야.

미오 : …….
(그럴 수가….
아냐, 겁먹으면 안돼… 이 여자한테 약한 모습 보였다간….
…그치만….)

칼 : 지금은 믿든 안 믿든 좋을 대로 해. 하지만 얼마 안 지나서 너로 인해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벌어질 거야. 지금의 너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면 아까 들은 얘기를 떠올려 봐. 전부 다 들어맞을 테니까.

미오 : …네 목적이 뭐야?

칼 : 싸우는 거.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아즈마 레이지랑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거야. 어느 쪽이 더 강한지 결판을 내기 위해.

미오 : 그런….

칼 : 왜 그래? 오빠 원수를 갚아 주겠다잖아. 좀 더 기쁜 표정을 지어도 될 텐데.

미오 : (그런… 그런 일 때문에….
부탁이야… 꿈이라면 어서 깨 줘… 제발….)
.
.
.
다음날 아침.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이름이 액정화면에 표시된다.

레이지 : (…미오?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좀 있으면 학교에서 만날 텐데….)
여보세요?

칼 : 미오가 아니라서 미안하군.

레이지 : !!
(…그럴 수가… 어째서 칼이…?
번호는 틀림없이 미오 거야… 그렇다면 칼이 미오 전화를 쓰고 있다…?)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기어올라왔다.

레이지 : …미오를 어떻게 했어?

칼 : 살아있어. 그거면 충분하지?

레이지 : 칼, 너….

칼 : 얠 어쩔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셔. 도망갈 준비도 바쁜데 인질까지 챙겨야 하니 힘들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내가 맡아 뒀으니 감사하라고.

레이지 : 어째서?! 목표는 나 하나잖아! 미오는 아무 관계도….

칼 : 민간인으로 돌아가고 싶었지? 그러니까 바라는 대로 네 생활은 보장해 줄게. 고도우파도 인페르노도 참견 못 하게 할 거야. 얌전히 학교에 다니고만 있으면 넌 안전해.
단… 작별인사도 없이 사라지진 말라고. 어디로 튈 셈인진 몰라도, 내 눈이 안 닿는 곳으로 가는 즉시 미오는 저세상에서 오라버니와 만나게 될 테니까.

레이지 : …….

칼 : 어쨌든, 후지에다 미오양은 당분간 학교에 못 나갈 테니, 선생님들한테는 적당히 얼버무려 두셔.
잊지 마. 난 언제나 널 보고 있다는 걸.
자자, 얼른 학교 가야지. 지각하잖아? 하핫~

레이지 : (…젠장, 재발신은….)

[이 번호는 현재 전파 수신 불가능 지역에 있거나 전원이 꺼져 있으므로….]

레이지 : …틀렸나….

엘렌 : 무슨 일이야?

레이지 : ……아아… 미오가, 칼한테… 납치당했어.

엘렌 : 그럴 수가… 설마, 인페르노에 거역하면서까지?

레이지 : 그런 모양이야… 그렇게까지 할 만큼 날 원망하고 있는 거겠지.
(그럴 거야… 어쩔 도리가 없지. 이렇게 돼도 당연한 짓을 난 칼한테 저질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왜 칼까지…! 그애가 무슨 짓을 했다고!)

끓어오르는 충동에 휩싸여 벽을 주먹으로 후려친다.

레이지 : (…미오를… 지키려던 거였어. 그러기 위해서 계속 거짓말을 했던 거고….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되는 거야…?
…훗, 언제는 안 그랬던가….
내가 끼어들면 전부 이렇게 돼. 칼과 헤어졌을 때도 그랬잖아….
의외고 뭐고 없어… 다 알고 있었으면서. 미오를 이용하기로 결정한 그 순간부터….)
빌어먹을….

주먹에 피가 맺힐 때까지 몇 번이고 복도 벽을 두들긴다.

레이지 : 제기랄….

엘렌 : 이제부턴 따로따로 움직여야겠어.

레이지 : …뭐…? 따로 움직여…?

엘렌 : 내가 숨어서 드라이를 찾아볼게. 넌 드라이 말대로 얌전히 지내고 있어. 그 틈에 난 드라이를 치고 미오를 구해낼 테니까.

레이지 : 바보같은 소리 마!!
이쪽은 이미 감시당하고 있어. 섣불리 자극했다간 미오 신변이….

엘렌 : 레이지, 진정하고 잘 들어. 내가 모습을 감추면 틀림없이 드라이는 화를 내겠지만… 나 하나 때문에 미오한테 손을 대진 않을 거야.

레이지 :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엘렌 : 그애가 노리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제일목표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미오가 계속 필요해.
드라이한테도 미오는 마지막 카드니까, 내가 도발한다고 해서 쉽사리 써먹을 수는 없을 거야.

레이지 : (그건 확실히 그렇지만….
아니야… 역시 엘렌을 보낼 순 없어.)

칼은 내가 맡겠어.

엘렌 : …그래?

레이지 : (역시 엘렌은 이해를 못 하는 건가…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어쨌든 뭔가 핑계를 대야 해.)
그러니까, 그게….
넌 도망칠 준비를 해야 하잖아? 지난 주말에도 난 그저 기다리기만 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너한테만 맡겨놓는 것도….
(그래, 지금 와서 엘렌을 혼자 가게 내버려뒀다가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말도 안돼… 다시 그러긴 싫어. 최악의 전개잖아….
칼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면, 그걸 엘렌에게 떠넘기고 싶진 않아.
…그래, 이제야 알겠어.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야….)

엘렌 : …전에도 물었던 건데… 네가 그애를 쏠 수 있겠어?

레이지 : 아아… 쏠 수 있어.

엘렌 : …….

레이지 : (엘렌은 내 대답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지난번 예배당에서 칼을 만난 다음에도 똑같은 질문을 했지. 그땐 결국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더 이상은 도망칠 수 없어. 쏴야 해… 지금은 미오의 생명까지 걸려있잖아. 미오를 구해내고 일본을 탈출하기 위해선….)
…쏠 수 있어….

엘렌에게,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다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민하면서 결론을 내는 수밖에.

레이지 : (칼과 총구를 마주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
.
.
사나에 : 레이지구~운?

레이지 : …갑자기 왜 그래?

사나에 : 가끔은 같이 점심이라도 해 주시지 않겠어? 넌 미오한테 매인 몸이니까 우리랑 밥먹을 기회가 좀처럼 없단 말씀이지.

히로노 : 오늘은 점심시간이 허전한 걸. 미오랑 엘렌 둘 다 결석이고.

레이지 : 엘렌이? 아침에 나랑 같이 학교 왔는데?

히로노 : 조퇴했어.

사나에 : 아침부터 몸이 안 좋다던데. 너 몰랐어?

레이지 : …….

히로노 : 그러니까, 모처럼 시간도 되겠다, 이것저것 얘기해 줘.

사나에 : 미오랑은 어디까지 갔냐?

몇 번이고 엘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응답은 없었다.

레이지 : (어디 있는 거야 엘렌… 지하실? 아니면 전원이 끊어졌나?)

그러는 동안 벨이 울리고 5교시가 시작되었다.

레이지 : (할 수 없지. 수업이 끝나면 다시 걸어 보자….)

(5교시 종료 후)
[여기는 자동응답전화 서비스 센터입니다. 메시지 1건을 받았습니다….

메시지를 들었을 때 당신은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칼과 싸워선 안돼요. 미오를 말려들게 한 것은 저의 책임. 그녀는 제 목숨과 바꿔서라도 구해내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먼저 도망치세요.
탈출계획을 전달하겠습니다. 러시아인과의 접촉은 3일 후, 오타루시 사창가에 있는 '청풍정'이란 여관에서 대기하세요. 밤 11시에 '보리스'라는 사람이 맞으러 올 겁니다. 이후로는 그 사람의 지시에 따르도록. 저도 미오를 구출한 다음 청풍정으로 가겠어요.
혹시… 지정된 시간까지 제가 여관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죽은 것으로 판단하시기를.
그렇다고 해서 후회하거나, 자신을 탓하진 마세요.
'엘렌'이라고 불리운 그날 이후, 저의 생명은 오직 당신을 지키기 위해 존재했습니다. 당신이 살아남아 준다면, 그것이 제가 이 세상에 살아있었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럼, 3일 후에.

오후 2시 15분에 녹음되었습니다….]
.
.
.
여자기숙사의 폐허에 다시 밤이 찾아왔다.
새벽무렵에 나간 칼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미오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밤의 정적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미오 : (…벌써 하루가 지났네….
마피아, 암살자, 야쿠자… 그래서였을까? 엄마가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는 해 주지 않은 건… 그리고 삼촌이 사고를 당한 것도….
믿어지지 않아… 하지만 그 여자, 내 눈앞에서 사람을 죽였어. 역시 정말인가 봐… 진짜 암살자야….)

그리고 칼은 말했다. 아즈마 레이지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암살자라고.
레이지 역시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그런 무서운 인간인 것일까?


미오 : (…으응,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아즈마군의 눈… 하늘, 나무… 주변 풍경이나 학교의 모두를 보고 있을 때 그 눈… 다정하고, 안타깝고, 너무나도 쓸쓸하고… 마치 먼 추억을…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슬퍼하는 것처럼….)

레이지가 살아온 일상은 미오와는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슬퍼하고 있었다. 미오가 살던 세계와의 너무나도 먼 거리를, 그는 마음아파하고 있었다.

미오 : (아즈마군….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그토록 부드러우면서도 쓸쓸한 눈빛을 하고 있던 거였어…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난 아즈마군을 좋아해. 내 생각이 틀림없는 거겠지? 아즈마군….)
.
.
.
칼 : 여기서 계속 기다렸어.

레이지 : (칼….)

칼 : 반드시 돌아온다고 레이지가 약속했으니까… 난 계속 기다렸어.

레이지 : (…그런….
그만해… 왜 지금 와서 이런 걸 보여주는 거야?)

엘렌 : 하지만 난 그애를 내버려두지 않겠어. 내 생명은 오직 널 지키기 위한 거야.

레이지 : (…그러지 마 엘렌…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나쁜 건… 잘못한 건….)

으아아아아악!!!!
하아, 하아, 하아….
꿈인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뛰쳐일어선 다음에도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이마를 흠뻑 적신 식은땀을 닦아낸다.

레이지 : (…아니, 꿈이 아니야. 지금도 엘렌은 어딘가에서 칼을 쫓고 있어….
더 이상은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아. 아무도 상처입히고 싶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전부 끝내버릴 수 있지…?)
.
.
.
주말에 대한 기대로 떠들썩해야 할 토요일 오후. 그러나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웠다. 이틀 후 월요일부터는 드디어 학년말 시험이 시작된다.

레이지 : (결국 그 후로는 한잠도 못 잤어… 평소대로 학교엔 왔지만… 내가 정말 깨어있긴 한 건가? 계속해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칼, 엘렌, 그리고 미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누구냐?!

사나에 : 으와악!!

등 뒤에서 가방으로 후려치려던 사나에가 그 자세 그대로 화들짝 놀란다.

사나에 : 노, 놀래키지 마!

레이지 : …미, 미안… 아하, 아하하하….

순간적으로 움켜쥔 권총 손잡이에서 굳어버린 손가락이 풀어지지 않았다.

레이지 : (제길… 어떻게 된 거야… 나도 꽤나 지쳤나 보군….)

사나에 : 잠깐, 너 괜찮아? 엘렌한테 감기라도 옮은 거 아냐?

레이지 : 아니, 별로 그런 건… 뭐랄까… 모레부터 시험이라고 생각하니 좀….

사나에 : 어라? 설마 유급 위기라든가?

레이지 : …아아… 뭐, 최악의 경우엔 그럴 수도.

사나에 : 어머머~ 아즈마 레이지군이랑은 올해로 바이바인가? 허전해지겠네~

레이지 : (그렇군… 쓸쓸해지겠구나… 이렇게 사나에한테 놀림받는 것도 마지막일지 몰라.)

사나에 : 어이, 그 음침한 얼굴 좀 펴 봐.
아아~ 겨우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할까 했더니만, 또 생각났잖아.

레이지 : 너도 위험해?

사나에 : 너만큼은 아니어도….
미오랑 엘렌은 괜찮을까? 이런 때 사이좋게 몸져눕다니.

레이지 : …….

사나에 : 정말이지, 학생이란 건 손해만 본다니까.
봐 봐, 저 푸른 하늘! 이 햇빛! 강변에 누워서 낮잠을 즐기라고 햇님이 명령하잖아. 이런 기분좋은 주말을 이렇게 꿀꿀한 기분으로 보내야 한다니, 틀림없이 뭔가 잘못됐어!
앞으로 하루인가….

레이지 : (그래, 하루 남았어. 예정대로 일본을 떠나려면… 늦어도 월요일 아침까진 도쿄를 떠나야 해. 엘렌도 그럴 생각이라면 내일까지 전부 결판을 내려고 할 거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칼을 쫓아서….
엘렌한테 맡겨둘 수는 없어. 전부 내 잘못인 걸. 칼 인생을 망쳐버린 것도, 증오의 씨를 뿌린 것도… 그 책임을 엘렌에게 떠맡길 순 없어.
칼과는 내가 대결해야 돼. 어떤 잔혹한 결말을 맞더라도… 엘렌과 칼이 싸우는 것보단 훨씬 나아. 그 둘이 서로 싸울 이유는 없어… 누가 이기든 아무도 구원받지 못해.
두 사람을 막아야 해!

우선은 엘렌을 찾자. 칼은 무리일지 몰라도, 엘렌의 움직임이라면 어떻게든 예측할 수 있어. 그녀는 자기 손을 더럽힐 생각이겠지만… 설득해야 돼. 이건 엘렌의 싸움이 아니야.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이는 편이 낫겠군. 총도 가지고 있으니 집에 돌아갈 필요는 없어.)

사나에 : 같이 나갈래?

레이지 : 응? 아, 저기….
그… 나 도서관에서 노트 복사할 거니까 먼저 돌아가.

사나에 : 어라? 지금 와서 시험준비?

레이지 : …미오 주려고. 돌아가는 길에 미오네 들를 거야. 문병하러.

사나에 : 어머머… 하아~ 과연~
훌륭하다 아즈마! 역시 내가 눈여겨본 남자로다!

레이지 : (미안, 사나에….)
너, 설마 같이 가자거나 그런 말은 안 하겠지?

사나에 : 아니아니, 당치도 않사옵니다요~ 주말밤은 둘만의 것, 얼렁 다녀오셔! 단,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환자니까 지나치게 과격한 행위는 삼가도록.

레이지 : 너 말이야….

사나에 : 뭐, 뒷일은 너희 둘 하기 나름이겠지. 이래저래 고생했지만 내 일도 이젠 끝~ 내일하고 모레는 걱정없이 공부할 수 있겠어.

레이지 : 아, 저기, 사나에…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

사나에 : 무슨 말을, 별 거 아니지. 그럼 간다.

레이지 : (…정말 고마워 사나에. 네 덕분에 난 오늘까지 꿈을 꿀 수 있었어. 그리운 날들의 꿈을….
넌 모르겠지만… 다음 주가 되면 다시 만날 거라 생각하겠지만… 다신 만날 수 없을 거야… 널 잊지 않을게.)
.
.
.
감금당한 지 사흘째 밤.
경험해 본 적 없던 감금생활에 미오는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었다.


미오 : (…추워… 게다가 배고파… 그리고… 그리고… 샤워도 하고 싶어. 온몸이 땀투성이에 머릿결도 뻣뻣하고… 속옷이라도 갈아입고 싶은데….)

칼 : 너도 꽤 참을성이 있군?

약간 떨어진 곳에서는, 칼이 창틀에 앉아서 총을 손질하고 있다.

칼 : 좀 더 울고불고 하든지 난폭하게 굴 줄 알았는데.

미오 : …난 동물이 아니야.

칼 : 그렇지는 않더라도 '여자'겠지? 넌 그 남자한테 완전히 속아넘어가서 지금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거야. 더 억울하다고 생각해도 괜찮을 텐데.

미오 : …넌 그런 거야?

칼 : ??

미오 : 아즈마군 애인이었다고, 지난번에 그랬지?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은 그 사람을 미워하는 거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칼 : 그렇다면 어쩔 건데?

미오 : …제멋대로야.
물론 나도 이런 일 당하는 건 싫어. 그치만… 다행이야. 이렇게 되어서야 겨우 이해했어. 사흘 동안 내내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제서야 알게 됐으니까.
네 말대로 아즈마군은 너와 같은 종류일지도 몰라. 너처럼 다른 누군가를 상처입히며 살아왔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 사람은 그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어.
(그런 삶을 스스로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망만 치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렇게밖에 못 할 만큼 연약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만….)
그 사람은 모든 걸 받아들이고 정직하게 살 수도 있었어. 오히려 그러는 게 편했을 거야. 누군가를 상처입히고 희생시켜도 어쩔 수 없다고, 그게 운명이라면서… 그렇게 정색하면서 태연히 지낼 수 있는… 그런 냉정한 삶도 살 수 있었겠지.
그래도, 그에 비하면 무턱대고 운명에 거역하는 게 훨씬 나아. 모순투성이고, 거짓말에 거짓말을 더하며 살아가더라도… 계속 도망치며 끝까지 거부하고 살아가는 편이 나아.
(그게… 아즈마군의 다정한 마음이니까.
그래서… 용서받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발버둥치면서도 운명을 거부하고 있으니까… 난 탓할 수 없어…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없어….)
그런 사람이라서, 지금도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어. '좋아한다'고.

칼 : …….

미오 : 너랑 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몰라. 하지만, 생각해 본 적 있어? 아즈마군이 거짓말을 한 마디도 안 하고 널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지. 그 사람 곁에 있으면서 즐겁거나 행복한 일도 없었어?

칼 : …….

미오 : 없진 않겠지? 아니면 그렇게까지 미워할 이유가 없어. 하지만 그 사람이 오직 진실만을 너한테 보여줬다면… 너한텐 뭐가 남지? 넌 아즈마군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어?

칼 : …….

미오 : 넌 너무 멋대로야! 자기 혼자만 심한 꼴을 당했다고 생각해서 그 사람 탓만 하고… 어리광부리는 아이같아.

칼 : …그래서 넌, 그녀석을 이해했다는 거군? 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 수 있다는 거지?

미오 : 그래. 모를 리가 없어. 그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칼 : 훗… 하핫, 아하하하하!
넌 거짓말하고 있어. 레이지도 너도 전부 거짓말쟁이야. 이 나라 녀석들은 전부 다 그런가?

미오 : …!!

돌아선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미오는 얼어붙었다.

칼 : 너, 추위에 떨어 본 적 있어? 사흘 밤 사흘 낮을 아무것도 입에 안 대고 지내 본 적이 있어? 이런 얼간이같은 나라에서 뭐 하나 부족함 없이 사는 네가 뭘 안다고!

미오 : …….

칼은 그녀의 옷깃을 잡고 끌어당겼다.

칼 : …타인의 아픔 따위 알 리가 없어. 그러니까 맛보는 수밖에 없지!

미오 : 꺄악!!

칼 : 하하, 방금 전 그 위세는 어디로 갔지? 난 말이야, 외출복이라곤 한 벌밖에 없었어.(미오의 옷을 찢는다.)

미오 : 싫어… 그만… 안돼애애!!!!

칼 : 흥, 대체 뭘 먹고 자라면 이렇게 살결이 매끈매끈해지실까? 공주마마.

미오 : 아악!

떨고 있는 미오의 뺨을 사정없이 올려붙이는 칼.

칼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응?! 자기는 절대로 안전하다고, 누구한테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혼자서 모두한테 보물처럼 대접받고, 그게 당연하다고… 까불지 맛!!
용서 못 해… 절대로 용서 못 해! 죽여버리겠어… 널 엉망으로 만들 거야!

노골적인 폭력 앞에 미오는 움츠러들었다. 칼의 비웃음을 의연하게 맞받아치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칼 : 네년이… 너같은 게…!

미오 : 안돼… 싫어….

몇 번이고 얻어맞으며 겁에 질려 떠는 소녀의 모습. 칼의 마음속에서 시커먼 파괴충동이 부풀어오른다.

칼 : 이… ?!

(어째서… 나, 대체… 뭘 한 거야…?)

이미 대항할 힘도, 소리내어 울 기력도 잃은 채, 미오는 몸을 움츠리고 힘없이 흐느껴 울고 있었다.

칼 : (뭐야… 왜 내가… 정말로 이런 짓을 하고 싶었던 거야…? 난… 난… 도대체….)

같은 시각.
조직폭력단 고도우파(梧桐組) 두목 고도우 카이텐(梧桐海天)의 저택에 손님이 찾아왔다.


카이텐 : 시가인가…?

시가 : 밤 늦게 죄송합니다.

카이텐 : 아무래도 안 좋은 소식인 모양이군.

시가 : 후지에다 미오양의 건입니다. 제가 부족한 탓으로 아가씨를 어려움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카이텐 : …….

시가 : 지금 이 시간에도 사태는 일각을 다투고 있습니다. 제가 손가락을 잘라 책임을 지는 것이 도리임은 압니다만, 우선은 그 전에 미오양을 구출하는 것이 먼저.
그래서, 오늘은 부탁을 드리고자 찾아뵌 것입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조직을 총동원하여 처리하려….

카이텐 : 원인은… 그 미국인들인가?

시가 : 옛.

카이텐 : 미오는 아직 무사한가?

시가 : 예, 틀림없이.

카이텐 : 그렇다면… 손을 써도 소용없다. 조직을 움직이지 마라. 일은 그 외국인들에게 맡겨 두도록.

시가 : 그러나….

카이텐 : 조직이 움직이면 사태가 일본 전역에 알려진다. 대체 무슨 이유로 계집애 하나 때문에 고도우파 전체가 기를 쓰고 나서는지… 모두가 알고 싶어하겠지.

시가 : …….

카이텐 : 네 손가락도 소용없다. 책임질 필요는 없어.

시가 : 하지만 그래서는….

카이텐 : 고도우와 후지에다 집안 사이에 인연이란 없다. 있어선 안되는 거다. 지금도, 예전에도….
알겠나? 미오가 무사히 있는 동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마라. 돈이나 협박이 목적이 아닌 이상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시가 : …….

카이텐 : 시가, 너의 배려는 고맙지만…. 조직이란 결국 아무 소용없는 얼간이들이다. 특히나 무언가를 지키는 일이라면… 총이든 칼이든 부수고 죽이는 데나 쓸모가 있지, 지키는 도구는 될 수 없어.

시가 : …알겠습니다. 명심해 두겠습니다.
.
.
.
같은 밤, 다른 장소에서….
사이스 마스터는 자신이 불러들인 사병(私兵)들을 앞에 두고 조촐한 열병식을 행하고 있었다.


사이스 : (후후훗… 드디어 너희들을 내보일 때가 되었다. 지난 2년 동안 내가 거둔 성과, 나의 사랑스러운 딸들. '챌렌 슈베스턴'.)

예전 아인을 통해 확립한 훈련과정을 보다 효율적으로 행한 소녀들. 말하자면 '양산형'이다. 현재 인원은 피어, 퓐프, 젝스, 지벤, 아흐트, 노인의 6명. 가면 뒤에 가리워진 맨얼굴은 가녀린 10대 소녀이지만, 그 전투력은 정예 특수부대에 필적하는 것이라고 사이스는 자부하고 있다.

사이스 : (공포도 자비도 없이, 오직 충실한 사냥개처럼 죽음을 불러들이는 자동인형… 이것이 바로 나의 이상!)

시가의 뜻도, 고도우파와 인페르노의 관계도, 사실 사이스는 안중에도 없었다. 언젠가 드라이에게 쫓긴 아인과 츠바이가 궁지에 몰린 쥐처럼 이빨을 드러내면, 사이스가 창조한 작품들이 벌이는 꿈의 경연이 실현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들 챌렌 슈베스턴도 참가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이스 : (습작인 아인, 그리고 실험작인 츠바이와 드라이가, 내 이상이 구현된 예술품들에 맞서서 어떠한 싸움을 보여줄까… 후후후훗…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뛰는군.)

소도구는 여느 때와 같이 러시아 마피아를 통해 준비한 AK74 돌격소총. 미하엘 칼라시니코프가 만들어낸 명품이다.

사이스 : (이런 극동의 섬나라가 무대라는 게 아쉽지만… 뭐 괜찮겠지. 덕분에 쓸데없는 방해도 없을 테고. 나 혼자 전세낸 거나 다름없군.
남은 건 막을 알리는 벨을 기다리는 것뿐….)
.
.
.
같은 무렵, 조용한 밤.
유리가 빠진 창가에 걸터앉아, 칼은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상에 사는 인간들의 행위 따위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오늘밤도 달은 청초하고 밝게 빛나고 있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이국의 풍토. 화창한 낮과는 전혀 다르게 냉랭한 밤공기가 자켓 위에서 피부를 파고든다.
길고 애처로운 흐느낌 끝에 미오는 힘이 다한 듯 잠들었다. 드러난 그녀의 맨살 위에 두 사람 몫의 모포를 덮어주고, 칼은 잠들지 않는 밤의 침묵에 잠겨 있었다.
울부짖으며 그만 멈추라고 애원하는 미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남아있다.


칼 : (그냥 살짝 겁을 줘서 나불대는 입을 막으려고, 단지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난 그렇게….)

답은 알고 있다.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기분좋았다. 그것이 이유였다. 겁에 질린 미오의 얼굴이, 그때까지의 새침하던 얼굴이 망가져가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쾌감이었다.


칼 : (저애가 레이지를 생각하는 마음, 레이지에 관해 이야기할 때의 얼굴… 그에 비해 난… 내가 하고 있는 건….)

미오에게 질투를 느꼈다. 그 순수함이 미웠다. 엉망으로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칼 자신도 알고 있다.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언제나 패배자이다.
예를 들면, 이미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그랬다. 인생에서 패배하고 술로 도피하여, 아이들에게 고통을 줄 때만 우쭐하며 좋아하고….


칼 : (…언제부터 이렇게 돼 버렸지…?)

마치 자신 안에 억제할 수 없는 짐승이 들어앉아, 그 의지대로 휘둘리고 있는 듯한.
칼이 증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증오가 칼을 몰아세우고 있다. 레이지를 미워하는 마음은 어느샌가 멋대로 따로 나아가기 시작해, 결국은 칼 자신을 점령해 버렸다.
누군가를 미워서해서가 아니다. 그저 증오하고, 상처입히고, 파괴한다… 지금은 그 기쁨만이 칼을 움직이고 있다.
이미 상대는 누구라도 좋다. 레이지나 아인, 사이스나 리지라도 상관없다.


갈 데까지 가는 거야….

칼 : 어째서야… 제길!!
(리지… 왜 당신, 그때 날 멈춰 주지 않은 거야? 당신 총에 죽었으면 그걸로 끝낼 수 있었잖아….)

평소처럼 혼자서, 고독하게,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 안에 있는 짐승을 두려워하며. 망가져가는 자신, 어두운 감정에 삼켜져가는 자신이 두려워서.
소리죽여 흐느끼는 소녀를, 미오는 가늘게 눈을 뜬 채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미오 : (저렇게도 서럽게 울고 있어….
하지만… 모르겠어. 무엇 때문에 슬퍼서 그러는지.)

타인의 아픔 따위 절대 알 리가 없다고… 그렇게 잘라 말하던 칼이 결국 옳았던 것일까.

미오 : (다가갈 수도… 위로할 말도 찾을 수 없어. 아무리 애를 써 봤자 결국 난 외부인이니까….
그럼… 그렇다면… 아즈마군도… 혹시 아즈마군이 저애랑 마찬가지라면… 저렇게 운 적이 있다면… 역시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걸까? 아무런 힘도 되어 주지 못하는 거야?)
.
.
.
한참을 울고 난 후, 칼은 주머니에서 미오의 휴대전화를 끄집어냈다.

칼 : (…이젠 다 끝내버리자. 전부 다.
이 한자가 레이지 성(姓)이면… 아인은 레이지 동생이라고 했으니까….)

휴대전화의 진동에 엘렌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엘렌 : (왔다… 역시 미오 번호… 미오 전화야.)
여보세요?

칼 : 아인?

엘렌 : 드라이구나.
(예상한 대로… 레이지보다 먼저 날 표적으로 삼을 셈이군.)

칼 : 어딘가 방해받지 않을 곳을 말해 봐.
…결판을 내자.

미오는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수상쩍은 대화를 듣고 있었다.

칼 : 그래. 레이지는 빼고 우리끼리.

미오 : (내 전화로 무슨 얘길 하는 거지…?
아즈마군이 아냐… 등록된 번호로 통화한 것 같은데… 그럼 내가 아는 사람일 텐데….)

칼 : OK. 거기라면 좋겠군. 오후 5시지?
시노쿠라 학원 위에 있는 폐허 알아? 아아, 그래. 미오는 거기 있어. 뭔가 입을 옷가지를 준비해 줘.
(전화를 끊고)아… 일어나 있었어? 그… 뭐라고 할까… 아깐 미안했어.

미오 : …?

칼 : 난 말이지, 너한테 미움받을 가치도 없는 그런 여자야. 네가 아니더라도 날 미워하고 가만 두지 않으려는 녀석들은 잔뜩 널려있거든.
아마 오래 살지도 못할 거고, 그때가 오면 틀림없이 지옥으로 떨어질 거야… 그러니까 네가 일부러 미워할 것도 없어. 잊어버리는 게 좋아.

미오 : ……저어, 나….

칼 : 잘 있어.

그 말만을 남기고,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
.
.
이른 아침,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무렵부터 레이지가 예배당에 들어온 후로 몇 시간이 지났다.

레이지 : (엘렌… 넌 언제나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니? 너한테는 특별한 장소에서….
칼과 싸우기 전에 엘렌은 이곳에 올 거야. 마음을 정리하려고… 그렇고말고. 반드시 온다… 그렇게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아무런 단서도 없으니까….)

어젯밤 내내 뛰어다녔지만, 결국 엘렌의 행방은 파악하지 못했다.
휴대폰 메시지대로 그녀가 모레까지 출국할 생각이라면, 오늘 안에는 미오를 구출하려고 할 것이다.

.
.
.
방 안을 비추는 햇빛을 받고 미오는 잠에서 깨어났다.

미오 : (…어느 새 잠들었지…? 칼은 없는 건가?)

누가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포를 끌어다가 몸을 덮는다.

미오 : (돌아오지 않았어… 혹시 날 내버려둔 채 그대로 가 버렸는지도… 그치만….
어젯밤 나가기 전에 '결판을 낸다'고 했어. 누구랑? 무슨 결판을 내려고? 설마…?!)

레이지와 서로 싸우는 거지. 누가 더 강한지 결정하려고.

미오 : (그런… 어떡해야 돼? 어쩌면 좋아…?)

엘렌 : 미오.

미오 : 엘렌?! (어느 틈에?)

엘렌 : …아니야.

미오 : ??

엘렌 : 난 네가 알고 있는 엘렌이 아냐.

미오 : 에? 무슨 말을 하는… !!
(그러고 보니 달라… 언제나 학교에서 보던 엘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같아.)

엘렌 : 더 이상 널 속일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같은 엘렌이라도 여기 있는 난 네가 모르는 나.

미오 : …….

엘렌 : 미안하지만 옷을 가져다 주라고 해서 멋대로 너희 집에 들어갔다 나왔어.

미오 : (내 교복….)
대체 누가…?

엘렌 : 드라이.

미오 : 그 여자… 칼 말이야?

엘렌 : …그애, 그런 이름도 있었구나.
수갑이 채워져 있군.(웃옷에서 총을 꺼낸다.)

미오 : (엘렌도 총을….)

미오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엘렌은 몸을 숙여 그녀의 발에 채워진 수갑을 근접거리에서 조준한다.

엘렌 : 움직이지 마.(총을 쏘아 수갑을 부순다.)

미오 : ?! 너희들은 대체….

엘렌 : 드라이한테 들었지?

미오 : !!

속고 있는 거야.

미오 : (그런 말 믿고 싶지 않았는데… 엘렌이 이런 일을 하다니….
엘렌… 그렇게 불러도 돼? 내가 알고 있는 그애가 아니야… 역시 엘렌도 마찬가지일까? 아즈마군이나 칼처럼….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엘렌이라면 뭔가 해 줄지도 몰라.)
저기… 칼이 어젯밤에 나갔어. 결판을 낸다면서… 아마도 아즈마군을 죽이려나 봐.

엘렌 : 알고 있어.

미오 : (…설마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게?
그러고 보니, 옷을 가져다 주라고 했다면… 어제 칼이 전화하던 사람이… 엘렌? 그럼 결판을 낸다는 상대는….)
…칼하고 싸울 거야?

엘렌 : 그래.

미오 : (어째서…? 믿을 수 없어. 믿고 싶지 않아….)

하지만 미오는 이해했다. 그녀의 상상을 넘어선 곳에서 착착 진행되고 있는 무언가가, 그녀와 레이지 사이의 거리를 점점 벌려놓고 있다.

미오 : 내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엘렌 : 없어.

미오 : …나, 아즈마군을 좋아해. 그러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래도 안되는 거야? …함께 있으면 안돼?

엘렌 : 아마 네 마음은 진심일 거야. 그리고 레이지를 돕기 위해 열심일 거고.
하지만 그걸로 드라이를 쓰러뜨릴 수 있어?

미오 : 그런….

엘렌 : 내가 드라이를 죽이지 않으면 그앤 레이지를 죽일 거야. 네가 내 일을 대신할 수 있어?

미오 : 그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미오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만이 끝없이 넘쳐흐른다.

미오 : 다시 그 사람을 만날 수는….

엘렌 : 없어….
어떻게든 레이지를 돕고 싶다면 조금만 더 여기에 있어 줘. 널 찾은 다음엔 고도우파와 그 배후세력이 레이지를 치기 위해 움직일 테니까.
밤까진 전부 끝나겠지. 그때까지 네가 여기 있어 주면 레이지에게 닥칠 위험도 조금은 줄어들 거야.

그리고 엘렌도 미오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젯밤의 칼처럼.

미오 : 하다못해… 이것만이라도 가르쳐 줘. 넌… 아즈마군은… 누구야?

엘렌 : ……두 가지만 가르쳐 줄게.
널 끌어들인 건 레이지가 아닌 나. 그러니까 네가 드라이한테 이런 일을 당한 건 전부 내 잘못이야.

미오 : !!

엘렌 : 그리고, 레이지는 연기로 울거나 웃거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혹시 네가 그 사람이 울거나 웃는 걸 봤다면, 그건 틀림없이 진짜야.

미오 : 엘렌… 넌….

그 이상 미오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은 채, 엘렌은 방을 나갔다.
아무도 없는 폐건물에 미오는 홀로 남겨졌다.

.
.
.
오후의 정적이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레이지 : (정말 조용하군… 바깥세계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시험 전날 일요일이니까 동아리 하러 나온 녀석들도 없고.
이 조용한 세계를, 정적을… 엘렌은 언제나 사랑했지.
엘렌….)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어느샌가 레이지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문득 눈을 뜨자, 언제 들어왔는지 엘렌이 제단 앞에 서서 십자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신도석에 숨어있던 레이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엘렌은 평소처럼 무릎을 꿇고 엄숙하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말을 걸려고 했지만 어쩐지 망설여졌다. 기도하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에서는 범접하기 어려운 엄숙함이 느껴졌다.


레이지 : (엘렌, 기도하는 네 모습은… 마치 종교화라도 보는 것 같아.)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맑게 씻겨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윽고 엘렌은 몸을 일으켜 예배당 구석구석을 눈에 새기듯이 둘러보고는… 그제서야 레이지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엘렌 : 레이지…?!

레이지 : …미안.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엘렌 : 왜… 어떻게 여기에?

레이지 : 여기서 기다리면 틀림없이 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면 왜 아직 안 도망쳤냐고?

엘렌 : …….

레이지 : 미오는?

엘렌 : 무사히 풀려났어.

레이지 : 그럼 어째서 돌아오지 않았어?

엘렌 : …남은 일이 있으니까.

레이지 : 칼?

엘렌 : …….

레이지 : 그녀석을 죽일 거야?

엘렌 : 그앤 널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인페르노 이상으로 위험해. 살려두면 앞으로도 수단을 안 가리고 널 위험하게 만들겠지.
그러니까… 나도 그냥 두지 않겠어.

레이지 : 날 따돌리고?

엘렌 : …….

레이지 : 이런 식으로 하는 건 너무 박정하군.
왜 행방을 감추기 전에 나랑 얘기 안 했어?

엘렌 : ……이야기했다면, 넌 이해했을까?

레이지 : …아니.
정말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엘렌 : 그래.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넌 칼을 쏠 수 없어.

레이지 : …쏠 거야. 이번엔 망설이지 않아… 쏴야만 해. 전부 다 내 탓이니까….

옅은 어둠 속에 조용히 솟아 있는 십자가를 올려다본다.
속죄의 증거, 후회의 교훈.


레이지 : 저 남자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었다지?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걸 후회하면서…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참회하고 있어.
…그런 거 난 싫어. 자기가 지은 죄를 다른 사람이 대신 지다니, 그 다음에 밀려들 후회를 견딜 수 없을 거야.
난 칼 인생을 망쳐버리고 마지막까지 몰아넣었어… 그러니까 내가 쏠 거야. 그녀석의 분노도 슬픔도… 내가 모두 짊어지겠어.

엘렌 : …….

레이지 : 아마도 그애가 죽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슬퍼하는 건 나겠지. 난 칼을 동정하고, 녀석을 위해 울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내가 쏠 거야. 이 손으로 청산하고 싶어… 내 과거니까.

엘렌 : …….

레이지 : 너야말로 먼저 도망쳐. 나한테 신경쓰지 말고.

엘렌 : 싫어.

레이지 : 엘렌…?

엘렌 : 싫어. 절대로 안 보낼 거야!

레이지 : 어째서….

엘렌 : …틀림없이 네가 질 테니까.
레이지는 너무 다정해서 그앨 쏘지 못해…!

레이지 : ……아니야….

엘렌 : …….
그럼 약속할 수 있어? 반드시 이기겠다고, 그렇게 맹세할 수 있어?

레이지 : …….
(엘렌… 알고 있으면서… 싸움에 '절대'란 없어. 어떤 싸움이라도 종이 한 장 차이로 생사가 갈리는데.)

엘렌 : 너한테만 그런 일 시키고 싶지 않아… 너한테 맡기고 기다리는 건 싫어!

레이지 : 엘렌….

엘렌 : 나도 남을래. 둘이서 싸우면 이길 수 있어!

레이지 : 안돼… 이 이상 칼에겐….
이해해 줘 엘렌… 이건 내 일이야. 내가 아니면 안돼.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타락할 데까지 타락하는 거야.

엘렌 : …그러면 안돼?
너도, 나도, 타락하면 안되는 거야? 그렇게 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난 차라리….

몸을 떨며 마음속 말을 토해내는 엘렌을, 끝까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레이지는 품에 꼭 끌어안았다.

레이지 : …말하지 마… 더 이상은 말하지 마….

엘렌 : 어떻게 해야 돼…?
나, 모르겠어… 이렇게 무서운데, 이렇게 싫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이렇게… 너랑 함께 있고 싶은데….

레이지 : (…우리들, 그렇게도 많은 걸 바라는 건가? 아무도 상처입히지 않고, 아무에게도 위협받지 않고… 그저 서로의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한데… 그걸 원하고 있을 뿐인데….
그런데… 어째서 안되는 거지? 운명은 우리들한테서 전부 빼앗아가기만 해. 아무것도 주지 않아… 그런 게 세상인가…?
손을 뻗으면 전부 멀어져가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는 건가? 살아서 내일을 맞이해도… 우리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걸까?)

엘렌 : …어쩌면 좋아?

거듭해서 되묻는 엘렌의 어깨를 끌어안고, 비로소 결심이 섰다.

레이지 : 엘렌….
결혼하자.

엘렌 : …?!
지금… 뭐라고 했어…?

레이지 : 여기서 맹세하자. 단 둘이서….
운명이 우릴 갈라놓더라도, 우리 영혼은 영원히 함께하는 거야.
입회인도 축복해 주는 사람도 없어. 둘만의 결혼식이지만, 신께서는 지켜봐 주시겠지?
엘렌, 널 좋아해. 계속 곁에 있어 줘.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엘렌 : 레이지….

레이지 : 기도해 줘. 우리들을 위해서.

엘렌 : …그대는 이 사람을 아내로 맞아,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레이지 : 맹세합니다.

엘렌 : …저도 맹세합니다.

젖어있던 엘렌의 눈동자에서 끝내 눈물이 넘쳐흘렀다.

엘렌 : 난… 레이지의 여자야.
날 '엘렌'이라고 불러 주는 너만의….

레이지 : 엘렌…!

가녀린 몸을 끌어안고 그 떨림을 느꼈을 때 비로소 실감했다. 두 사람의 영혼이 하나로 이어졌음을.

엘렌 : (레이지… 나의 레이지….)

전에 없이, 가슴이 아프도록 엘렌이 사랑스러웠다.

레이지 : 사랑해, 엘렌….
.
.
.
두 사람 사이에 시간이 멈추고… 어느샌가 스테인드 글라스의 화사한 그림이 바닥에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바깥의 햇살은 많이 기울어졌다.


엘렌 : …레이지.
칼하고는 이미 약속해 뒀어. 오늘 5시에 이 예배당에서 보기로.

레이지 : 그런가… 앞으로 1시간 남았네.

엘렌 : 어떻게 해도… 혼자서 할 거지? 무슨 일이 있어도….

레이지 : 약속할게. 반드시 이기겠어.

엘렌 : …….

레이지 : 이기고… 살아서 네게로 돌아올 거야. 약속해.

엘렌 : 그래… 그럼 나도… 널 믿을게.
.
.
.
오후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갔다.

미오 : (정말 괜찮을까…? 엘렌은 여기 있으라고 했는데… 그치만….)

그 사람은 만날 수 없어.

미오 : (정말 그걸로 좋은 거야…?)
??(누군가 오고 있어….)

시가 :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미오 : 당신은….
(어딘가에서 봤는데… 그래, 2년 전에 다이스케 삼촌 유품을 가져다 준 사람… 삼촌 부하라고 했어.)
시가, 씨?

시가 : 오랫동안 연락도 드리지 못했군요. 출장중이신 어머님으로부터 미오양이 유괴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미오 : …에?
(어째서 엄마가…?)

시가 : 돌아가신 고도우씨 이외에 의지할 만한 친척이 없다고 해서, 부족하나마 제가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경찰에 알리는 것은 보류하고 비밀리에 몸값을 지불했지요.

미오 : 모, 몸값?

시가 : 범인은 약속대로 이렇게 미오양을 풀어주었으니, 제 판단이 옳았던 모양입니다.

미오 : …?!(몸값이라니, 무슨 얘기야? 범인이라면… 칼 말인가?
그럼, 그 사람이 말하던 건… 그리고 엘렌은…?)
저기… 잘은 모르겠지만….

시가 : 무리도 아닙니다. 사흘 동안이나 감금당해 있었으니 피곤하신 것도 당연합니다. 전부 잊어버리고 푹 쉬십시오.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미오 : (그래… 이 사람이라면 삼촌에 대해 알고 있을 거야.)
저, 시가씨….

시가 : 뭔가요?

미오 : 제 오빠… 삼촌에 관해서인데요… 사실은 폭력배였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시가 : 폭력배? 어디 사는 누굽니까? 그런 무례한 말을 하는 자가.

미오 : …….

시가 : 고도우 다이스케씨는 저희 회사의 유능한 사원이었습니다. LA에서의 불행한 사고도 컨테이너 적재현장에 입회했을 때 크레인이 쓰러지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잊어버리십시오.

미오 : …아, 네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면서, 시가는 미오가 감금되어 있던 방을, 드라이의 은신처였던 방을 둘러본다.

시가 : (역시 쉽게 믿기는 어려운가… 뭐 됐어. 얼마 지나면 이해해 주겠지.
암살자다 폭력단이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 비하면 '몸값을 노린 유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알기 쉬운 것을.
그렇게 생각하는 게 행복할 테니….)
자, 가시지요.

미오 : …네에….

미오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서며, 시가는 마지막으로 방 구석에 처박혀 있던 천조각에 눈길을 주었다.

시가 : (저 누더기같은 건… 미오양의 옷인가!
팬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한 녀석도 남김없이…!)
.
.
.
스테인드 글라스로 비춰드는 무지개빛 햇살을 보고 있으려니 지나간 날들의 추억이 떠올랐다.

레이지 : (얄궂은 일이다. 칼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땐 그렇게도 슬퍼해 놓고… 살아있던 칼과 다시 만나서는 그애를 죽이려 하고 있어.)

왜 두 사람의 인생은 이렇게까지 엉망이 되어버린 걸까.

레이지 : (그날, 어째서 곧바로 칼의 생사를 확인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어. 경솔하게 넘겨짚고, 예상과는 빗나가 버린 변명들… 그런 잘못의 연속이었어. 우리들 관계는….
이런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칼에게는 다른 인생이 있었을 텐데.
그래서… 그러니까… 내가 그녀석을….)

엘렌은 오지 않아.

칼 : 어째서 네가…?

레이지 : 내가 할 일이니까.

칼 : 그 계집애를 지키는 게?

레이지 : 아니. 널 죽이는 게.

칼 : …하아?

레이지 :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몇 명이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이용하고, 그리고 죽였어. 오직 나 혼자 살아남기 위해.
너도 그 중에 하나다, 칼.

칼 : 뻔뻔하게 잘도….

레이지 : 그래, 용서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
칼, 네가 옳다. 그 분노는 정의… 넌 정당한 권리가 있어. 분노를 담아 날 쏠 권리가….
그 총으로 날 심판해라. 어느 누구한테도 맡기지 말고 자신에게 걸어. 네가 나보다 강하다면 난 내 죄의 대가를 받겠지.

칼 : …멋지군.
그래서, 어떻게 할까?

레이지 : 뭐든지 좋아. 네가 하고 싶은 방법으로 해라.

칼 : 흥, 여유부리긴.

칼은 들고 온 아우그 라이플을 내버리고, 품에서 놋쇠빛으로 빛나는 물건을 꺼냈다.

레이지 : (그건… 아직도 갖고 있었던가….)

칼 : 권총으로 승부. 곡이 끝나면 뽑는 거야. 알겠지?

칼은 제단 한가운데에 회중시계를 놓아두고, 손끝으로 뚜껑을 튕겨 열었다.

레이지 : (이 멜로디… 기억난다. 그때 칼이 기뻐하던 모습도….)

칼 : 그러고 보니… 이 곡을 들려주고 아직 죽이지 않은 건 너 하나뿐이군, 레이지.

뒷걸음질로 제단에서 물러서는 칼. 가볍게 펼친 오른손은 언제라도 권총집에 닿을 수 있는 위치에 두었다. 레이지 역시 뒤로 물러나면서, 교복 앞단추를 풀고는 칼에게 보이도록 벨트 앞쪽에 총을 꽂는다.
성가대석 옆에서 발을 멈추었다. 칼도 신부실 앞에서 멈춰선다.


레이지 : (거리는 약 10m… 서로 빗나갈 일은 없겠군. 뽑는 스피드만으로 승부가 난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지난날의 찬송가처럼, 선율은 옅은 어둠에 잠긴 세계를 가늘고 부드럽게 채워나갔다.
승리한 자는 살아남고, 패배한 자는 죽는다. 그것을 가르는 것은 단 한순간.


레이지 : (그래… 그게 법칙이야. 이 비정한 세계의….
반드시 이긴다고 맹세했지만… 그런 말은 아무 의미도 없어. 기도해도, 맹세해도, 그런다고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야.
…미안해, 엘렌….)

모든 것이 뇌리에서 사라져간다. 엘렌의 목소리도, 그 모습도, 가녀리고 따스한 그녀의 감촉도.
살아서 돌아가겠노라고, 그리고 사랑을 맹세했던 말들도.


레이지 : (지금은 오직 칼에게… 칼의 오른손에….)

신비스러운 우주의 고동처럼 선율이 흘러간다… 그 리듬이 천천히 둔해지기 시작한다.

레이지 : (얼마 안 남았다….)

텅 비어버린 마음으로, 우주가 정지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사라져가는 선율의 마지막 음을, 생과 사의 경계선을.
칼의 오른손이 권총집으로 파고든다. 동시에 총 손잡이가 손 안으로.
다음 순간, 둘은 총을 뽑았다.

울려퍼진 총성은 단 한 발. 몇 만분의 1초만큼 빨랐던 한 발뿐이었다.


레이지 : (돌아가야 해… 엘렌한테로 돌아가야 해….
돌아간다고 약속했어… 다시는 남겨두고 가지 않겠다고….
늘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바닥에 쓰러진 레이지의 주검을, 소녀는 공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죽이는 지금 이 순간을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그려왔던가. 그 순간을 채우는 느낌이 어떤 것인가, 오로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는 지금까지 달려왔다.


칼 : …….
(무언가 느낄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왜지? 아무것도 없어.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아….)

단 한 발의 총탄으로, 증오도 슬픔도 끝나버렸다. 그런 감정에 몸을 태우고 있던 소녀… '칼 디벤스'라는 존재 또한 지금은 없다.
오직 하나 남은 것은 최강의 칭호. 그녀는 단 한 명의 '팬텀', 단지 그뿐인 존재였다.
무엇을 쟁취한 것도 아니다. 얻은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 이것은 쓸모없는 것들을 내버리기 위한 의식이었다.


칼 : …흥.

SW의 총구를 옆으로 돌리고 그녀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설교대 위에 놓여있던 회중시계가 산산이 부서져 소멸한다.
지금까지 그녀를 이끌었던 집념의 증거, 하지만 그것도 앞으로는 필요없다. 지금부터 그녀가 쏘는 총탄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오직 절대적인 죽음을 선사하기 위한 작열에 불과할 것이기에.
'팬텀', 최강의 칭호로, 공포의 대명사로서 지상에 존재한다. 그러기 위해 그녀에게는 그 외의 쓸모없는 것들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칼'이었던 시절의 추억도, '드라이'였던 때의 증오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칼 : 막은 내렸어, 엿보고 있는 손님.

사이스 : 넌… 이제 완벽하구나.

예배당으로 발을 들여놓은 사이스 마스터의 목소리에는 외경심마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자동소총을 손에 든 가면의 무리가 서 있다.

사이스 : 용케… 용케도 여기까지 완성되었군. 지금의 너에겐 흠잡을 곳이 없다.

칼 : 당신은 그걸로 만족하나?

사이스 : 물론이고말고. 지금까지의 문제들은 사소한 것이다. 현재의 내 권한으로 어떻게든 마무리할 수 있지. 너는 내 비호를 받으며 안심하고 인페르노에 복귀할 수 있다.

칼 : 내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사이스의 등 뒤에 대기하고 있던 가면의 소녀들이 기계처럼 호흡을 맞추어 자동소총을 겨눈다.

사이스 : 네가 위협이 된다면 물론 제거해야겠지… 그러나 아무 득도 되지 않는 충돌이다. 츠바이를 제거한 지금에 와서 굳이 인페르노와 적대할 이유가 있나?

칼 : 물론 이유 따윈 없지.
그러니까 말이야… 앞으로 내가 누구를 죽이는데 이유같은 게 필요할까?

사이스 : 이녀석….

자신의 계산이 틀렸다는 것을 뒤늦게 사이스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소녀는 선풍(旋風)이 되어 있었다.
교차하는 총성의 제창. 몸을 날린 소녀의 그림자를 뒤쫓는 5.56mm 러시안탄은 허공을 가르고, 두 자루 SW오토매틱이 토해낸 9mm탄의 소나기는 한 치도 빗나감 없이 피보라를 흩뿌린다.

이유 따위는 없다. 스쳐지나간 모든 것들은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 그것이 그녀의 존재, 단지 그것뿐.
'팬텀', 그것이 지금의 그녀를 가리키는 유일무이한 칭호였다.

.
.
.
그날 예배당에서 맨 처음 울려퍼진 총성… 아즈마 레이지를 쓰러뜨리고, 상실과 각성을 불러온 한 발의 총탄 이후로 싸우고, 또 싸워서….
얼마만큼의 살육을 거듭해 온 것일까. 막아서는 자, 뒤쫓는 자, 모두가 그녀의 제물이었다.
정처없는 방랑, 끝없는 사투….
'팬텀', 그 이름을 향해 모여드는 증오와 공포만이 쌓이고 쌓여 전설을 엮어나간다. 그런 식으로 얼마만큼 시체의 산을 쌓아올렸는지… 이젠 생각나지도 않는다.
사실, 그녀는 종점에 다다르기까지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을 맞이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지내온 것일까.

밀려드는 파도에 몸을 담근 채, 그녀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달을 올려다보기는 오랫동안 없었던 일이다.
기억하고 있는 한은… 그렇다. 그 운명의 날 전날 밤, 이 해변에서 아득히 떨어진 동양의 섬나라에서, 그녀는 달을 보며 운 적이 있었다. 이미 오래 전 이야기이다.
밀려오는 차가운 파도는 그녀의 체온을 빼앗고, 진홍빛으로 물든 채 해변에서 빠져나간다. 손쓸 방법이 없는 치명상임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기척도 없이 등 뒤에서 총을 맞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를 기습하는 것은 어설픈 솜씨로는 불가능하다.


팬텀 : ……정말, 대단한 실력이군…….

모래를 밟는 희미한 발소리를 향해 팬텀은 시선을 돌린다. 저승사자는 틀림없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리라고 예상했던 대로… 그것은 검은 눈동자를 한 여성이었다.

팬텀 : …그 후로 몇 년이나 지났지…?

엘렌 : 2년.

팬텀 : 그래… 벌써 그렇게 되는구나….

엘렌 : 길었지.
오늘 밤 이렇게 널 죽인다… 그것만을 생각하면서 난 오늘까지 살아왔어.

팬텀 : 그거 부러운 얘기군…… 안 그래? 오늘까지의 너한테는 흔들림없이 자신을 지탱해 줄 게 있었어.

엘렌 : …….

팬텀 :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야.

차가운 검은 눈동자를 향해, 팬텀은 힘없는 냉소로 답한다.

팬텀 : 증오할 상대마저 없어진 다음엔, 그 다음엔….
후훗, 됐어. 이제부터 너도 듬뿍 맛보게 될 테니까…….
남은 생을 열심히 즐겨 봐….

불길한 미소와 함께 그렇게 내뱉은 다음, 팬텀은 침묵했다.

홀로 해변에 남겨진 엘렌은, 마침내 쓰러뜨린 표적이 남기고 간 말을 되새겨 본다.
오늘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증오가 그녀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집념'이라는, 예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감정의 힘을 빌어, 엘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치열한 나날을 헤쳐나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싸워야 할 이유가 사라진 지금, 앞으로 자신에게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그렇다, 아무것도 없다.
지금의 그녀는 시체보다도 공허했다. 예전, 이름없는 암살자였던 시절에도 이 정도의 허무감에 시달렸던 적은 없었다.

밝게 빛나는 달을 올려다보며 엘렌은 소리없이 눈물흘렸다.


엘렌 : (…도와줘… 레이지….
나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