浄火の紋章 ⓒ 2003 EERGED

대본 작성, 번역 : CARPEDIEM(mine1215@lycos.co.kr)

게재 : C'z the day(http://mine1215.cafe24.com/)

들어가기 전에
-본 작품은 영화 『이퀄리브리엄(Equilibrium)』을 기반으로 한 동인 그래픽 노벨입니다. 영화의 스토리나 기본적인 세계관, '건 카타' 등의 전문용어에 관해서는 아래 링크나 다른 인터넷 사이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대본에 대한 권한은 작성자에게 있으며, 무단전재 및 링크는 금지합니다.

건 카타 관련 동영상

제작진 후기




제3차 세계대전이 불러온 파멸적인 결말은, 살아남은 한 줌의 인류에게 진정한 의미로 폭력의 무익함을 일깨워 주었다.
인간의 시조가 아직 원숭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생존과 번영을 위해 투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기억…… 그것이 유전자에 본능으로 각인된 인류에게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너무나도 뜨겁고 지나치게 위험했다.

그러나 최후의 교훈을 얻은 인간들은, 마침내 궁극적인 형태로 몸 안에 남아있던 야수의 혈통을 끊어버렸다.
약물을 이용한 감정억제. 사상통제에 의한 완전관리사회.
초토 위에 건설된 그 도시야말로 인류의 새로운 미래. 진정한 호모 사피엔스의 보루.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죄인들이 회한과 방랑 끝에 도착한 약속의 땅. 그것이 도시국가 '리브리아'이다.

『모든 비극은 끔찍한 것, 모든 쾌락은 죄이니라』

『그러므로 인간의 아이들이여, 격정에 눈물흘리지 마라. 희열에 미소짓지 말지어다』

『오직 이성만으로 자신을 다스릴 때, 그대들은 완전한 자유를 얻으리라』

길거리 전광판에서, 비행선에 달린 홀로그래프에서, 오늘도 위대하신 지도자 '신부(Father)'께서는 리브리아 시민들에게 말씀하신다.

『모든 사람들이 협조함으로써 온갖 고난을 물리치리라 ―― 그 이상의 '미'란 있을 수 없도다』

『그 이외의 색과 소리와 냄새와 감촉이 그대의 영혼을 매혹한다면 그 '아름다움'은 거짓. 먼 옛날부터 유구한 인간의 존엄을 짓밟아 온 악마의 유혹일지라』

『불에 태우라. 거짓된 매혹의 과실은 마땅히 불에 태워지리라』


불에 태우라 ――
단호한 의지를 품고, 죄업에 물든 역사를 불에 태우라 ――


정화의 문장
浄火の紋章



네이더…… 과거 대전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폐쇄지구.
리브리아의 위광조차 온전히 다다르지 않는 이 토지는 아직도 수많은 감정위반자들이 숨어지내는 반사회활동의 온상이 되어 있다.
당국의 추적을 벗어나 현재는 고도로 조직화된 그들은, 구인류의 추잡한 정신활동의 산물인 서적, 회화, 음악과 같은 선정적 유해물을 아직까지도 은밀히 수집·보관하고 있다.
개중에도 특히 과격한 분자들은 네이더의 폐허 아래서 전쟁 이전의 유물인 총화기를 긁어모아, 거의 군대나 다름없는 무장을 갖추고 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인류가 남긴 어둠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위협적이다.

이들 무장세력을 진압하려면 아무리 장비와 숙련도에서 앞서는 치안부대라 해도 크나큰 소모와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인원을 인원으로, 물량을 물량으로 압도하는 소모전은 과거 인류의 투쟁과 무엇 하나 다를 것이 없다.
리브리아의 이상을 구현하는 진압은 보다 완벽하게, 효율적으로, 피할 수 있는 일체의 낭비를 회피한 절대적인 위력으로 수행되어야만 한다.

때문에 우리가 ―― 그라마톤 클레릭이 존재한다.

예전에 창고들이 늘어선 거리였던 네이더 한 구석, 아직 무너지지 않고 남아있는 건물 폐허에 나와 티렐리가 도착한 것은 출동 요청을 받고 20여분이 지난 다음이었다.
차에서 내려선 우리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이미 전개해 있던 치안부대원들로부터 일제히 쏟아지는 경의와 두려움의 시선.
우리가 착용한 칠흑의 성직복은 단호한 통치의 표상이며, 그 원칙을 모르는 자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클레릭이 되고 나서 얼마 동안은 다소 쑥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으나, 지금은 아무런 느낌도 없다.


주눅이 들었는지 공연히 어정거리고 있는 대원들을 헤치고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헬멧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옷깃에 붙은 계급장은 그가 대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다시 말해 테트라그라마톤에 클레릭 출동을 요청한 것도 그이다.

-현재 상황은?

예전에 내가 신입이었을 때의 선임자이고, 지금은 파트너이기도 한 바솔로뮤 티렐리 수사관이 치안부대 대장에게 질문한다. 타고난 낮고 부드러운 음성에는 직무에 임할 때의 엄숙한 위엄이 더해져 있다.

-아직도 최소 30명이 넘는 레지스탕스가 창고에서 농성중입니다. 극히 고도화된 무장을 갖추고 있으며, 현재 아군 소모율은 20%를 넘었습니다. 더 이상 피해를 낼 수는…….

대장의 목소리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스스로의 무능함을 보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런 큰 손실을 입기 전에 빠른 단계에서 상황을 보다 정확히 판단하고 클레릭의 출동을 요청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상층부가 할 일이지, 우리 일은 아니다. 나는 개인적인 의견을 접어두고 티렐리의 뒤를 이어 대장에게 물었다.

-돌입경로는 확보했나?

-예. 지향성 폭탄을 창고 뒷벽에 설치했습니다. 기폭과 동시에 적 중추로 돌입할 수 있습니다.

-좋아.

대원들이 우리를 창고 뒤편으로 안내했다.
선도에 나서는 돌격대원들이 장갑복과 돌격소총으로 중무장을 하고 있는 반면, 나와 티렐리는 모두 양손이 빈 채이다.
그러나 성직복 양쪽 소매에 장치된 사출식 권총집에는 클레릭의 표준장비인 두 자루 전술격투권총이 수납되어 있다.
단지 이 정도 무장으로도, 우리들 클레릭이 몸에 익힌 '확률통계학적인 탄도예측에 근거한 격투사격술' ―― 통칭 '건 카타'를 행사하면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돌격대원들의 총병력을 상회하는 전투력이 된다.


다양한 총격전에서 발생하는 탄도 패턴을 수학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옛날부터 연구의 대상이 되었던 동양무술의 '틀(카타)'에 짜맞추어 완성된 건 카타는 근대병사의 잠재능력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전투술이다.
그 효력은 이론치만으로도 공격효과 120%, 방어면에서는 63% 향상이 보증되어 있으며, 특히 폐쇄공간에서 벌어지는 난전에서는 최대로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들 그라마톤 클레릭이 존경 혹은 공포의 대상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달리 비할 바 없는 이 전투기술에 정통했기 때문이다.

낡아빠지긴 했어도 아직 튼튼하게 남아있는 벽돌담에는, 소시지 모양으로 생긴 덩어리를 여러 개 연결한 지향성 폭약 튜브가 분필로 표시된 어느 한 점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설치되어 있다. 기폭 후의 개구부는 직경 2미터 이내. 필요충분한 크기이다.
이 벽을 사이에 둔 반대편에는 치안부대의 강습을 물리치고 더불어 큰 피해까지 입힌 레지스탕스 한 무리가 숨어 있다.
30명이라는 대장의 보고에 신빙성은 없었다. 부대 소모율을 보고 추측하기로는 명백히 그 이상의 적성세력이 예상된다.
돌입경로가 그들의 예상을 빗나간다고는 하나, 기습의 효과는 단지 한순간 ―― 그러나 그 또한 필요충분한 시간이다.

-그럼 가 볼까.

티렐리가 재촉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권총집 플랩을 열었다.
두 사람의 양쪽 소매에서 용수철 장치로 튀어나온 두 자루 권총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각자의 손으로 들어온다.
나뿐만이 아니라 티렐리까지 총을 뽑는 것을 보고, 주변에 있던 대원들은 적지않게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일반적으로 소탕작전을 실행하는 클레릭은 2인조 중에서 한 사람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감독과 보고를 목적으로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이렇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두 자루의 클레릭 전용 총에는 각각 9㎜ 정화탄 16+1발이 장전되고, 여기에 더해 권총집에 부속된 긴급 재장전 시스템에는 예비탄창이 하나씩 준비되어 있다. 그러므로 클레릭 한 사람은 순간적으로 66연사의 화력을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는 연속 66대상에 대한 무력화 진압, 또는 33대상에 대한 말살 제거를 의미하며, 여기까지는 지극히 단순한 합산 결과이다.
그러나 2명 이상의 클레릭이 연계행동을 하는 경우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무리 훈련받은 건 카타 사용자라 해도 개개인의 인식이 경합을 벌임에 따라, 예를 들면 단일 대상에 필요 치사량 이상으로 탄환을 집중시켜 낭비하거나, 서로의 운동영역이 간섭하여 탄도 안전권 확보가 어려워지는 등의 폐단이 다수 발생한다.
이는 건 카타가 개인 전투기술의 극한으로서 완성된 무술인 이상 피할 수 없는 한계이며, 그로 인해 대부분의 클레릭은 단독행동시에 최대로 효율을 발휘한다.

우리 두 사람이 동시에 돌입하려는 태세를 기이한 시선으로 바라본 것은, 그들이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로서 건 카타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리도 아니다. 나와 티렐리의 '듀오'는 다른 동료 클레릭 중에서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특수한 전술이다.
테트라그라마톤은 이번 임무를 특히 위험도가 높다고 판단하여 나와 티렐리 팀을 특별히 파견했다.
화력 효율에서 손실을 보지 않고 2명의 동시행동을 가능케 하는 우리의 팀워크는, 그만큼 상층부에게 평가와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리브리아 시민헌장 제3조 제4항에 규정된 그라마톤 클레릭의 특별권한을 발동. 이제부터 제1급 감정위반자 집단처형을 집행한다.

직무규정에 따라 엄숙한 말투로 선언하는 티렐리.
우리는 살짝 눈을 감아 동공에 들어오는 빛의 양을 줄이면서 쌍권총의 공이치기를 잡아당긴다.

-상황 개시!

티렐리의 외침을 신호로 지향성 폭약을 기폭시키는 돌격대원.
먼로 효과(역주1)에 의해 외과수술급의 정밀도로 집중된 파괴력이 깔끔하게 벽돌담을 도려낸다.
산산조각난 파편으로 변해 창고 안쪽으로 무너져내리는 개구부.
날아오른 티끌들이 커튼이 되어 시야를 차단한다.
하지만 나와 티렐리는 두려움 없이 한 줄기 바람처럼 창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어슴푸레한 건물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크게 떠서 미리 어둠에 대비시켜 놓았던 동공을 해방한다.
즉시 내부 상황이 시야에 자세히 들어왔다.

클레릭의 실내 소탕 절차는 '서(序)'-'파(破)'-'급(急)'의 3단계로 이루어진다.
먼저 최초로 필요한 것은 적성존재를 인식/파악하고, 그 상태에 따라 위협도를 등급으로 나누는 것이다.
시야에 48명. 기척으로 그늘에 숨은 5명을 추가로 감지.
그 중에서 자동화기 소지자 29명. 무거운 돌격소총은 반응이 둔하므로 위협도가 1등급 내려간다. 따라서 제1차 소탕대상은 단기관총을 든 12명. 여기에 각각의 자세 이완상태와 안전장치 해제 여부까지 관찰하면…… 최종적으로 7명의 위협도를 최우선으로 한다.
여기까지 사고판단에 걸리는 시간은 0.06초 이내. 이를 초과하는 클레릭은 그 시점에서 바로 파문을 당하게 될 것이다.

최대 위협대상은 인식과 동시에 즉시 제거하면서, 이와 병행하여 제2급 이하의 위협대상을 무장, 위치, 자세 등 제반 정보를 통해 분석·파악한다. 여기까지의 일련과정이 소탕에서 '서'로 분류되는 단계이며, 또한 '듀오'의 진면목이 발휘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거듭된 사고훈련과 연계패턴 연구를 통해, 나와 티렐리는 '서' 단계의 상황인식패턴을 완전히 합일시킬 수 있다.
언제나 서로가 인식을 공유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각자가 분담할 몫을 사전에 약속하여 정해 두기만 하면 된다. 나보다 사격정밀도가 높은 티렐리가 최우선표적 제거를 담당하고, 나는 제2차 대상에 대한 선제공격, 그리고 매복을 통한 반격에 대비한 예방적 제압사격을 맡는다.


곧바로 이쪽으로 총구를 돌리는 7명의 존재를 나는 일부러 무시했다. 물론 오른쪽에 있는 티렐리의 대처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머지 단기관총 5정은 내 담당이다.
우선 2시와 9시 방향의 3명을 '봉상(鳳翔)의 형'으로 동시에 사살. 이어서 정면 12시 방향에 있는 둘을 '교교(蛟咬)의 형'으로 사살하고, 계속해서 복병이 예상되는 그늘 두 곳에 '앵화난무(乱れ桜)'의 탄막사격으로 12발을 흩뿌린다.

듀오 실행시에는 지금의 '서' 단계에서 적성세력을 완전히 제압하는 경우도 많지만, 공교롭게도 이번 현장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미처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했던 남자들이 총을 고쳐 잡고 돌격소총의 총구를 이쪽으로 겨눈다.
제1단계에서 표적이 되지 않았던 잔존위협이 뒤늦게 반응을 보이며 우리에게 이빨을 드러낼 순서이다.
때문에 제2단계인 '파'는 적성존재의 반격을 무효화 ―― 회피운동 단계로 설정된다.

티렐리가 오른쪽 무릎을 세웠다. 이로써 우리 두 사람의 동작이 정해진다.
나는 주저없이 땅을 박차고는 티렐리의 무릎을 발판삼아 공중으로 훌쩍 도약했다. 그 즉시 티렐리는 다리를 벌리며 허리를 숙이고, 거의 땅을 기다시피 아슬아슬한 높이까지 자세를 낮춘다.
적의 무장은 이미 '서' 단계에서 전부 파악했다. 돌격소총 17정은 모두 칼라시니코프 74년형. 초당 연사수는 알고 있으며, 반동 모멘트와 사수의 체격을 통해 도출되는 총구편차 역시 명확. 다시 말해…….


돌격소총의 총성이 울려퍼진다. 대인전투에서는 필살의 파괴력을 갖는 죽음의 선풍.
그러나 살의를 담아 내뿜어진 100발 남짓한 탄환은 단 한 발도 우리를 포착하지 못했다.
딱하게도, 무지한 반란분자들은 확률통계학에 근거한 사격술 따위는 알지 못한다. 그렇게 제멋대로인 총구 앞에서 우리들 클레릭의 몸은 투명인간이나 마찬가지.
탄도의 산개패턴은 건 카타 이론에 따른 추산결과와 완전히 일치하여, 이미 위험도 0.05% 미만인 안전권으로 몸을 날린 우리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한다.

각자 하늘과 땅에서 곡예를 부리는 듯한 자세 그대로, 나와 티렐리는 끊임없이 9㎜탄에 의한 처형을 수행한다.
상공에서 위치적 우위를 점하는 내 쪽이 처리해야 할 표적 수가 많다.
공중에서 빙글 몸을 돌리며, 나는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긴다.


총구에서 뿜어지는 머즐플래시는 십자모양. 바로 위대한 리브리아의 문장이다.
어리석은 반란분자들은 그 단말마의 망막에 섭리와 통제의 상징을 새김으로써 지상 최후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클레릭의 총탄은 바로 그 가혹함으로 리브리아의 위엄과 단호한 의지를 상징한다.

보라, 이 섬광이 바로 단죄의 신성한 불(浄火).
들으라, 이 총성이 바로 신부의 말씀.
가엾은 몽매한 자여. 그대들은 우리의 숙정을 통해 사면받으리라.

나와 티렐리의 총탄은 실내에 흩어져 있던 적성세력 가운데 정면 중앙의 그룹에 집중되어 있었다. 총원 50명을 넘는 집단인 만큼 '서'-'파'에서 완전 제거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확실했으니까.

따라서 제3단계 ―― '급', 교란 및 최종소탕 단계.

거의 천정까지 도약했던 나는 철골로 된 대들보를 차서 도약 벡터를 수정하고, 땅에 엎드려 있던 티렐리는 공처럼 몸을 굴려 각자 새로운 공격위치로 이동한다.
내가 착지한 지점과 티렐리가 몸을 일으킨 장소는 각각 '파'에서 둘로 나누어진 좌우 그룹의 한가운데.
다시 우리를 조준하려고 총구를 돌린 레지스탕스들은, 자신들의 사선 안에 아군이 있는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건 카타의 진수에서 탄도는 1차원, 착탄점은 0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총탄이 향하는 지점은 불특정다수이고, 탄도는 공간으로서 위험영역을 갖는다.
따라서 그들은 표적 근처에 아군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격을 망설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치명적인 빈틈으로 이어진다.

예상대로 그들이 잠시 움직임을 멈춘 일순간 동안, 우리는 비어버린 권총 탄창을 배출하고 소매 밑에 숨겨진 권총집에서 사출된 예비탄창을 재장전. 이로써 죄인들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다.
이미 위치관계를 전부 파악한 표적을 굳이 눈으로 다시 확인할 필요는 없다. 나는 어깨와 겨드랑이로부터 총구를 회전시키며 좌우와 뒤쪽에 있는 잔존대상을 순식간에 제거한다.

한편 티렐리 쪽은 ―― 대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연화(蓮華)의 형'으로 6명을 연속사살하고 나서도 아직 한 명이 남았다.
우연찮게도 마지막 생존자는 권법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근접전에서는 총기를 마음대로 다루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손에 든 카빈 소총을 휘두르며 티렐리에게 덤벼들었다.
물론 건 카타에는 상대와의 거리에 따른 유리·불리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권총에는 프레임 앞부분에 특히 단단하게 개조된 '턱(峰)'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다. 모든 클레릭 전용화기는 정밀한 총기이자, 동시에 튼튼한 격투무기이기도 한 것이다.

티렐리는 양손의 총턱으로 적의 타격을 가볍게 받아넘기고는, 축이 되는 발을 쓸어차서 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상대의 뒤통수에 총구를 겨눈다.
언제나 그렇듯이 깔끔한, 수없이 보아 익숙해진 티렐리의 솜씨. 그것을 지켜보는 내 가슴속에는 그저 삼가 칭찬하는 마음뿐이다. 그래,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나는 있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마지막 총성이 울렸다.
잔향이 정적 속으로 녹아들고, 어슴푸레한 창고 안을 죽음의 침묵이 지배한다.

-소탕 완료. 사살 53, 생존자 0.

전혀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은 엄숙한 목소리로, 옷깃에 달린 수신기에 대고 선언하는 티렐리.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그러한 태도에, 나는 사소한 위화감보다도 우선해야 할 직무를 생각해냈다.
기록으로서 녹음되는 통신에 나 역시 성문을 입력해 놓아야 한다.

-소탕 완료 확인. 담당은 멜빈 베르나도와 바솔로뮤 티렐리. 이후 현장은 감식반에 맡긴다.

양손에 든 권총을 권총집에 넣고, 나는 화약연기가 자욱하게 들어찬 창고 안을 둘러본다.
무익한 죽음. 어리석은 낭비.
거듭되는 어리석음이 세계를 좀먹는 것을 막기 위한 필요 최저한의 처리.
그것이 여기에 누워있는 53구의 시체이다.

레지스탕스가 빼돌려서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물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발견되었다.
회화 7점, 서적 25권, 음악을 기록한 자기 미디어 22개, 조각 2점…… 모두가 '코드 EC10'으로 분류되는 선정적 유해물이다.
구시대에 '예술가'라는 호칭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끌던 사회부적합자들이 그 뒤틀린 정신활동의 흔적을 새겨놓은 정보매체.
이들 매체는 때때로 접촉한 인간의 정신에 통제가 불가능한 충동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는 제작자의 정신이상을 사회에 널리 퍼뜨리게 된다.
그러한 정신병리의 연쇄를 '문화'라고 부르며 숭상하던 인류의 암흑시대는, 그러나 지금은 머나먼 과거의 일이다.
이지적으로 통제된 민중의 감정을 다시 선동할지도 모르는 이들 예술작품은, 말하자면 '병마의 감염원'이라고 해야 할 유해하고도 위험한 오물이다.
오물은 소각해서 처리하는 것이 당연한 결론이다.

감식을 통해 형식적인 확인이 이루어지고 그 내역이 기록된 시점에서, 50점 남짓한 'EC10'은 모두 한 곳에 모아져 화염방사기의 총부리 앞에 놓인다.
용서없는 청정한 작열의 세례를 받고, 산더미처럼 쌓인 유해매체는 그 정보적 가치를 ―― 저주와도 같이 그 안에 남겨진 작자의 정신활동을 잿더미로 되돌린다.
그것은 리브리아가 승리하는 순간. 우리들 클레릭의 신념이 결실을 맺는 축복의 시간이다.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볼 때마다 내 가슴은 우리의 숭고한 이상을 떠올리며 고동친다.

―― 여느 때라면 그렇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는 내 어깨를 티렐리가 가죽장갑으로 가볍게 친다.

-훌륭했어 베르나도. 자네 기술도 드디어 '틀에 딱 맞아'들어가더군.

-감사합니다. 티렐리 사부.

'틀에 맞다(カタに嵌る)' ―― 건 카타를 익히는 자에게는 최고급이라고 할 수 있는 찬사이다.
위대한 선배인 티렐리의 칭찬에 겸손치레를 하는 것은 오히려 실례가 될 터. 나는 그저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내게서 등을 돌린 티렐리는, 철수 준비를 하고 있는 치안부대원을 힐끗 보고는 여유있게 자리를 떠난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머릿속에는 풀리지 않는 의심과 혼란이 내내 뒤엉킨 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똑똑히 보았다.

내 눈이 틀린 게 아니라면…… 마지막 한 사람을 처형할 때, 티렐리 수사관은 '웃고' 있지 않았던가.
.
.
.
중추관청 테트라그라마톤, 성직자 사무소 ――

손목시계 알람이 펜을 쥔 내 손을 멈추었다.
모든 리브리아 시민에게 의무로 규정된 자율적 사회활동, 프로지움 주사를 놓을 시간이다.
누구나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고 가지고 다니는 주사기를, 나 또한 성직복 주머니에서 꺼내서는 카트리지식 앰플을 장전하고 목의 정맥에 가져가 댄다.
익숙해진 약간의 통증과 함께 정맥으로 흘러들어가는 안도의 감촉.


호박색을 띤 감정억제제 프로지움.
이 생화학적 위업에 의해 인류는 감정과 그에 따르는 번뇌에서 해방된다.
이 복음을 쟁취하기 위해, 인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그리고 아직도 다 흐르지 않은 피는 ―― 우리들 클레릭이 짜낸다.
언젠가 프로지움 사용을 거부하는 사회부적합자가 근절되는 날, 인류는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무대로 나아가 진실로 완성된 이성을 얻게 되리라.

내용물이 빈 앰플을 버리고 주사기를 다시 품에 넣은 다음, 나는 계속해서 보고서 작성에 매달린다. 어젯밤 네이더에서 감정위반자 53명을 처형한 강습작전에 대한 보고이다.
임무 수행 경위는 세부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클레릭은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명민한 의식을 유지해야 한다. 오인이란 절대 허용되지 않으므로.

그래, 오인 따위는…….

마지막 한 명을 사살한 티렐리. 그때 그가 지었던 표정이 지금도 선명하게 머릿속에 되살아난다.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성직에 몸을 담은 자가 웃음이라니 ―― 언제, 어떤 장소에서라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자신이 오인을 했다고 인정할 것인가? 클레릭으로서 매일매일 꾸준히 수련한 관찰력을 스스로 의심해야 하는가?

보고서 내용에 결론을 짓기 전에,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것은 나 혼자 가슴속에 간직해 둘 만한 사항이 아니다. 그렇다고 함부로 외부에 발설하기도 망설여진다. 사부인 티렐리의 명예가 걸린 문제니까.

칸막이가 되어 있지 않은 사무소 안을 둘러보니, 찾고 있던 인물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글을 쓰거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면 말을 걸기가 미안했겠지만, 아마도 지금은 수사자료를 파일로 정리하고 있나 보다. 말을 걸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있는 곳까지 가서, 다른 클레릭들의 집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나직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존, 괜찮으시면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존 프레스턴의 영리하고 차분한 시선이 손에 든 파일에서 나를 향해 이동한다.
평범한 잡담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존 프레스턴 수사관. 의지력, 지성, 무술 등 모든 면에서 수많은 클레릭들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건 카타 단위는 '마스터 클래스'. 월별 검거율은 언제나 수석. 그러나 특히 칭찬해야 할 것은 바위처럼 엄격한 그의 직업윤리이다.
예전에 그는, 두 아이를 낳고 오랫동안 함께 지낸 부인이 감정위반자로 적발되어 처형당한 과거가 있다.
이렇게 불행한 사태를 당한 유족은 깊은 충격을 받고 그 시련을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 보통이다. 때로는 충격이 지나친 나머지 유족들마저 리브리아의 이념을 망각하고 연쇄적인 반사회적활동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프레스턴은 달랐다. 그는 남편으로서 감독이 부족했음을 스스로 깨끗이 인정하고, 더욱 더 직무에 열의를 담아 매진함으로써 이를 속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게다가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죽은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 교육에도 여념이 없어서,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의 아들도 클레릭에 뜻을 둔 우등생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진정으로 완성된 리브리아 시민이고, 내가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비밀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믿기 힘드실 수도 있겠지만' ―― 그렇게 운을 떼 놓고, 나는 프레스턴에게 모든 사실을 밝혔다.
다행히 복도에는 사람이 없어서 누군가가 지나가다 흘려들을 걱정은 없었다. 프레스턴은 도중에 의문을 표하며 끼어들지도 않고, 놀라는 표정을 짓는 일도 전혀 없이, 그저 냉정하게 침묵을 지키며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다.

-과연, 자네가 동요하는 것도 당연해. 법을 대행하는 성직자가 프로지움 주사를 맞을 의무를 게을리했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니까.

조용하지만 확고한 자신에 찬 프레스턴의 목소리는 듣고 있는 내 신경을 진정시키고, 그의 명민한 사고력을 이쪽으로 나누어 주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단정을 내리기 전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해 봐야겠지. 우리들 임무라는 건 심신 양면으로 스트레스의 연속이라서.
긴장한 상황에서 안면근육이 경련을 일으킬 수도 있고, 어두운 곳에서라면 그걸 웃는 얼굴로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어.

-그럼 역시 제가 오인…….

안도하려는 내게, 프레스턴이 나무라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을 흘끗 던졌다.

-'티렐리의 표정이 웃는 얼굴과 닮아 보였다'고 하면 그게 타당한 해석이야. 그런데 베르나도, 자넨 '티렐리가 웃었다'고 느낀 거지? 이건 큰 차이라고.

-…….

관념적인 설명이었지만 그가 말하려는 바는 이해할 수 있었다.

-수사를 할 때 직감이란 건 때때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있어. 나도 경험하고 익혔던 바이고. ―― 다시 말하지만, 자네는 온갖 가능성을 고려해 봐야 하네.

소문에 듣기로는, 프레스턴이 경이적인 검거율을 자랑하는 비결은 '위반자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의 말이라면 당연히 그 무게도 달랐다.

-티렐리의 혈액을 검사하면 프로지움 주사를 맞았나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어떻게 하겠나? 자네가 직접 말하는 게 거북하다면 내가 티렐리한테 검사를 요구해 볼까?

프레스턴이 마음을 써 주는 것은 고맙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선배에게 의지해서야 제대로 된 그라마톤 클레릭이라고 할 수 있겠나.

-……아니오, 그 사람은 제 파트너입니다. 제가 책임지고 해명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티렐리 건은 처리도 포함헤서 자네한테 일임하지. 부탁하네, 베르나도.

프레스턴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성직자 사무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의 무게를 새삼 확인하고,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티렐리를 찾아 보자. 틀림없이 테트라그라마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
.
.
아무도 없는 훈련장에서, 티렐리는 홀로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내 용건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의 눈이 없는 이런 상황은 매우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지금의 무거운 기분이 풀렸나고 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연습장 입구에 선 채로, 나는 얼마 동안 말없이 티렐리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클레릭의 종합전투술 중에서도 기본에 들어가는 도검술 연무 ―― 그것도 훈련용 목도가 아닌 식전용 진검을 쓰고 있다.
혼자서 하는 연습이기에 일부러 위험한 무기를 다루며 스스로에게 정신집중을 시키는 거겠지.
칼날 길이가 1미터가 넘는 장검은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날이 서 있다. 한순간이라도 잘못 다루면 자기 손가락이 잘려나갈 수도 있다.

티렐리의 연무는 완벽했다.
언뜻 느릿하게까지 보이는 조용한 동작은 그것이 일체의 군더더기도 없는 정확한 움직임으로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 흐르듯 베기와 찌르기가 이어지는 동안, 부주의하게 움직이던 적들이 차례차례 베여나가는 광경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했다.

-얼굴이 편치 않군, 베르나도.

한 번도 이쪽을 보지 않은 채 연무에 몰두하면서, 하지만 마치 나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그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보고서 작성하느라 시간이 좀 걸려서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나는 그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 것인지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 모욕으로 받아들일까? 내가 감정위반을 의심하며 따지는 것을.
아니면 불신의 표시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이면 옛 제자이며 지금은 파트너인 남자에게 혐의를 받는 거니까.

나는…… 티렐리를 믿지 못하는 건가?
긴 시간 동안 생사를 함께한 동료보다도 클레릭인 자신의 직감이 더 믿음이 간다는 것인가?

-기분 푸는 거 거들어 줄까? 혼자 연습하기도 슬슬 물리던 참인데.

티렐리의 권유는 마치 구원자와도 같았다. 이런 무거운 침묵 속에서는.

-그럼 한 수 부탁드립니다.

나는 탈의실에 들어가 성직복에서 도복으로 갈아입고는 다시 훈련장으로 돌아왔다.
티렐리는 여전히 연무를 계속하고 있다. 손에 든 진검은 뽑아든 그대로. 칼집에 넣으려는 기색도 없다.
이대로 무기를 바꾸지 않은 채 대련을 하자는 건가?
비상식적이긴 하지만 겁먹을 만한 일도 아니다. 나도 티렐리도 몇천 번이나 반복을 거듭하며 몸에 익힌 형(型)이다. 클레릭의 명예를 걸고, 무엇보다도 듀오를 이루는 파트너로서, 우리의 연무는 만에 하나라도 빈틈이 없다고 잘라 말할 수 있다.
나는 선반에서 강철로 된 모형총 두 자루를 집어들었다. 중량도 밸런스도 진짜 격투권총과 동일하다.
건 카타의 기본형인 '쌍총합장(双銃合掌)'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나는 티렐리를 향해 한 발짝 내딛었다.

-그럼.

-간다.

가볍게 원을 그리며 상단으로 닥쳐오는 티렐리의 칼날. 첫 수의 형식에 따라, 나도 좌우의 총턱으로 칼날을 끼우듯이 막아낸다.
대형 도검을 상대할 경우 총으로 방어할 때는 반드시 양손으로. 반격을 서두르지 말 것.


'챙'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쌍권총과 검이 맞부딪힌다.
물론 티렐리의 공격에 살의는 없지만, 그래도 충분히 묵직한 공격이었다. 실수하면 내 목숨은 없다. 하지만 실수하지 않으니까 나는 클레릭인 것이다.
날끝이 총 틈새를 빠져나감과 동시에 내 총구는 티렐리를 추적하고, 사선을 피하려는 듯 티렐리도 상체를 젖힌다.
마음만 먹었다면 나도 진짜 총으로 대련을 할 수 있었다. 자칫 잘못해서 총이 폭발하더라도 티렐리에게 상처 하나 없으리라는 건 확신할 수 있다.

-자네도 진검은 받았겠지? 베르나도.

-예. 건 카타 단위 인증식때.

-실전에서는 써 봤나? 사람을 벤 적은?

-아니오, 식전 경호하느라 찼던 게 답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두 사람은 계속해서 공방을 주고받는다.
총구를 앞에 두고 도검으로 공격할 때는 몸을 숙이고 간격을 좁혀서 하단부터 베어올리는 형이 주체가 된다.
나는 그 공격을 연무의 형에 정해진 순서대로 차근차근 총으로 방어해 나간다.

-그런데 흥미는 없나? 총으로 쏠 때하고는 완전히 감촉이 다르거든.

-그건…… 굳이 경험할 필요까지는.

티렐리의 질문은 그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촉발되었는지, 문득 내 머릿속에 뜬금없는 생각이 스쳐갔다.
만일 티렐리가 감정위반자라고 하고, 내가 그를 처단해야만 한다면 ―― 그런 구도가 지금 이 자리에서 명백해졌다고 하자.
탄환이 나가지 않는 총을 가진 나와, 사람을 벨 수 있는 검을 가진 티렐리가 동시에 그 사실을 이해했다고 하면…….

―― 챙.
옆으로 휘두른 티렐리의 검을, 나는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받아넘겼다. 당연히 받아넘길 수 있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티렐리가 전혀 봐주지 않고 온 힘으로 공격했다면, 과연 그것은 '당연히' 받아넘길 수 있는 일격일까.

-자네도 알다시피, 클레릭에게 수여되는 예장용 도검은 공업제품이 아닐세. 이미 사라져 버린 전문 기술자들이 손으로 만든 거지. 지금에 와서는 극히 귀중한 물건이야.

-……네.

-그 제작과정에서 필요한 기교 때문에, 근대에 와서 도검은 '미술품' 취급을 받았다는 걸 ―― 알고 있나? 베르나도.

-…….

티렐리가 하는 말이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지, 나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입을 다문 채 모의공격에 방어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별나기도 하지. 온갖 미술품을 없애버리는 게 사명인 우리들 그라마톤 클레릭이, 한편으로는 그 미술품의 한 종류를 하사받고는 그걸 자랑으로 삼고 있다니.

-……클레릭이 칼을 차는 건 잘못이라고?

-설마, 그럴 리가.

티렐리의 칼날이 다시 닥쳐온다. 나는 총턱으로 막는다.
―― 그러나 티렐리는 형에 맞추어 칼을 거두려 하지 않는다. 더욱 힘을 주어 내 방어를 밀어붙인다.


-……잘 보게나, 극한까지 세련된 이 기능성. 갖은 기교를 부려 단련한 경도와 예리함. 그야말로 건 카타 오의에 통달한 클레릭을 상징하기에 딱 어울리는 물건 아닌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건 카타 유단자는 귀중한 도검을 수여받는다. 그 형이상학적인 의미에 이의는 없다.
칼의 무게를 양손에 든 총으로 지탱하면서, 나는 티렐리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아친다. 그 말의 참뜻을 읽어내기 위해.

-장인이 벼린 도검과 우리들 성직자의 살인술은 근본적으로 서로 통하는 게 있단 말일세. 알겠나? 베르나도.

-……뭐가 말입니까?

-그러니까 말이지.
우리가 극한까지 익힌 건 카타도, 궁극적으로는 '미'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티렐리의 칼에서 무게가 걷혔다. 그 의미를 바로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동요하고 있었다.
칼을 거둔 티렐리가 다시 크게 휘두른다. 부주의하게도 방어의 경직이 길었던 나는 다음 반응이 살짝, 아주 살짝 늦어져서 ――
총턱으로 날을 받아낸 위치는 이상적인 힘점에서 아주 조금 어긋나 있었다.
티렐리의 공격에 조금이라도 더 힘이 실렸다면, 나는 틀림없이 칼날을 몸으로 받게 되었을 것이다.

티렐리가 다음 형을 준비하기 위해 칼을 당긴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좌우 총턱을 꽉 맞물어서 받아낸 칼날이 빠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한 다음 그대로 버틴다.

-그 발상은…… 틀렸습니다. 티렐리.

확인해야 한다. 오직 그 생각으로 나는 상대의 두 눈을 응시한다.
방금 전의 말, 그 참뜻.
결코 가볍게 흘려넘길 수 없는 망언이다.

-건 카타는 통계적 논리이자 그 완성형이고, 이상적인 '틀(カタ)'은 기하학적으로 계측되는 거지요. 우리가 연구하는 것은 구세계 예술가들이 탐닉하던 무질서하고 제멋대로인 정신활동과는 정반대 위치에 있습니다.
거기에 '미'라는 게 있다고 한다면, 그건 모든 군더더기를 제거한 철저한 기능미 ―― 그 이상의 것은 있을 수 없어요.

티렐리의 눈빛은 평온했다. 자칫 실수했으면 그 칼로 날 죽였을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조차 아무런 느낌도 없는 듯이.
내 꼴사나운 실수에 놀라지도 않고, 그 원인이 된 동요를 의아하게 여기지도 않고 ―― 마치 무엇이든 다 꿰뚫어보고 있는 것처럼.

-과연…… 멋진 의견일세, 베르나도.

칼을 쥔 티렐리의 손에서 갑자기 힘이 빠졌다.
대련은 여기까지다. 그 뜻을 알아차린 나도 꽉 조이고 있던 칼을 풀어주고, 다시 쌍총합장으로 모든 동작을 마무리했다.

-자네 말대로 우리들 클레릭의 기예에 미의식이 끼어들 여지는 없어. 건 카타는 '틀에 맞았을' 때 완성되고 끝이 나는 거니까.

칼을 칼집에 넣으며 태연히 말하는 티렐리에게서 위축된 듯한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전의 문답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 전혀 의식하지 않는, 어쩌면 그 자세한 내용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그건 그렇고, 오늘 밤도 네이더에서 몇 군데 조사해 보고 싶은 장소가 있거든. 자네도 일이 끝나는 대로 와 주겠나?

-……알겠습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탈의실로 향하는 티렐리의 뒷모습을 나는 바라보았다.
그가 유죄인가 아닌가, 진위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 티렐리는 내가 품고 있는 의심을 알아차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혈액검사를 요구했더라도 십중팔구는 허사로 그쳤을 것이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할 거라고 예측했다면, 아마도 그는 미리 정시에 프로지움 주사를 놓았을 테니까.
제대로 투여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불시검사 외에는 없다.
불시 ―― 그런 일이 가능할까?
클레릭으로서 나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은 티렐리. 애초에 나는 그와 듀오를 맺는 파트너로서,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에게 훈련을 받은 몸이다.
새삼스레 깨달은 것이지만, 아마도 내 사고패턴은 전부 티렐리에게 파악되고 있다…….
오한과도 닮은 전율에 사로잡힌 채, 얼마 동안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
.
.
저녁까지 모든 보고서를 마무리해 제출하고 ―― 티렐리의 의심스러운 언동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고 그냥 두는 수밖에 없었다 ―― 훈련장에서 지시받은 대로 티렐리에게 통신을 보내자, 그는 이미 네이더로 가서 단독으로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뒤따라오는 나와 합류할 장소로 그가 지정한 곳은 지난 번의 적발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옛 공업지구의 한 구역이었다.

내가 보기에, 티렐리가 직무에 쏟는 정열은 거짓이 아닌 진심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감정위반자라는 추측은 커다란 모순을 안게 된다.
일반적으로 감정위반자는 서로에게 공감하면서 더욱 조직적인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만일 클레릭 중에서 감정위반자가 나왔다고 하면, 그 인물은 틀림없이 다른 범죄자를 적발하는 것을 주저할 것이다. 하물며 처형임무라면 도저히 평정을 가장하고 있을 수는 없다.

―― 그래, 지난번 티렐리처럼 거리낌 없이 임무를 수행하기란 불가능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까 훈련장에서 나누었던 수수께끼같은 문답은 지금도 불길한 예감처럼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

풀리지 않는 의문을 머릿속에서 곱씹는 동안, 어느샌가 내 차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먼저 도착한 티렐리의 차 옆에 나란히 주차하고 밖으로 나온다.
눈이 닿는 범위에 티렐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혼자서 수색을 시작한 것일까.
일단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면서, 나는 눈 앞에 솟은 폐허로 발을 들여놓았다.

바닥에 두텁게 쌓인 먼지에는 새로운 발자국이 나 있다. 역시 티렐리는 안에 있는 모양이다.
이상하다. 평소같으면 밖에서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나는 발자국을 따라 건물 안으로 나아간다.

잠시 후 발자국은 창문도 출구도 없는 작은 방 안으로 이어져서는 ―― 갑자기 끊겨 있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몸을 숨길 장소도, 물론 티렐리 자신의 모습도.

함정이라고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등 뒤에서 입구의 철문이 닫힌다.
그 직전에 내 발밑으로 굴러들어온 것은 치안부대 돌입반이 자주 사용하는 스턴 그레네이드.
살상력은 없지만 섬광과 굉음을 동반한 충격파로 대상을 무력화한다. 특히 폐쇄된 공간에서는 즉시 효과가 ――

재빨리 눈을 감고 양손으로 고막을 덮었지만 충격파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충격파에 휩쓸린 나는 콘크리트 벽에 거세게 내동댕이쳐져, 격통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한다.
곧바로 일어서지 못한 채, 나는 그대로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나를 함정에 빠뜨린 적에게는 그 정도 빈틈도 충분했을 것이다.
웅크리고 있는 내 뒤통수에 누군가가 일격을 날리자, 이번에는 확실히 의식이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이 들자 나는 어둠 속에 있었다.

허둥대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고, 우선은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다.
온몸 마디마디가 아프지만 뼈에는 이상이 없다. 스스로 느낄 만큼 기억이 혼란스럽지도 않다.
성직복을 포함하여 장비품은 모두 빼앗겨 버렸다. 여기까지 날 데려온 자의 짓이겠지.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서는, 손으로 더듬어서 주변을 꼼꼼히 확인한다.
처음 습격당한 방보다도 훨씬 좁은 밀실이었다. 마찬가지로 창문이 없는 콘크리트로 바른 벽, 출입구는 하나밖에 없는 철문.
예상대로 문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걷어차서 부술 수 있을 만큼 허술한 물건도 아니다.
이상한 것은 방 구석에 며칠 분량의 휴대식량과 물통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감금한 인물은 아직까지는 날 죽일 생각이 없지만, 동시에 당장은 날 풀어줄 생각도 없는 듯하다.

누구일까 ―― 생각할 필요도 없다. 티렐리일 것이다.
굴러들어온 스턴 그레네이드도 이 방에 있는 휴대식량도 모두 치안부대에 지급되는 장비품이다. 레지스탕스가 손쉽게 마련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완벽하게 기척을 숨기고 날 기다릴 수 있는 것은 같은 클레릭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이미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티렐리는 감정위반자이다.
그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

문득 어떤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프·로·지·움이 없다.
주사기도 앰플도 빼앗긴 성직복의 가슴 주머니에 넣어둔 채이다.
방에 준비된 식량을 놓고 추측해 보면, 나는 앞으로 며칠 동안은 이 방에 계속 감금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주사는?
리브리아 시민으로서 명석한 사고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두 번의 프로지움 주사가 필수란 말이다!

……잠깐만, 진정하자.
심호흡을 하고 나는 허둥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렇게 간단히 혼란에 빠지다니. 아무래도 기절해 있는 동안 프로지움의 약효가 떨어진 모양이다.
분노, 공포, 생존본능에 의한 절망감…… 앞으로 얼마 동안 내 사고는 이러한 충동과 혼란에 시달릴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포기하면 안 된다.
일반 리브리아 시민이라면 모를까, 나는 가혹한 훈련을 거듭한 클레릭이다. 지금이 바로 과거에 했던 정신수양의 성과를 확인할 때인 것이다.

돌이켜 보자. 지금까지 보았던 감정위반자들의 수없는 계략을.
감정을 얻는 대가로 진정한 이성을 포기한 그들조차 그토록 교활한 꾀를 발휘했다.
프로지움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곧바로 원숭이로 퇴행하는 건 아니다. 명민한 사고를 유지하는 한 감정은 의지력으로 억제할 수 있다. 그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일찍이 약물이 가져다주는 복음이 없던 시대에서도 수많은 구도자들이 '깨달음'을 얻고 번뇌를 버렸다.
그와 똑같은 시련이 지금 이 몸에 닥쳐온 것이다.
불가능할 리가 없다. 이 몸은 바로 선택받은 리브리아 시민, 긍지 높은 그라마톤 클레릭이니까.
나는 방 한 구석에 벽을 향해 앉아 '선문답' 교과를 머릿속으로 반추하며, 스스로의 정신을 평온한 균형으로 이끌어 간다.
그래, 이것은 매우 유익한 시련이다. 티렐리에 대해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클레릭으로서의 자기 잠재력을 증명하는 결과가 될 테니까.

시계도 없고 창문으로 밤낮을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하기에, 시간의 경과는 공복이 찾아드는 간격으로 계산하는 수밖에 없었다.
프로지움 결핍에 따르는 금단증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화학적으로는 완전히 무해한 약물이니 당연하다. 사고력도 예상과 달리 명쾌하게 유지가 되었으므로, 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내가 실종된 것을 놓고, 테트라그라마톤은 수사중에 일어난 사고라고 판단할 것이다.
티렐리는 손쉽게 시치미를 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합류지점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우기면 그만이다.
아마도 이곳은 기습을 당한 장소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내 차도 틀림없이 처분했을 터이고. 리브리아를 떠나온 뒤의 내 행적을 알려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안 남았겠지.
그런데 애초에, 티렐리는 어째서 날 바로 죽이지 않고 여기에 감금해 놓았을까?
이렇게 내 신경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렸다가 같은 감정위반자인 레지스탕스 조직에 넘길 셈인가?
아니, 그러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미 티렐리가 테트라그라마톤 내부의 내통자로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고 있다면, 내게서 얻어낼 수 있는 범위의 정보는 모두 티렐리 자신이 제공할 수 있다. 이제 와서 날 심문할 가치는 전혀 없다.
무엇보다 레지스탕스에 대한 티렐리의 냉혹한 처형은 ―― 그것이 당국의 눈을 속이기 위한 위장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날 그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환희, 또는 무언가 의도를 달성했음을 뜻하는 표정이 아닌가.
만약 티렐리와 레지스탕스 사이에 아무런 관련성도 없다고 하면, 티렐리가 날 감금한 의도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다시 말해 ―― 아무 의도도 없는 변덕스럽고 순간적인 기분에 따른 것이다.
애초에 감정이란 비논리적인 충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에 사로잡힌 인간이 비논리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이미 티렐리는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착란된 행동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 이른바 '광기'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미치광이의 노리개로 여기에 붙잡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떤 의미로는 가장 끔찍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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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내시계의 감각으로 이틀이 지났다.
피부의 가려움을 참기가 힘들어져, 음료수를 조금 덜어 그것으로 몸을 닦는다.
감금이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물을 소비한다는 것에 잠시 망설였지만, 도저히 견딜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다.

나흘째. 철문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즉시 문으로 달려들어 ―― 밖에서 적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지만 ―― 밀어 열려고 했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문을 흔들어 봐도, 빗장의 나사가 시끄럽게 울릴 뿐이다.
문은 ―― 자물쇠가 잠긴 채였다.
하지만 나는 틀림없이 들었다. 열쇠구멍의 실린더가 돌아가고 빗장이 풀리는 소리를. 그 소리는 뭐란 말인가?

환청……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현기증을 느끼며 바닥에 웅크리고 만다.
이렇게도 뚜렷하게 감각에 이상이 왔을 거라고는 ―― 상상한 범위를 뛰어넘고 있었다.
이게 바로 프로지움이 없는 인간이 느끼는 혼란인가.
사방이 막힌 어둠 속에서, 자칫하다간 자기 몸의 위치마저 잃어버릴 것만 같은…… 온몸이 조각조각 녹아내려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영원히 방치되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싶어지는…… 이런 감각.
더 이상 인식을 거부할 수 없다. 이게 바로 '공포'라는 거겠지.

감금 때문에 신경이 망가지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맛보는 이 감정…… 공포라고 하는 감각은, 이제까지 프로지움의 가호에 힘입어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는 너무나도 강렬한 것이었다.
나는 보다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이론적인 예측을 해야 한다. 날 감금한 티렐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분석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은 ―― 그것조차 불가능하다.
티렐리. 날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그 남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고가 끓어오르고,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이 머릿속에서 미쳐 날뛴다.
이렇게 된 이상, 나는 자제심이 돌아올 때까지 끊임없이 벽에 머리를 찧으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분노'와 '증오'겠지. 과거 인류를 종족 규모의 자살로 몰아넣은 정신의 독.
그걸 알았다고 해서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는다. 지금의 내게는 그런 독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단이 없으니까.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약물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이젠 귀에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어딘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쥐인가 무언가의 작은 동물이 꿈틀대는 소리. 이런 소리들이 차츰차츰 음량을 더해서, 마침내는 귀청을 때리는 듯한 거대한 소음이 되어 좁은 방 안에 울려퍼진다.
그런 있을 수 없는 커다란 음성이 사실은 환청도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 내지르고 있는 절규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물이나 음식으로 예측한 생존 가능성이나 대책은 이미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저 ―― 내보내 줘. 지금 당장, 여기서……!!

지금 이 순간, 이 다음 순간이라도 바깥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미래 영겁 동안, 썩어 없어질 때까지 이 어둠에 갇힌 채…….
그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망상이었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 망상이 바로 진실이었다.
바닥이 없는 아득한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아무리 몸부림치고 발버둥을 쳐도 멈출 수 없다.
마지막에는 부끄러움도 체면도 다 내팽개치고 울부짖으며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해서 이 공포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면 이 몸의 존엄 따위는 값싼 대가일 테니까.

물론 ――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구원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분노나 굴욕조차도 집어삼킬 만큼 덩치를 키우며 마음을 침식해 들어오는 공포의 감정. 그에 대한 무력감.
―― '절망'이라는 이름의 지옥.

결국 날짜감각도 없어졌다.
물과 음식이 떨어지고 나서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다.
사물의 앞뒤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느 때는 흐느껴 울고, 어느 때는 무턱대고 벽에 주먹질을 퍼붓고…….
그것도 아니면 기운이 빠져 축 늘어진 채 어둠 속의 온갖 소리에 두려워 떠는 그런 시간이 반복되었다. 영원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반복이었다.
.
.
.
대체 며칠이나 지난 것일까. 눈동자가 빛을 느꼈을 때도 처음에는 자신의 감각을 믿을 수 없었다.
철문이 활짝 열리고 바깥에서 희미한 불빛이 들어오고 있다 ―― 그렇게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기까지, 나는 이전까지와 마찬가지로 착란에 빠져 겁에 질린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해방.
자유.
생존의 기회 ――

혼탁해져 있던 사고 속에서 이들 단어가 떠올라, 나는 쇠약해진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감옥을 빠져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위협에 대비할 만큼의 사고력은 이미 내 안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계단을 기어오르자 눈에 들어온 것은 아마 네이더의 어느 곳인 듯한, 한껏 황폐해진 폐가의 복도.
수명이 거의 다한 형광등이 힘없이 깜빡이며 앞길을 비추고 있다.
머릿속이 몽롱한 채로 복도를 지나 막다른 방으로 들어간다.

폐허치고는 깔끔하게 정돈된, 명백하게 인간이 생활하는 흔적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물건들을 보고서 내 사고력은 한 단계 더 각성한다.
붙잡히면서 빼앗긴 내 소지품…….
권총 두 자루와 예비탄창이 달린 멜빵. 손목시계. 차 열쇠. 단정하게 개 놓은 칠흑의 성직복.
이들 물건을 다시 볼 때까지, 나는 자신이 그라마톤 클레릭의 임무를 띠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각 장비들이 이상이 없는지를 주의깊게 확인하면서 무장을 몸에 장착한다.
탄창의 내용물은 한 발도 부족함 없이 장전된 그대로. 권총에도 손을 댄 흔적은 없다.
성직복을 입고 방 한구석에 있는 전신거울을 들여다보자, 거기에는 꺼칠하게 수염이 자라고 잔뜩 초췌하기는 했지만,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클레릭 멜빈 베르나도의 모습이 있었다.

단 하나, 프로지움만이 없다.
돌려받은 소지품 중에도 앰플과 주사기만은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내 핏속에는 여전히 프로지움이 한 방울도 없다. 내 영혼은 수없는 혼탁한 감정으로 더럽혀진 그대로였다.
호흡을 가라앉히고 거울 속의 자신에게 다짐한다.
잊지 마라. 나는 성직자, 법의 수호자이며 집행자.
자신 안에 있는 원죄의 어둠에 휩쓸리면 안 된다.
어둠 속에 갇혀 있는 동안 간단히 잊어버린 정신집중에 의한 자기통제법도, 지금은 쉽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나는 성직복의 옷깃을 여미고는 더욱 안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형광등의 조명은 마치 내 앞길을 안내라도 하듯이 계속 이어졌다.
불이 켜진 복도와 방을 계속해서 통과하는 것이 전부로, 도중에 길을 잃을 걱정은 전혀 없었다.
평범한 폐가에는 있을 리 없는 발전설비. 여기저기 남아있는 생활의 자취.
아마도 이곳은 레지스탕스가 생활하는 거점으로 삼기 위해 손을 댄 건물이다.
바닥 한켠에서 검게 굳은 핏자국을 몇 번이고 발견하자, 내 상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까지, 여기에는 리브리아를 등진 감정위반자들이 숨어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누군가가 제거했다…… 아마도 그들을 대신해서 이 쾌적한 보금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누구의 짓인가…… 당연히 물어볼 필요도 없다.

잠시 후, 나는 티렐리와 마주쳤다.
내장도 집기도 없는, 그저 휑하니 텅 빈 커다란 방 한가운데에, 썩어가는 묵직한 안락의자를 다리 하나만 그대로 놓은 채, 거기서 티렐리는 책을 읽고 있었다.
물론 리브리아에서 공식적으로 출판된 신부의 저서는 아니다. 레지스탕스가 네이더에서 가지고 온 것과 같은 금서이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내 가슴속에서 시커멓고 흉칙한 무언가가 화산처럼 끓어올라서는, 이윽고 '살의'라는 형체를 갖춘다.


―― 좋지 않아. 이건 '증오'의 감정이다. 클레릭인 내가 충동에 이끌려 행동해서 좋을 게 없다.

나는 총을 뽑아드는 대신, 자신을 억제하려는 의도를 담아 말을 꺼냈다.

-……이유가 뭐요? 티렐리.

-처음에는 단순한 우연이었네.

책장에서 시선을 떼기 전부터 티렐리는 이미 내 존재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마치 일상 이야기라도 하는 듯이 조용한 태도로 대답을 이었다.

-어쩌다가 시외에서 진행하던 수사가 밤샘을 하게 됐는데, 나는 예비 프로지움이 없었어. 약효가 떨어진 상태에서 레지스탕스를 처형하게 됐지 뭔가.
……그때의 충격이란 엄청났지. 문자 그대로 세상이 달라졌으니. 그 이후로 나는 리브리아식 인생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됐다네.

-하지만 그 후에도 당신은 테트라그라마톤 내부에 계속 남아있었어.
목적이 뭐요? 내통?

-설마.

넘겨짚지 말라는 듯이, 티렐리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미소지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내가 레지스탕스로 돌아서기라도 했다고?
농담하지 말게. 지금도 나는 클레릭으로서 책무를 성실히 다하고 있어. 품행에 다소 문제는 있는지 모르겠지만.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티렐리를 마주하며, 나는 무심결에 목소리를 억누르고 있었다.

-독서는 재미있나?

-아쉽지만 그렇지도 않더군.

내 분노에는 신경도 안 쓴다는 태도로, 티렐리는 손에 펼쳐든 책을 흔들어 보인다.

-감정을 되찾은 인간이 전부 미술품이나 애완동물 돌보기에 열중하는 걸로 보이나?
그런 전형적인 추측은 수사관으로서 별로 칭찬할 만한 게 아닌데.

-놀리지 마쇼.

-이런 책을 쓰거나 읽어 보고서, 그 정도를 가지고 아름다움이 어쩌니 사랑이 저쩌니 쑥덕대는 것들은…… 솔직히 말해서 가엾기 짝이 없더군. 기껏 프로지움의 속박에서 풀려나서는 그런 재미없는 삶에 만족하다니.
그러니까 그런 녀석들은 사람을 제대로 죽여 본 적이 없어. 생명을 빼앗는 행위가 얼마나 충격인지도 모르는 채로 시시한 것들에 일희일비하며 지내는 거지.
하지만 나는 클레릭, 절대적인 죽음을 다스리는 자였고,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진리를 깨우치게 됐네.
내가 당국을 배반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닐세. 감정이 회복되면서 집행자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게 한층 더없는 기쁨이 됐거든.
이제 신부의 이념 따윈 아무래도 좋아. 인간을, 타인의 목숨을 마음껏 죽이고, 유린하고, 약탈한다…… 그럴 때마다 내 영혼은 생명의 약동으로 춤을 춘단 말이야!

티렐리의 독백을 듣고, 나는 마침내 그날 보았던 미소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당신은 미쳤어.

구세계처럼 모든 인류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도, 티렐리와 같은 식으로 환희를 추구하는 자는 법으로 처단받았을 것이다.
네이더에 거주하는 감정위반자들.
위안거리로 동물을 키우고, 예전 세계의 서적이나 회화를 통해 사랑과 기쁨을 이어받으려 하는 그들은 확실히 어리석은 존재이다…… 하지만 그런 레지스탕스들도 티렐리와 감성을 공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남자가 스스로 체현하는 '악'은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몰려오는 혐오감에 구역질이 나올 뻔했다. 프로지움만 있었다면 이 '불쾌감'을 의식에서 멀리 몰아낼 수 있었을 텐데.
잊지 마라. 나는 성스러운 임무를 맡은 몸이다.

-리브리아시국이 정하는 법률에 따라, 클레릭 티렐리 당신을 감정위반자로 처형한다.

-감정범죄라…… 자네 자신도 프로지움 주사를 닷새 동안이나 빼먹고 있는 걸 잊어버렸나?

-당신이 그렇게 강요했잖아!

끝내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고함을 지른 나에게, 자기 뜻대로 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티렐리.

-과연.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네가 아닌 나로군. 그런데, 지금 자네 컨디션이 지극히 범죄적인 상태인 건 틀림없지 않은가?

묘하게 즐거운 듯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티렐리를 보며 내 머릿속에 어떤 추측이 스쳐가고 ―― 그 끔찍한 결론에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린다.

-어때? 자신이 '죄' 그 자체가 된 기분은.
……그래, 지금 우리는 '기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가능하지. 유쾌하다고 생각 안 하나?

-아니. 엄청나게…… 불쾌해.

이 남자가 친 덫은, 설마 내가 프로지움을 투여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
나를 자신과 동류로 끌어들이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

헛소리 마!

-당신은 날 더럽혔어. 가장 끔찍한 모욕까지 안겨주고. ……이 죄는 반드시 갚아야 해, 바솔로뮤 티렐리.

-베르나도, 내가 미운가?

내가 분노하면 할수록 티렐리가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확실했다.
악몽과도 같은 순환. 그러나 달리 어떤 방법도 없다.

-그래, 투쟁이란 원래 그래야 하는 법이야. 증오에 불타고, 초조에 떠밀리고, 공포에 질리면서 몸·마음·기술의 전부를 겨루는…… 이게 바로 전사와 전사가 싸움을 벌이는 이상적인 형태지. 우리들 클레릭이 무술의 정점을 추구하면서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첫번째 원칙.
때문에 자네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프로지움의 영향을 벗어난 상태에서 만나고 싶었네. 그렇게 해서 내가 추구해 마지않던 '진정한 투쟁'이 실현되는 거야!

-그런 목적으로 날 감금했나?

-일방적인 살육을 즐기는 것도 나름대로 상쾌하긴 한데 말이야, 그것도 슬슬 질리더군.
실력이 막상막하인 상대와 꼭 한번 목숨을 건 싸움을 해 보고 싶었어. 나처럼 건 카타를 극한까지 익힌 클레릭하고…… 나와 함께 듀오를 완성한 자네라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호적수가 되겠지.

-미친……!

바로 여기서 총을 뽑아 저 득의만면한 낯짝을 산산조각내 주는 것이 ―― 결국 저자가 노리는 바라고 해도, 이미 내 자제심은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더 이상 어쩌라는 건가? 피나는 노력으로 연마한 이 기술을 이렇게까지 모욕받고 우롱당하면……
이 굴욕, 놈의 피로 씻지 않으면 어쩌란 말인가?!

반쯤은 무의식 상태에서, 나는 소매 밑 권총집에서 뽑아낸 격투권총을 티렐리를 향해 발포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게 얼마나 서투른 짓인지 알아차렸어야 했다.
설령 총구를 겨누는 것까지는 좋다고 해도, 최소한 발포가 얼마나 무의미한지는 분간했어야 했다.
격정에 요동치는 사격의 탄도는 건 카타의 달인인 티렐리에게는 눈에 보이듯 뻔한 것이기에.

9㎜ 숙정탄 세 발에 꿰뚫린 안락의자가 안에 들어있던 솜을 흩뿌린다.
그러나 한발 앞서 오른쪽으로 상체를 젖히고 있던 티렐리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그 양손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소매 밑에서 꺼낸 쌍권총이 ――
인식, 예측, 회피행동…… 평소같으면 당연히 찰나에 처리했을 행동이, 지금은 너무나도 느렸다.
그제서야 나는, 분노라는 감정 때문에 얼마나 판단력이 흐려져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티렐리가 '교교의 형'에서 뿜어내는 동시 3연사, 합계 여섯 발의 탄환이 덮쳐온다.
건 카타 이론이 보증하는 안전권은 ―― 바로 앞에 있는데도 ―― 다리의 동작이 따라오지 못한다.
그렇게 깨달은 시점에서, 나는 넘어질 각오를 하고 온몸을 상체의 기세에 맡긴 채 옆으로 날렸다.
이렇게 된 이상은 급소만이라도 피해야 한다.

오른쪽 장딴지에 극심한 통증이 닥쳐온다. 하지만 돌아볼 여유는 없다.
어깨부터 떨어져서 바닥에 구르자마자, 나는 즉시 자세를 바꾸어야 했다.
땅에 엎드린 자세에서 사용할 수 있는 회피술은 형태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평범한 적이라면 몰라도, 나와 똑같이 건 카타에 정통한 티렐리를 상대로는 이쪽의 수를 읽히는 것은 뻔한 결과이다.
나는 넘어지는 기세를 줄이지 않은 채 그대로 바닥을 굴러 출구까지 물러났다.
계속해서 총탄이 날아오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이제 와서 봐주기라도 하겠다는 셈인지 티렐리의 총격은 없다.

아까 들어왔던 입구까지 도망쳐서 차폐물을 확보한 다음, 나는 몸을 일으켰다.
오른발이 바닥에 닿은 순간, 불타는 듯 격한 통증과 함께 젖은 걸레를 떨어뜨린 듯한 질퍽한 소리가 들렸다.
피가 얼마나 흘러서 구두 바닥을 적시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눈으로 볼 필요도 없이 위험한 출혈량이다.
지혈처치…… 물론 그럴 여유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과다출혈로 죽기 전까지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냐 하면, 티렐리를 상대로 그런 낙관론은 통하지 않는다.
심호흡을 하고 통각을 의식 바깥으로 몰아낸 다음, 나는 상처입은 다리를 이끌고 복도를 되돌아갔다.
일단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응급조치를 하는 수밖에 없다. 티렐리와 대치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몸을 던져 제일 가까이에 있던 문을 열어젖히자, 예상외로 넓은 공간이 어둠 속에 펼쳐졌다.
몇 층 높이로 뚫린 천장과 여기저기 흩어진 대형 기계…… 아마도 여긴 폐공장 비슷한 장소였던 모양이다.
운이 좋았다. 여기라면 숨을 곳은 얼마든지 있다.
무엇보다, 티렐리는 곧바로 날 뒤쫓아올 생각은 없는 듯하다.
마음만 먹었으면 다리에 총을 맞은 날 끝장낼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다.
아마도 날 실컷 가지고 놀다가 죽일 생각이다.
이제 그 남자는 그런 행위에서 기쁨을 찾게 되었으니까.

심장 고동에 맞추어 격통에 비명을 지르는 다리를 다시 한번 이끌고, 나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에 잠긴 폐공장 안을 달렸다.
입구에서 충분히 떨어진 다음, 적당한 그늘을 찾아서 웅크려 앉아 일단 호흡을 고른다.
그제서야 겨우 확인해 본 오른쪽 다리의 상처는 끔찍한 상태였다.
갈고리같은 것으로 찢어발긴 것처럼 장딴지 살이 몽땅 날아가 버렸다.
그래도 근육이나 뼈가 부서지거나 탄환이 몸 안에 남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잘 살펴보니 동맥출혈도 아니다. 지혈만 제대로 하면 얼마 동안은 더 움직일 수 있다.

-어때 베르나도? 상처는 많이 아픈가?

폐공장의 어디서부턴가 티렐리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바지에서 뽑아낸 벨트로 무릎 아래를 동여매면서, 나는 가슴속에서 미쳐 날뛰는 것들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갇혀 있으면서 느낀 것이지만, 프로지움에 길들여진 내 신경은 의지력으로 고통을 이겨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방금 전까지 통증을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긴장으로 인해 뇌내물질이 분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 쉬면서 분비가 끊어진 지금은 마치 한쪽 다리를 황산 풀에 담근 것처럼 극심한 통증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는 것만으로도 비지땀이 줄줄 흐른다.
그러나 고통 이상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역시 그로 인해 몰아닥치는 온갖 충동이었다.
끓어오르는 분노. 몸이 움츠러드는 공포.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대한 초조…… 지금 내 머릿속에서 성난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무지막지한 '감정'들은 어둠 속에 갇혀 있으면서 자각했을 때보다 한층 더 격렬하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사고를 하얗게 불태운다.

위험하다…….

단순히 분노에 휩싸인 것만으로도 전술판단력에 그만한 지장을 받았다.
지금 상태로는 제대로 총을 조준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

-상처가 아프지? 죽는 게 두렵지? 분노가 공기를 뒤흔드는 게 느껴지는군…… 하지만 축하하네. 이제서야 자넨 드디어 진정한 건 카타의 출발점에 선 거야.

다시 메아리치는 티렐리의 목소리.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기쁨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뜨겁게 들뜬 음성.
과거에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던 일그러진 쾌락을, 그는 지금 넘치고도 남을 만큼 맛보고 있을 것이다.


-'틀에 맞는' 게 극치가 아니야. 그 이상으로 더욱 높은 단계가 건 카타에는 존재한단 말이지. 그래, 건 카타의 위엄은, 기술은, 정신은 궁극에 이르러서 바로 예술이란 말일세!
하지만 그 경지까지 도달하면 클레릭의 본분을 벗어나게 돼. 슬프지? 이 얼마나 딱한 모순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 안 하나? 베르나도.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훈련장에서 티렐리와 마주했을 때부터 이미 그 광기의 편린을 목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판단을 잘못했다.
그때 망설이지 말고 캐물었다면, 어쩌면…….
설령 그가 나를 베었다고 해도, 그 시점에서 티렐리의 범죄사실 또한 밝혀졌을 것이다.
이런 고독한 싸움에 말려들 일은 없었다.

-자, 그 격정을 품은 채로 싸워 보게. 끓어오르는 정열을 건 카타 수련에 쏟아부어 지고의 기술로 피워내 보라고!

콘크리트 바닥을 울리며 다가오는 죽음의 구둣발소리.
반향이 감각을 어지럽힌다.
어디야…… 놈은 어디서 오는 거냐?

-혹시라도 자네가 살아서 아침을 맞이한다면 자네도 확신하겠지. 확인하게 될 거야. 클레릭의 한계를 넘어선 곳에 있는 진정한 건 카타를…… 그렇지 않다면 죽는 수밖에 없으니까.

티렐리의 발소리가 멎는다.

전기충격과도 같은 오한을 느끼며, 나는 몸을 숨기고 있던 그늘을 뛰쳐나와 다른 차폐물 뒤로 뛰어들었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방금 전까지 내가 웅크리고 있던 장소에 총탄 몇 발이 명중한다.
놈은 ―― 내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
어디냐? 어디서 쐈어?!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티렐리의 기척을 찾아 조심스레 기어 전진했다.
어디선가 울려퍼지는 기분나쁜 웃음소리.

-그러고 보니 베르나도…… 나 지난번에 개를 먹어 봤네. 갓 잡아서 생피가 뚝뚝 떨어지는 신선한 간을.
상상이 가나? 이리저리 도망치는 생물을 몰아붙여서, 승리하고, 죽여서, 먹었단 말이야! 이 손으로!

어느덧 티렐리의 목소리는 요란한 웃음으로 바뀌어, 미치광이와도 같은 열광을 담아 말을 토해내고 있었다.

-상상이 돼? 따끈따끈한 피비린내가 나는 그게 얼마나 맛있었는지!
하하, 그게 바로 '살아있다'는 감촉이라고. 신부가 우리한테서 빼앗아간 생명의 환희란 말이다!

미쳤어. 저 남자는 틀림없이 미쳤다.

-그러니까 ―― 전사로서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사냥감인 자네를 사냥해서, 해치운 다음에는…….
난 말이지, 자네 간도 먹어 볼 생각이야. 베르나도.
큭큭큭……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체험이 될까!

……지금 티렐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것'을 가두기 위해, 단지 그것만을 위해, 인류는 다른 모든 감정까지도 전부 금기로 봉인해야만 했다.

사랑이 가져다주는 정열도, 슬픔이 가져오는 절망도, 모두가 저 광기를 망각하기 위해 함께 매장당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심판받았던 감정위반자들은 모두 티렐리의 ―― 티렐리가 체현하는 '그것'의 희생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저자는 단순한 감정위반자가 아니다. 그런 분류조차 뛰어넘은 영역에 있는 사악한 존재다.

다시 울려퍼지는 총성 ――
이번에는 내가 기어가는 바로 코앞에서 콘크리트 바닥이 박살나 흩어진다.
나는 공황에 사로잡혀, 사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없이 몸을 굴렸다.
날뛰는 말에게 채찍질을 하듯이 총탄이 두 발, 세 발 바닥을 파고든다.
도망칠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클레릭으로서 필수인 공간인식조차 지금의 내게는 의식을 집중할 여유가 없었다.
제일 가까운 차폐물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조차도 확인할 수 없다.

이미 나는 완전히 '사냥꾼'인 티렐리에게 마음대로 농락당하고 있었다.
그 결과를 깨닫고 아연해진 것은, 계속되던 총격이 간신히 멎고 내가 몸을 일으킬 틈을 얻었을 때였다.
티렐리의 총탄에서 도망치는 동안 나는 산처럼 쌓인 기계더미를 벗어나 자재반입구 앞까지 내몰려 있었던 것이다.
대형 차량이 출입할 수 있도록 크게 트인 공간이다.
가장 가까운 그늘조차 이미 한 동작으로는 도망쳐 숨을 수 없는 거리였다.

-여기까지군. 베르나도.

어둠 속에서, 마치 그림자 그 자체인 것처럼 불길한 모습을 티렐리가 드러낸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쪽을 겨눈 총구가 지금 내게는 시야를 온통 뒤덮을 만큼 커다란 구멍으로 보인다.
그 공허한 심연 안으로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무한질량의 어둠과 같은 그곳에…….

지금, 처음으로 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인식했다.
그것은 한없이 차갑고, 한없이 허무하고, 절대적인 ―― 유일무이의 법칙.
이 몸을 태우는 공포도 분노도 절망조차도 모두 순식간에 얼려버리고, 결정으로 만들어 버리는 절대영도.
그 차가움을 나는 이해했다.
'감정'이라는 뜨거운 피의 흐름을 체험한 다음이었기에, 마침내 피가 얼어붙는 냉기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 얼어붙은 의식 속을 사고의 섬광이 내달린다.
마치 그것은 극저온 속을 흐르는 제로저항의 전류처럼.
바야흐로 죽음을 맞이하려 하는 내 사고는…… 하얗게, 하얗게, 눈부시게 달아오르며 번뜩였다.

건 카타 이론에 의한 탄도예측.
그에 따른 내 회피운동을 당연한 듯이 역산해서 날아오는 티렐리의 사격. 그러니까 ―― 거기서 재역산할 수 있는 티렐리의 사선은 ――
한없이 차분하게 가다듬어진 사고 속에서, 나 자신의 사지가 약동하는 것을 의식한다.
총성보다 0.1초 앞선 회피운동으로, 나는 몸을 비틀면서 빗발처럼 쏟아지는 탄환을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양손에 든 총을, 티렐리의 미래위치로서 가장 확률이 높다고 예측한 세 군데를 향해 발포한다.
그러나 티렐리의 회피행동 또한 수리적 확률을 저버린 역산이었다.
단 한 발도 맞지 않은 채 끊임없이 총탄을 연사하여 내 움직임을 봉하려고 시도한다.
그래 ―― 확실히 티렐리가 아까 말했던 대로, 두 사람의 조건은 완전히 동일했다. 건 카타에 의한 사격은 건 카타 이론으로 예측이 가능하고 건 카타로 회피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위치를 바꾸어 서로의 사선을 빠져나가며 총탄을 퍼부었다.
양쪽의 쌍권총이 노호와도 같은 사중창을 노래하고, 총구에서 뿜어나오는 화염의 꽃잎이 활짝 피었다가는 금세 흩어진다.
이제 티렐리는 열광하는 아이처럼 목소리를 높여 외치고 있었다.

-좋았어! 그렇게 하면 돼! 이 스릴, 이 정열! 이게 바로 인생이야. 생명의 광채라고!

작열하는 총탄이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빚어내는 무늬 속에서, 두 사람은 확률통계학의 보호를 받으며 죽음과 맞닿은 스텝을 밟는다.
그 비할 바 없는 격렬함에 혀를 내두른 것은 다름아닌 나 자신이었다.
지금껏 이런 속도와 효율로 기술을 구사한 적은 없다.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연산되고 있을 전략사고의 내용은 이미 나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다.
잡념을 벗어던지고 순수해진 사고 스피드는 어떠한 느낌도 따라붙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건 카타' 그 자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자아 베르나도, 더 흥분해 봐! 좀 더 격하게! 지금보다 더한 기쁨으로 날 이끌어 줘!

그건 아니야 티렐리.
투쟁의 극한에 정열이 있다고 당신이 말했지.
하지만 내 정신은 한없이 맑개 개어 있다.
거기에 있는 것은 그저 가차없는 생과 사의 경계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인식이 내 마음을 얼어붙게 한다. 겨울하늘처럼 투명하고 ―― 맑게 해 준다.

사격범위가 되는 공간은 사수를 정점으로 한 원뿔형. 따라서 착탄 예상면적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2차곡선을 그리며 증가한다.
효율적인 회피 벡터는 물론 옆방향이지만, 다음 탄의 위험영역을 줄이기 위해서는 전진하여 사수와 거리를 좁히는 것이 보다 유효. 즉 ―― 계속적인 총격을 연속으로 회피하기 위한 최적의 벡터는 대각선 전방이 된다.
이 해답은 나도 티렐리도 다르지 않다.
그 결과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사격을 교환하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려들듯이 서로의 거리를 좁혀 나간다.

티렐리가 19발, 내가 18발을 소모했을 때, 마침내 두 사람은 근접전투가 가능한 간격에 도달했다.
서로의 급소를 포착하려는 총구를 서로의 총이 턱으로 쳐낸다.
지근거리에서의 착탄 예상면적은 '점'. 이렇게 되면 확률이고 뭐고 없다. 오직 순수하게 격투술의 숙련도만이 명암을 가른다.


이미 두 사람의 총은 찌르는 무기 ―― 무한히 긴 도신을 가진 스틸레토 나이프와 마찬가지였다.
그 날은 불가시(不可示)이자 불간섭. 피하거나 받아넘기려면 손을 노려 무기를 빼앗는 공격 외에는 없다.
우리는 서로의 손이 닿는 범위 바깥에서, 마치 벌새가 날개짓하듯이 쌍권총을 쳐들고는 프레임의 턱을 맞부딪치며 힘을 겨루었다.
한순간 내각으로 상대의 총구가 파고든다 해도, 그것이 불을 뿜기 직전에 외각으로 쳐낸다.
아슬아슬하게 바깥으로 벗어난 총구는 굉음과 화염을 허공에 흩뿌리고, 사방팔방에서 번쩍이며 마치 후광처럼 나와 티렐리를 감싼다.

처음에는 온 힘을 다해 끊임없이 공격을 퍼붓던 내가 우세한 듯 보였지만, 발포할 때마다 계속해서 총구가 어긋나는 것을 보고 알아차렸다.
―― 티렐리는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틈을 보이고 있다. 내게 몇 번이고 사격할 기회를 주어서 탄환을 낭비하게 만들려는 속셈이다.
불리한 듯 보이면서 실제로 싸움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은 티렐리 쪽이었다.

-건 카타에는 기능미밖에 없다고……지난번에 그렇게 말했지? 베르나도.

자신의 불리함을 깨달은 나를 더욱 몰아붙이려는 듯이, 티렐리가 여유있게 말을 잇는다.
아슬아슬한 형세로 격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마치 사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아직 멀었어 베르나도. '틀에 맞추는' 거라면 그걸로도 충분해. 하지만 무예의 심오함이란 그런 보잘것없는 한계에 쉽사리 가로막히는 게 아니야!

티렐리는 ―― 나를 위협해 몰아붙이는 단계에서 적지 않은 탄약을 낭비하였다.
하지만 그때 공황상태였던 나는 그가 발포한 횟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은 독창성. 찰나의 직감이 아니면 개척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 해방된 자유로운 정신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

사방팔방에서 덮쳐오는 티렐리의 총구를 뿌리치면서 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티렐리가 쏜 총알은? 8발……? 9발……?

-형식은 잊어버려! 틀 따윈 잊어버려! 그랬을 때 평범한 기예는 예술로 승화된다!

어떻게 되든 ―― 총알을 꽉 채워도 장탄수는 최대 17발.
두 자루분을 합산해도 티렐리에게는 몇 발의 여유밖에 없다. 놈은 반드시 탄창을 교환한다.
하지만…… 언제? 어느 타이밍에?

-자아 베르나도, 나를 이끌어 봐! 일선을 넘어선 그 다음으로! 잊혀져 버린 진정한 '무(武)'에 함께 도달해 보세…… '틀을 깨는' 오의에!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티렐리는 믿기 어려운 행동을 했다.
오른손의 총을, 방아쇠울에 손가락만을 걸친 상태로 손에서 놓고, 내게 총 옆면을 향하는 형태로 공중에 띄운 것이다.
무슨 ――
그렇게 생각한 순간, 티렐리는 오른손을 옆으로 휘둘렀다.
손가락 하나로 지탱되는 총바닥이 내 오른손을 후려친다.
당연히 그 반작용은 티렐리의 손가락을 방아쇠로 밀어붙이게 되어 ―― 충격과 동시에 티렐리의 총은 측면을 향한 채 격발되었다.

-뭐?!

폭발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총구에서 뛰쳐나온 티렐리의 탄환은, 하필이면 노리고 쏘기라도 것처럼 내 왼손에 들린 총에 명중했다.
엄청난 충격에 왼손이 저리다. 총을 놓치는 것만은 가까스로 면했지만 내가 사용하려던 기술은 완전히 막혀버렸다.
티렐리가 오른손의 한 동작만으로 내 쌍권총을 한꺼번에 막아버린 그때, 완전히 자유로운 그의 왼손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피가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기계음은 ―― 긴급 재장전 시스템이 총목에 예비탄창을 끼워넣는 작동음.
티렐리의 왼손에 있는 권총이 다시 16연발의 살의를 담은 사신의 숨결을 되찾는다.
재장전을 통해 탄환수에서 우위를 얻은 티렐리가, 이번에는 공격으로 전환하여 맹렬하게 덮쳐온다.
거침없는 기세로 날아드는 총구를 나는 철저히 수세에서 방어하는 수밖에 없었다.
티렐리가 거꾸로 잡은 오른손의 권총은 노리쇠가 내려온 채 멈춰 있다.
방금 전의 곡예와도 같은 한 발이 마지막 탄환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까 총탄을 맞은 내 왼손의 총은 기관부의 방아쇠걸이가 부서졌다.
장력을 잃은 방아쇠는 손가락 끝에 대롱대롱 걸려 있다. 이 총은 더 이상 탄환을 쏠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쏠 수 있는 총은 한 자루뿐. 나머지 한 자루는 방패 대용으로밖에 쓰지 못한다.
그렇지만 티렐리는 재장전을 마쳐서 마음껏 쏠 수 있다. 반면에 나는 ―― 앞으로 2발.
물론 티렐리는 내게 재장전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탄이 떨어진 오른손의 총으로 내 방어를 무너뜨리면서, 왼손의 총구로 집요하게 내 급소를 노린다.


내게는 ―― 물러설 곳이 없었다.
총에 맞은 오른발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감각도 잃어버렸다.
통증조차 의식에서 몰아내고 계속해서 혹사한 대가가 마침내 찾아온 것 같다.
티렐리의 오른손과 내 왼손, 이미 제 기능을 잃어버린 두 자루 총이 서로의 눈앞에서 불꽃을 튀겼다.
순간적인 착상이 내 머리를 스쳐간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나는 왼손을 틀어, 티렐리의 얼굴을 향해 손목을 내뻗었다.
그 독특한 근육의 움직임을 소매 안의 권총집이 감지하고 긴급 재장전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용수철 장치로 사출된 예비탄창이 공중을 날아 티렐리의 콧등을 거세게 후려친다.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티렐리가 한순간 물러선다.
일순간의 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른손의 총구로 티렐리의 배를 겨눈다. 일단은 움직임부터 멈추면 된다. 마무리로는 아직 한 발이 더 남아있다.
나는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티렐리는 이 상황에서 내 탄도를 읽었던 모양이다.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자마자, 그는 내가 조준한 바로 그 위치에 오른쪽 무릎을 치켜들었다.
필살을 노린 일격은 티렐리의 무릎을 박살내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가 이상한 각도로 구부러진 오른발을 내리자 동시에 피보라가 바닥에 꽃을 피운다.

두 사람의 총구는 허공에 있었다.
지금 다시 조준하는 속도로 어느 쪽이 먼저 발사할 것인가…….
그 총구가 불을 뿜기 전에 쳐낼 수 있을까…….
양쪽이 모두 판단을 미룬 채, 두 사람의 움직임은 그대로 멎었다.

-……아파. 미치도록 아프다고…… 그리고 지금은 자네가 미워서 못 참겠어…….

얼굴에 예비탄창을 맞아 코피를 흘리고, 총에 맞은 오른쪽 다리의 통증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래도 티렐리는 웃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환희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크크크…… 최고야 베르나도. 이렇게 불타오를 정도로 지금 나는 감정을…… 생명의 근원을 느끼고 있어……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찾던 거라고!

그렇겠지. 하지만 난 아무런 느낌도 없다.
아픔도 공포도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내 마음은 한없이 고요했다.
이런 고요 속에서는, 미풍의 숨결도 잔잔한 물결도 나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남은 탄환은 단 한 발.
한 가지 결말. 한 사람의 죽음. 이걸로 필요하고도 충분하다.

-이렇게도 아프고 증오스럽다면…… 널 죽이는 순간에는 얼마나 기쁠까?! 베르나도!

미치광이처럼 웃음을 터뜨리며 공격해 들어오는 티렐리.
거칠게 들어올린 총구를, 나는 총턱으로 막아 떨군다.
하지만 조준이 급소에서 벗어났는데도 티렐리는 그대로 발포했다. 아무리 총구가 비껴나가도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미처 다 피하지 못한 탄환이 내 옆구리를, 어깨를, 다리를 스치고 피부를 찢는다.
티렐리는 내 남은 탄수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은 탄환을 아낌없이 퍼부어 날 지치게 만든 다음 승부를 내려는 속셈이다.

섬광이, 총성이, 그 잔향이 울려퍼지는 사고 속에서, 온몸을 찢어발기는 감촉을 아련히 의식하면서도…… 나는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티렐리의 두 눈. 그 안에 들어찬 광기. 그가 발사하는 권총, 전진·후퇴를 반복하는 노리쇠, 튕겨나와 허공에서 춤추는 빈 탄피, 놋쇠빛 광채가 그리는 포물선 ――
거기서 나는 승기를 보았다.

불을 뿜는 총구를 쳐내던 손을 슬쩍 멈추고는 허공으로 젓는다.
어중간하게 방어한 탓에 사선은 완전히 외각으로 비껴나가지 않고, 총탄이 내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는 내 정수리에, 마침내 티렐리가 총구를 들이댄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티렐리는 알아챈 모양이었다. 자신의 총이 격발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때는 나도 역시 그의 미간에 총구를 들이댄 후였다.


-……이것 또한 당신이 바라던 거겠지? 티렐리.

-그렇…… 군.

그는 죽음을 담보로 건 투쟁을 원했다.
그것은 절반 확률의 승리를 원하는 것이며, 동시에 절반 확률의 패배를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티렐리가 얻는 것은 어느 쪽이든 동등한 가치였던 것이다.

마지막 한 발. 그때 내가 방어를 허술히 하면서 총으로 쳐낸 것은 티렐리의 총에서 배출된 빈 탄피였다.
그 궤도를 눈으로 포착하고, 1000만분의 1초가 될까말까한 타이밍을 잡아서, 나는 공중에 날리는 빈 탄피를 열려 있던 탄피 배출구에 쳐 넣은 것이다.
노리쇠의 블로우백이 끝나기 직전에 탄피 배출구로 이물질이 들어간 티렐리의 총은 폐쇄불량을 일으켜, 다음 탄을 장전하지 못한 채 침묵했다.
다시 노리쇠를 당겨 배출구에 낀 탄피를 제거하지 않는 한, 지금 티렐리가 겨누고 있는 흉기는 고철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가, 이제 난 죽는 건가? 이것이 공포…… 이게 바로 절망이란 거야?

티렐리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넘쳐흐른다.
프로지움을 끊은 티렐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느꼈을까. 그것이 얼마만한 감동이었는지 내게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둔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선명하고 강렬한 감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신이 내리는 기적을 목격한 성자처럼, 티렐리의 표정은 순수한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미 그에게 더 이상 말은 필요없으리라.
위로도 애도도 지금의 그에게는 필요없다.
티렐리는 바라던 것을 손에 넣었다. 회한도 원통함도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축복을 담아 방아쇠를 당겼다.
.
.
.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그래도 서서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처음 열 발자국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그 다음부터는 큰 상처가 없는 오른팔과 왼쪽 다리만으로 기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이미 부상 정도를 살펴보는 것조차 귀찮았다.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해도, 내일 이후의 나날을 헤쳐나갈 만한 에너지가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멜빈 베르나도'로서 가지고 있던 모든 힘을, 나는 이 싸움에서 남김없이 소모해 버렸다.

출구로 보이는 문에 도달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행히도 자물쇠는 잠겨 있지 않았다. 체중을 실어 문을 밀자 차가운 바깥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낮도 밤도 아닌 어슴푸레한 하늘이 내 머릿속을 혼란시켰다.
마치 대기 자체가 희미한 빛을 머금은 듯한,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투명한 경치.
여명 ―― 이었다. 어느샌가 날이 밝고 있었다.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는 과정을, 나는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해가 떠오른다.
투명한 풍경이 잠에서 깨어나 네이더의 우중충한 색채를 서서히 되찾는다.
그것은 버림받은 세계, 그리고 잊혀진 세계였지만…….

거기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가냘픈 잡초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

부스러져 버린 주춧돌을 기나긴 세월의 흐름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삶을 받아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을 평등하게 비추는 햇살이 내게도 내리쬔다.
그래…… 나도 역시 살아있다. 영겁과도 같이 느껴졌던 죽음의 시간을 거쳐, 지금도 이렇게 살아있다.

기나긴 밤의 공포는 가셨다.
끝없는 절망의 환상은 끝났다.

웅크리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해도, 꺼림칙한 금기라고 해도…….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생명을 가진 하나의 존재로서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다는 실감.

나는 ―― 알아버렸다.
'살아간다'는 행위가 주는 기쁨을.
.
.
.
그 후, 빈사상태인 나를 정기순찰중이던 순찰대가 발견하여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티렐리의 시신에서 채취한 혈액에서는 프로지움이 검출되지 않았고, 내가 실종되었을 때의 허위보고 제출 등, 생존자인 내 증언이 없이도 상황증거만으로 티렐리의 유죄는 확정되었다.
집중병동의 침대에서 내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 이미 사흘이 지난 뒤였지만 ―― 티렐리의 죄상이 전부 서면으로 작성되어, 나는 처형집행자로서 문서 뒤에 사인을 하는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났다.

영광스러운 그라마톤 클레릭의 일원, 게다가 뛰어난 실력으로 이름높았던 수사관이 감정위반죄로 적발된 일은 테트라그라마톤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준 모양이다.
하지만 전치 3개월의 중상을 입은 내가 더욱 긴 재활훈련을 끝내고 간신히 현장에 복귀가 가능해졌을 무렵에는, 그 사건은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는 과거의 일이 되어 있었다.
옛 스승이자 둘도 없는 '듀오'의 파트너를 잃어버린 내게, 동료들은 저마다 위로하는 말을 전해주었다.
복귀하고 나서 내 검거율이 바닥을 기어도 이를 미심쩍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누구도 내가 프로지움 주사를 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실제로는 내 검거율은 완전히 제로 상태였다.
돌격대원과 함께 네이더로 나갈 때마다, 나는 단독행동을 가장하여 그늘에 숨어서는, 차례차례 처형당하는 레지스탕스의 비명을 들으며 겁에 질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근무태만 행위를 상층부에 들키지 않고 계속 숨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동료인 패트리지 수사관 덕분이었다.
그 또한 클레릭이면서 프로지움을 중단한 감정위반자이다.
허위 보고서로 검거율을 조작하는 방법은 전부 패트리지가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서류상 숫자만으로는 나도 아직 클레릭으로서 체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직을 속일 수는 있어도, 수사관 개개인의 눈까지 속이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패트리지의 신변도 점점 위험해지고 있다고 한다.
무리도 아니다. 패트리지의 파트너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존 프레스턴이니까.
감정위반자의 사고를 꿰뚫어볼 수 있다는 그의 곁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무사히 지내온 것이 오히려 기적에 가깝다.

리브리아에서 도망치라고 몇 번이나 설득했지만, 패트리지는 완고한 태도로 들으려 하지 않았다.
추측하건대 ―― 그는 대규모의 반란활동에 관여하고 있다.
단 한 번 '위르겐'이란 인물과 만나 본 적이 있는데, 내 직감이 맞다면 그 남자 역시 관계자일 것이다.
그들은 현 체제와의 싸움에서 대의를 찾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인지도 모른다.
그때 위르겐이라는 사내는 넌지시 내 속을 떠 보았지만, 나는 말을 흐린 채 대답을 미루고 있다.
그들 레지스탕스가 가슴에 품은 용기와 긍지는 내가 이미 잃어버리고 없는 것이다.

홀로 생각에 잠길 때마다, 나는 총을 손에 들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다시 한번 싸울 수 있을까? 지금의 내가 누군가와 생사를 걸고 다시 싸울 수 있을까?
이미 나는 이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조차 불가능한 게 아닌가?
지금도 귀에서 메아리치는 그 목소리가 ―― 티렐리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확실히 테트라그라마톤의 살육은 용인하기 힘든 것이지만…… 거기에 맞서 싸울 만한 패기가 지금의 내게는 남아있지 않다.
티렐리같은 괴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난 다음에는, 프로지움에 의한 억압이 전부 '악'이라고 단언할 자신도 없다.
나는 ―― 알아버렸다. 인간의 내부에는 절대로 풀어놓지 말아야 할 영역이 있다는 것을.

언젠가, 머지않아 나는 파멸한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내 몸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내가 삶을 얻은 대가이다.

그날 움켜쥔 원죄의 과실을, 나는 결코 손에서 놓지 못할 것이다.




역주1 : 먼로 효과(Munroe effect)
목표물에 대한 포탄의 관통력을 높이는 효과. '노이만 효과(Neumann effect)'라고도 한다. 1920년대, 효과적인 대전차화기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 도중에 미국과 독일의 학자들이 발견하였다.
포탄의 탄두에 작약을 충전하고 작약 앞부분에 공간을 두면, 목표물과 충돌했을 때 탄두에 충전된 작약이 폭발하면서 추진방향으로 강력한 폭파 에너지가 발생하여 관통력이 크게 증가한다. 이를 응용하면 같은 구경의 화기라도 더욱 두꺼운 장갑을 관통할 수 있으며, 장갑을 관통하고 남은 폭파 에너지는 장갑차 안의 탑승자를 살상한다. 현재 대전차화기인 106㎜ 무반동총이나 바주카포 등에 사용되는 거의 모든 철갑탄이 이 원리를 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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