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honic Rain ⓒ 2003, 2004, 2005 KOGADO STUDIO, INC.

번역문 작성 : CARPEDIEM(mine1215@lycos.co.kr)

게재 : C'z the day(http://mine1215.cafe24.com/)

들어가기 전에
-본 문서는 PC용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심포닉 레인』의 팬디스크인 『Digital Picture Collection Plus』에 수록된 외전 소설을 번역한 것입니다. 후일 발매된 『심포닉 레인 애장판』에도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소설은 게임 본편보다 약간 앞 시기, 또는 엔딩 이후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본편 스토리에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만약 게임을 플레이중이라면 반드시 모두 클리어한 다음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대본에 대한 권한은 작성자에게 있으며, 무단전재 및 링크는 금지합니다.




Symphonic Rain Original Novel
#01 - It begins to rain 『雨の始まり』


【1】
장난감 피아노에서는 음정이 맞지 않는 이상한 소리가 나고 있다.
조율도 아무것도 없는 낡고 작은 피아노였다. 하지만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건 토르타이다. 동생의 피아노 솜씨는 그 노래실력만큼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노래 반주용으로 배우기 시작했다는 내력을 생각해 보면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런 토르타의 피아노 소리가, 지금은 듣고 있기 괴로울 만큼 엉망이다.

-…알.

울음섞인 목소리로 토르타는 그렇게 속삭였다. 침대에서 약간 떨어진 장소, 내게는 딱 등을 보이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녀를 보고 있어야 할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 토르타가 울고 있는 이유, 그리고 크리스가 날 잊어버린 이유.

-…언니.

모든 일의 시작은 바로 그날…….


【2】
-알… 아리에타……!

크리스는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 뒤에서는 불타오르는 자동차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내리기 시작한 비가 크리스와 내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아리에타.

사람들이 모여들고, 누군가가 말을 걸었지만, 크리스는 거기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오직 내 이름만을 부르며 끊임없이 내 손과 등, 뺨을 떨리는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마 모여든 사람들 중에 누구도 알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하고 있는 크리스의 지금 심정은 가슴 아프리만치 잘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멀리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이 둔해지고, 놀라움이나 슬픔의 감정도 흐려지는 느낌. 마치 지금 상황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실제로도 기분 탓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크리스?

크리스처럼 이름을 불러 보지만, 거기에 대한 반응은 없었다. 되풀이해 그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에, '어째서 내 몸이 보이는 걸까'라든지 '왜 공중에 붕 뜬 느낌으로 이 광경을 보고 있을까'… 그런 당연한 의문도 점차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크리스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슬프다고 느끼는 최후의 감정뿐이었다.

이후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의식은 내 몸이 아닌, 크리스가 실려가는 구급차에 함께 올라타서는, 축 늘어져 눈을 감은 그의 곁에 있었다. 크리스의 손을, 어깨를, 뺨을 만지려고 해 보았지만, 지금 내게는 팔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 무렵에는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때 내가 간절히 바란 것은, '크리스가 슬퍼하지 않게 해 주세요'라는 오직 한 가지였다.


【3】
크리스는 지금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치료실인 듯한 곳으로 실려가 이것저것 검사를 받은 모양이지만, 특별히 큰 부상을 입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오른쪽 고막이 어떻다고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는데, 그것보다도 크리스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일단 안심이 되었다.
그 후로 나는, 내 몸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크리스 곁에서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병실문이 왈칵 열렸다.

-크리스!

토르타가 어머니·아버지, 크리스 부모님과 함께 병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여기가 병원이란 것도 잊어버렸는지, 누구보다도 먼저 크리스 곁으로 달려가 손을 꼬옥 잡았다.
그것은 내가 다른 무엇보다도 바라던, 그리고 자신의 존재조차도 명확하지 않은 지금 처지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치 가슴이 아파왔다.

-안정하고 있으면 괜찮다고 의사선생님도 그러셨잖니.

나무라는 빛은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크리스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토르타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지금 내가 제일 알고 싶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그럼 알은?

방금 전까지의 격한 감정은 수그러들었는지, 토르타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이번엔 우리 아버지가 대답했다.

-아직은 모르겠다는구나… 단지 머릴 심하게 부딪혀서….
-어디를?


고개를 갸웃하며 토르타는 다시 물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목소리였다.

-어딜 다쳤대요?
-…아직 치료실에 있다.
-그래서 어딜 다쳤냐니까요!
-토르타… 그걸 물어봐서 어쩌려고?


어머니가,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보러 갈 거야.

그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토르타는 대답한다. 방금 전 큰 소리로 외쳤을 때의 흥분은,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

-…아직 면회는 무리야. 넌 여기 있으렴.
-여기 있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잖아.


그리고 이번엔 내뱉듯이.
지금 토르타 안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하고 있어서, 그 중에 어느 것이 진실인가는 알 수 없었다.

-알한테 가 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치만! …그치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토르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그녀 안에 뒤섞인 감정 가운데 제일 강한 것이었음을, 나는 이해했다.


【4】
그 후로 이틀 정도가 지났을까.
내 몸이 병실로 실려가는 것을, 나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광경으로부터 도망치듯이 크리스의 병실로 가 있었다.

그래… 난 아직 거기에 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로. 그래도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뿐. 이야기를 나눌 수도, 누구를 만질 수도 없다.
크리스도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의식을 되찾더라도 틀림없이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곁을 지키며, 현실로부터 눈을 돌린 채 그곳에 있었다.

똑똑, 하고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소리의 주인이 토르타라는 것은 알고 있다. 조심스러운 노크소리도, 문이 열리기까지의 살짝 긴 시간도 어제와 똑같았다.

-크리스… 일어났어?

토르타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의 귀에 닿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토르타는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의 다음 행동은 어제와는 전혀 달랐다.

-그럼 알한테 다녀올게. 크리스도… 빨리 나아서 알 만나러 가야지.

어째서 토르타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토르타도 크리스를 좋아하고 있을 텐데. 내가 사라지면 둘이서 잘 될 수 있을 텐데.
그 의문이 명확한 실체로 떠오르기 전에, 나는 토르타의 뒤를 따라나섰다.
'212호실'이라고 적힌 병실 앞에서 토르타는 멈춰선다. 그리고는, 크리스의 병실문을 열 때보다도 더 긴 시간을 들여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알… 아리에타?

그 다음부터는 보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기가 세고 당당하던 토르타가 흐느껴 우는 모습은 보기 싫어. 나보다 아주 조금 늦게 태어났지만, 늘 조금씩 날 앞서가던 아이. 나보다 강하고, 언제 어디서나 힘이 되어 주던,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내 동생.

아아, 그렇구나. 나는 싱거우리만치 간단하게 이해해 버렸다. 크리스가 날 택한 것은 틀림없이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토르타는 무슨 일에든 재능이 뛰어나고 성품도 강했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 그래서 크리스는, 토르타한테는 자기가 필요없을 거라는 바보같은 착각을 하게 된 거겠지.
사실을 알게 되자, 그렇게도 고민했던 날들이 다 거짓말처럼 후련해졌다.

-…언니.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토르타가 날 '언니'라고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 날 그렇게 부르는 건 마음이 약해지거나, 무슨 일로 자기 편을 들어 주길 바랄 때 정도였다.
토르타의 내면에 있는 약한 모습을 아는 것은 오직 나 하나. 토르타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나에게만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언니.
몇 번이고 그 단어를 듣고 나서, 나는 '이제 됐어'라고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토르타는 틀림없이 지금보다도 더욱 슬퍼하겠지. 하지만 그 슬픔도 언젠가는 바람에 흩어져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필요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그저 아름다운 추억뿐.

동시에, '그렇게 돼도 괜찮아?'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려왔다. '좋아하는 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여기서 전부 다 잃어버려도 좋아?'라고.
그 갈등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고 나를 괴롭혔다.


【5】
다음날, 토르타는 장난감 피아노를 들고 내 병실을 찾았다. 크리스 병실에 있던 나는, 간단히 인사만 마치고 방을 나서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때의 난, 아마도 발을 써서 걸어다녔을 것이다. 그때까지 '자신의 몸'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던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나는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몸이 점차 형체를 되찾기 시작하면서, 그 크기나 형태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몸은 뭐지? 내가 왜 이런 모습이 된 거야?

…그때, 마치 흐느끼는 듯한 토르타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장난감 피아노가 음정이 안 맞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다. 토르타답지 않게 엉망진창인 음과 목소리. 듣고 있으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슬픈 음악.

-…알… 이제 그만 일어나… 이번엔 내가 치료해 줄 차례잖아.

어린 시절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감기로 앓아 누운 토르타 곁에서, 나는 저 피아노를 치며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그 노래를 지금은 토르타가 부르고 있다.
가락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입이 움직였다. 노래부르는 걸 좋아했지만, 내게는 노래의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노래 대신 다른 재주를 익혔는데… 그런데 지금, 입에서 자연스럽게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 노랫소리는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자신이 내놓은 음이, 마치 몸속을 타고 흐르듯이 반사되어 그 음의 일부가 되었다. 노래부르고 싶던 나 자신, 되고 싶다고 바라던 내 모습.
그때, 처음으로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보인 적은 없었는데.
내가 요정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 모습은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었다.
'파타'. 날지 못하는 어리석은 요정의 이름. 이것이 정말로 내가 바라던 모습일까?
아니, 의심할 수도 없다. 겉모양은 받아들인다고 해도, 지금의 이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내일… 또 올게.

토르타의 목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온몸을 뒤덮는다. 몸과 더불어 감정도 조금씩 회복이 된 모양이었다.
그와 더불어, 현실감이 없었던 고민이나 갈등도 점차 실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6】
그날 이후, 나는 크리스의 병실과 내 병실을 오가게 되었다. 크리스의 상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내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는 것도 부모님을 통해 듣고 말았다.
난 어떻게 되는 걸까?
토르타의 목소리에 대답해 주고 싶어서, 몇 번이고 내 몸으로 돌아가려 시도해 보았다. 정확한 방법은 몰랐지만, 내 몸을 만져 보거나, 간절히 기도해 보는 등,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법은 빠짐없이 다 해 보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요정의 몸인 채로, 지면보다 약간 위를 날며 주변 광경을 지켜보는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 으으….
-…크리스?


의식불명에 빠져 있던 크리스가 신음소리를 냈다. 즉시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그 목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 몸 상태에 대해 알고 나서 토르타에게 몇 번이고 말을 걸어 보았지만, 내 목소리를 알아차린 기색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크리스한테도 안 들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으음… 알…?

아직 제대로 뜨이지 않은 흐릿한 눈으로, 크리스가 이쪽을 보았다… 내 이름을 부르면서.
그 순간, 환희와 동시에 공포가 머릿속을 스쳐간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본다면 크리스는 뭐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그저 잠꼬대처럼 내 이름을 불렀을 뿐이라면 차라리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크리스의 시선은 똑바로 날 향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현실이 확실한 형태를 맺기 직전, 나는 그의 앞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크리스의 베개 위에서 뛰어내려 침대 밑 지면을 향해 활공. 그런 동작이 가능할 만큼은 지금의 몸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크리스 부모님이 병실로 들어오신다. 지금 내 위치는 두 분의 시야에 들어와 있지만, 역시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어째서 크리스와 다른 사람이 보이는 것에 차이가 나는지,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어도, '결국 난 그런 존재구나'라는 실감만큼은 싫을 정도로 확실하게 들었다.

-아… 크리스… 정신이 들었니?

크리스 어머니가 침대로 조심조심 다가가서 몸을 숙이셨다. 내 위치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크리스를 끌어안고 계시겠지.
나는 마음이 놓여, 크리스가 몸을 일으켜도 보이지 않을 침대 밑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조그만 몸이 되고 나서야 안 사실인데, 침대 밑은 의외로 넓고 먼지도 많았다. '정말로 크리스 눈을 피해서 도망다녀야 되나' 하고 자신의 행동에 미심쩍은 기분도 들었지만, 이어지는 크리스 아버님의 이야기를 듣고 잘못된 판단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크리스, 몸은 괜찮으냐?
-네? 으응… 괜찮은 것 같은데….


그리고 나서 잠시 후, 크리스가 말문을 이었다.

-귀가 아파… 근데….
-근데?
-내가 왜 여기 있죠?
-사고 당했잖니…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요… 사고? 내가?
-그, 그래….


그때, 크리스 아버님이 내 이름을 꺼내기를 망설이고 계신 것을 알았다. 어차피 크리스가 물어볼 것이 뻔했으니 별 소용은 없었지만. 그래도….

-사고… 정말로 내가 사고 당했어요?

크리스는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정말로 기억이 안 나?
-…응.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어.
-그, 그러니?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세 사람은 침묵에 잠겼다.

-……그럼 좀 더 자 두렴.

마치, 그걸로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고 믿는 듯한 목소리였다. 크리스가 그 말에 순순히 따랐는지, 내가 있는 침대 밑 공간에 침대 스프링이 삐걱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여보.
-네?! 네에.
-일단 밖으로 나갑시다….


두 쌍의 발이 느릿느릿 무겁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아직 크리스가 한 말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움직임이 멈추고, 발끝이 이쪽으로 돌아선다.

-…뭘 말이냐?
-좀 전에, 어머니 아버지 오시기 전에, 누군가 방에 없었어요?
-아니, 아무도 없었는데.
-그런가… 그럼 됐어요.


그리고 나서 두 분은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크리스가 나에 관헤 묻지 않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곧바로 '기억상실'이란 단어가 머리에 떠오른다. 그때의 내 기분을 어떤 말로 표현하면 좋을까. 안심과 허무가 뒤섞인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이대로 내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면 크리스에게는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잊혀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도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 읽은 소설에서, 날지 못하는 요정이 그렇게도 자신의 존재에 집착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더 이상 움직일 기운도 없이, 그냥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나의 존재가 흐릿해지고, 자신의 손바닥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 역시 내가 바라던 모습인가?
처음으로 이 병실에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형체가 없는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이따금 크리스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 그때마다 침대가 삐걱대는 소리를 의식 한켠으로 들으면서, 계속 이 세계를 떠돌고 있었다.


【7】
그날 밤, 그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나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난 크리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알', '아리에타'.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는 무의식중에 나온 것이 틀림없다. 설령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라 해도, 지금의 내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다음날 아침, 나와 크리스의 가족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크리스 병실에 모였다. 대화 첫머리에, 토르타는 크리스에게 나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크리스… 알 말인데….
-어? 오늘은 안 왔어?
-아, 그러니까… 그게 아니고….
-응?
-사고… 기억 안 나?
-아아… 어제 아버지도 그러시더만… 아무것도 기억 안 나. 정신이 들어 보니 침대에 누워 있고… 귀가 아프고.


나는 다시 요정의 몸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손바닥을 보자, 어제는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또렷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보다, 오늘 며칠이야? 이제 그만 피오바로 떠나야 하지 않아?

천진하게까지 들리는 밝은 목소리로 크리스가 물었다.

-…이미 출발 예정일에서 닷새 지났어. 크리스가 나흘이나 잠들어 있었으니까.
-그렇게 오래?


감정을 최대한 억누른 토르타의 차분한 설명에, 크리스는 놀란 듯이 목소리를 높인다. 토르타가 숨기려고 했던 사실을, 크리스는 아마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있는 누구나가 알 수 있는, 너무나도 간단한 사실을.

-……어쨌든 지금은 푹 쉬어.

토르타는, 어제 크리스 아버님의 말씀과 거의 동일한 의미가 담긴 말을 남기고는 병실을 나가려 하고 있었다. 크리스도 그 말대로 할 참인지, 또다시 침대가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크리스가 잊어버린 것은 사고 당시의 기억뿐. 그렇다면 차라리 잘 된 일이 아닐까?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정말로 날 잊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학원에 다니며 시간이 흐르면 그것도 가능할 것이다. 상처받는 일도 없이, 그저 멀리 떨어진 사람을 자연스럽게 잊어버리듯이….

……그것이 크리스에게 가장 좋다는 것은 알고 있다. 3년이란 시간 동안, 토르타와 지금까지 이상으로 친밀하게 지낸다면, 틀림없이 크리스는 토르타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던 일이며, 동시에 크리스가 제일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지만 그건… 싫어!

이때 처음으로, 나는 그 감정을 확실하게 인식했다. 내 안에 이런 격렬한 감정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지만.
크리스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가를 생각해 보면, 답은 명백하다.
앞으로도 나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나'라고 자각할 수 있는 존재가 여기에 있으니까. 게다가 온갖 방법을 써 보았지만, 나는 내 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이 아닌, 크리스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내가 물러나면 된다. 그렇게만 하면 크리스는 토르타와 행복해질 수 있어.
거기에 반론하는 목소리를, 나는 가슴속으로 꼬옥 묻어버렸다.


【8】
크리스가 퇴원한 뒤로, 나는 실체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가, 다시 요정의 몸으로 돌아오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크리스가 사고의 기억만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안 다음날, 토르타를 비롯한 가족들이 나눈 대화 내용을 모두 듣게 되었다.
그 판단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내가 꿈꾸던 크리스의 행복한 미래와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단지 그 행복이 내 행복과는 이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지만.

그 후로 나는 몇 번이고 생각해 보았다. '지금의 나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라는 것을.
자신의 불행을 탓할 필요는 없었다. 현재 주어진 이 모습… 이 운명의 의미만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자신의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였을 때, 그 대답이 나왔다.

난 크리스와 함께 있고 싶어.

이 짧은 생명에 주어진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크리스와 함께 보내고 싶었다. 그것이 거짓없는 내 본심. 크리스와 토르타가 학원으로 떠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계속 내 마음속에 꺼지지 않고 남아있던 소망.

나는 신께 감사드리며, 크리스의 온기가 남아있는 병실을 떠났다.


【9】
그리고 나서 나는, 불과 며칠 동안이지만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긴긴 여행을 하게 되었다.
작은 몸과 그에 맞는 작은 보폭. 죽어라 날개짓을 해도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는 없다. 평소에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나는 그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크리스가 저쪽에서 지내게 될 아파트 주소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미리 적은 첫 편지는 내 책상서랍에 살며시 넣어두었다. 내 마음이 담긴 그 편지가 크리스에게 닿을 일은 없겠지만, 이런 식으로나마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다.
피오바까지의 여정도 이미 머릿속에 다 넣어두었다. 나탈레, 그리고 새해, 일이 있을 때마다 크리스를 찾아가려고 몇 번씩 열차시간표를 들여다보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길을 가는 사람들 눈에는 내 모습이 안 보이는지, 가끔은 누군가의 다리에 매달리거나, 버스를 타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목적한 역에 닿을 때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덕분에 편수가 많지 않은 야간열차 시간대를 놓쳐서 다음날까지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그 동안에 모습을 감추고 의식만 있는 존재가 되는 방법도 익혔다.
처음에는 불편하게 느껴지던 요정의 몸도, 지내고 보니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가끔씩 '어쩌다가 이런 요정이 됐을까' 하고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결국 그 의문을 풀어줄 답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나는 '파타'라는 요정을 동경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그것뿐.

다음날, 나는 열차를 탔다. 머릿속에는 크리스와 토르타, 그리고 나 자신에 관한 생각뿐.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든지, 자신에 관해 어떻게 크리스에게 설명할까 등등. 3년 후, 크리스가 졸업하고 난 후의 일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긴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거리의 모습이 확 바뀌었다. 창가에 몸을 기대고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그 무렵, 난 이미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내가 되고 싶은 대로 되면 그걸로 충분해.
토르타가 치는 피아노에 맞춰 노래부르던 그때를, 나는 잊지 않았다. 크리스의 포르텔을 반주로 노래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늘 크리스 곁에 있으면서 노래를 부르고… 그런 행복한 미래를 그려보았다. 내게는 과분할 정도의 꿈. 그렇기에 그 시간에는 끝이 있다.

3년. 그렇게나 길게 느껴졌던 시간도, 이렇게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짧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같은 일이다.
나는 더 이상의 욕심은 버리고, 현실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게다가 크리스가 날 받아줄지도 어떨지도 아직 알 수 없다. 느닷없이 나타난 요정을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받아들여 줄 거라니, 그 또한 뻔뻔한 생각이 아닐까.
그렇지만… 크리스라면 그렇게 해 줄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10】
그리고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무런 문제 없이 바로'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크리스는 날 받아주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의 나는 이미 '아리에타'가 아니었다. 크리스가 지어준 멋진 이름과 함께, 내 존재는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다.
'포니'. 날지 못하는 요정. 그 이야기의 결말은, 내게는 결코 해피엔딩은 아니겠지.
그래도 크리스가 행복하게 지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처음으로 앙상블을 했다. 크리스의 포르텔 소리가 내 몸 안으로 녹아드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내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는 자신이 어떤 음을 내는지도 잘 몰랐을 것이다. 두 가지 음이 서로 녹아들어 섞이는 것을 나는 몸으로 느꼈다. 비유도 무엇도 아니라, 글자 그대로 '몸 전체'로.
그것은 너무나도 멋진 감각이었다.


【11】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싶은 그런 시간도,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바깥은 이미 어둡다. 크리스가 병에서 막 회복된 몸이라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우리는 앙상블에 열중해 있었나 보다.

-수고했어 크리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크리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응, 수고했어.

조금 피곤한 듯한 목소리에 살짝 불안을 느꼈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자 그 불안도 금세 사라졌다.


【12】
다음날 아침, 나는 계속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고 하늘이 파랗게 맑아오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보며, 어제 크리스가 한 말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거리에서는 구름밖에 안 보여. 계속 비가 내리거든. 1년 내내 안 그친다지?

-그래… 비를 모르는구나.


그때 크리스가 지었던 표정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슬픈 눈길. 문득 그 눈빛이 '그날'의 크리스와 겹쳐진다.
쏟아지는 비로부터 내 몸을 지키려는 듯, 크리스는 날 꼬옥 끌어안고는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차디찬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그것은 무의식중의 속죄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크리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의 전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크리스는 내게 말해주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라고.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