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honic Rain ⓒ 2003, 2004, 2005 KOGADO STUDIO, INC.

번역문 작성 : CARPEDIEM(mine1215@lycos.co.kr)

게재 : C'z the day(http://mine1215.cafe24.com/)

들어가기 전에
-본 문서는 PC용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심포닉 레인』의 팬디스크인 『Digital Picture Collection Plus』에 수록된 외전 소설을 번역한 것입니다. 후일 발매된 『심포닉 레인 애장판』에도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소설은 게임 본편보다 약간 앞 시기, 또는 엔딩 이후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본편 스토리에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만약 게임을 플레이중이라면 반드시 모두 클리어한 다음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대본에 대한 권한은 작성자에게 있으며, 무단전재 및 링크는 금지합니다.




Symphonic Rain Original Novel
#02 - A trick coin 『いかさまコイン』


【1】
그리운 바람이 불어왔다. 검게 그을린 벽과 좁은 골목길. 나는 차에서 내려, 이곳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뭘 하느냐? 이러고 있는 시간도 아깝다. 얼른 들어가서 준비해라.

'저한테는 소중한 곳이라서요'라는 말은 아버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제대로 포르텔 연주를 익히고 나서 1년에 한 번씩 맞이하게 된 시간. 내가 이때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는 이해 못 하실 거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난 언제라도 OK.

가뿐하게 대답하는 그녀를 돌아본다.
올해는 다른 때보다 조금 더 특별했다. 동경의 대상이기도 한 팔 선배와 함께 연주할 수 있다니,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아버지나, 여기까지 함께 와 준 선배에게는 정말 감사한다. 오랜만에 돌아왔다는 감상을 얼른 털어버리고, 어깨의 포르텔 케이스를 고쳐 메며 대답했다.

-저, 저도 준비됐어요.
-그럼 됐다.


날 돌아보지도 않고 먼저 고아원으로 들어가시는 아버지의 뒤를 서둘러 쫓아간다. 팔 선배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발길이 드문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줄에 널린 빨래들은 여기저기 얼룩이 남거나 실밥이 터져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리운 느낌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살짝 곰팡냄새가 나는 실내로 들어서자, 고아원의 어머니나 마찬가지인 아지로 원장님이 아버지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참이었다. 대화라곤 해도, 원장님의 일방적인 칭찬이나 감사말에 그냥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학원에서 올해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마자, 우리 세 사람은 각지의 고아원을 돌며 위문공연을 하고 있다.
'이름을 팔러 다니는 것'이라며 악의에 찬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란 사실을 난 안다. 설령 아버지가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해도, 우린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포르텔을 준비하는 내 모습을 살며시 엿보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이들의 눈동자는 기대와 선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전에는 나도 저런 눈을 하고, 아버지와 함께 찾아온 음악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저렇게 되고 싶다'고 절실히 바란 것은 아니다. 그저 아름다운 노랫소리와 포르텔이 엮어내는 음악이 좋았을 뿐.
'저렇게 노래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여러 번 있었다. 그 소망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쉽다고 여기는 건 너무 오만한 생각이 아닌가 싶다. 지금의 나는 아무런 부족함 없이, 여기서 지낼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으니까. 고아원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아쉽다거나 하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바람은 철모르는 꼬맹이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나한테는 포르텔을 연주할 수 있는 재능이 있으니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지.
그럴 생각이었다.
…문득, 내게 노래를 불러도 좋다고 말해주었던 그 사람을 떠올리고 말았다.

-리셀시아?

방 가운데 있던 커다란 책상은 다른 곳으로 치워지고, 나무의자들이 나란히 줄을 지어 놓여 있었다. 거기에 앉은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고, 옆에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팔 선배의 시선과도 마주쳤다.

-아… 죄송해요!
-후훗, 이제 그만 시작할까? 다들 기다리는 것 같으니까.


선배는 웃음을 지으며, 나한테만 들리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 말을 듣고 연주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앉은 의자 뒤쪽에서는,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은 아버지가 수상쩍다는 눈길로 이쪽을 보고 계셨다. 아마도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포르텔 세팅까지 전부 마쳤나 보다. 그런 일련의 동작들도 이젠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 그럼 시작합니다.

이쪽을 향해 쏟아지는 무수한 시선으로부터 눈길을 돌리고는, 팔 선배와 마주본다. 이렇게 둘이서 협주를 하는 것은, 학원이 끝나고 아버지 서재로 불려갔을 때가 처음이었다. 그로부터 겨우 사흘 동안이었지만, 시간을 들여 몇 번이고 연습을 했기 때문에 타이밍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와 시선을 맞추고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다. 건반에 손을 얹고 조용히 연주를 시작했다.
뒤이어 선배의 목소리가 건반음과 겹쳐져 아름다운 선율을 그리기 시작한다. 맑고 투명한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질 때, 살짝 아이들의 얼굴을 훔쳐보고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그와 동시에, '왜 나는 노래를 부르지 못할까' 하고, 아주 약간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한없이 여리고 부드러운 크리스 선배의 포르텔 소리였다.


【2】
모든 연주가 끝난 후, 건반에서 손을 떼고 한숨을 돌린다. 직접 노래를 부르진 못했지만, 이렇게 팔 선배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로 기분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들고 그녀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커다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아이들은 우리의 연주를 듣고서 눈을 반짝이고 있다. 그 뒤에는 웃음짓고 있는 아지로 원장님. 아버지도 평소와 같이 무뚝뚝한 모습이긴 했지만, 입 끝을 살짝 치켜올리며 희미하게 미소짓는 것처럼 보였다. 저런 표정은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데, 오늘 연주가 꽤나 마음에 드신 걸까.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내가 연주를 잘한 덕분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옆에서 노래를 부른 선배의 목소리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왜냐면 나는… 평소처럼 마음을 비운 연주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을 뿐이니까.

원장님, 그리고 예전의 나와 같은 처지인 아이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은 후, 나는 홀로 방에 앉아있었다.
전등이 있긴 하지만, 여기서는 밤에 촛불을 켜고 지내는 게 보통이다. 이따금씩 일렁이는 불빛을 등으로 받으며, 무릎보다도 낮은 2층침대의 아랫단에 있는 딱딱한 쿠션에 걸터앉은 채,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늘은 아무도 침대 윗자리를 쓰지 않는다. 이 방은 원장님이 날 위해 준비하신 최고의 접대인사였다.
어젯밤은 아버지, 팔 선배와 같은 호텔에 묵었지만, 여기가 내 고향이라는 점도 있고 해서 오늘은 특별히 여기서 하루를 보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선배도 지금은 옆방에서 쉬고 있다.
정성이 담긴 요리, 고아원 시절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과의 대화. 그립고도 즐거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만 마음의 끈이 풀어져 버렸다.
올해부터 다니게 된 피오바 음악학원, 그리고 포르텔에 관해서. 매년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는 느낌도 들지만, 그때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 마냥 거절할 수도 없게 된다.
한 마디로 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간에.
이곳 아이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그래서 동경한다. 내가 손에 넣은 꿈같은 생활을.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았더라도 여전히 그런 삶을 바랄 것이다. 내가 품고 있는 사소한 불만 따위는 코웃음치고 넘어갈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무심코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황급히 멈추고 말았다. 그런 복에 겨운 소리가 어딨어. '그래도 노래가 부르고 싶었는데'라니.
그 시절의 나는, 그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반주도 합창도 없이 혼자서 노래부르는 것도 좋아하긴 했지만, 아지로 원장님의 피아노에 맞춰 노래부르는 게 제일 좋았다. 누군가와 이어져 있는 듯한 기분이,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졸랐지만, 아직 어리다며 만지지도 못하게 하셨지.
그러다가 방 한구석에 놓인 포르텔이 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만약 그때 포르텔을 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몸집이 좀 더 커서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마을에서 어딘가 작은 가게의 점원이라도 하고 있었겠지.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누군가 -어쩌면 아버지였을지도- 유명한 귀족이 기부한 낡아빠진 포르텔. 조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그렇다고 누구나 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장식품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악기. 나는 피아노로부터 시선을 돌려, 아무 생각 없이 그 마법악기에 손을 댔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고아원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음정이 맞지 않는 김빠진 소리가, 무심결에 웃음이 나올 것만 같은 빈약한 소리가 악기로부터 흘러나온 순간, 나는, 그리고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많은 귀족들이 지금의 우리들처럼 고아원을 돌며 위문공연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각지에 고아원이 워낙 많았기에 몇 년, 혹은 몇십 년에 한 번이라도 찾아온다면 행운이라고 할 정도였는데.
그 해 갑자기, 아버지가 이곳을 찾아오셨다.
그 다음부터 벌어진 일들은 너무나도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 느낌이어서, 다시 생각해내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체자리니 가문에 입양이 결정되자 주위에서 선망의 눈길이 쏟아졌다. '거절'이란 선택지는, 적어도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확신에 찬 말투로 내 행복을 예언했다. 나는 자신의 의사를 확인할 시간도 없이, 마치 높은 곳에서 물이 흘러내리듯이 지금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일에 대해,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할 수가 없다. 나는….

-…난 행복해.

누구나 그렇게 말했다.

그 혼잣말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고 허공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촛불을 끄고, 조용히 일어서서 살며시 방을 나왔다. 발소리를 죽이고 불꺼진 복도를 빠져나와 목적지로 향한다. 아이들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낡아서 삐걱거리는 나무복도를 지나자,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거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 그 악기는 지금도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처음 봤을 때와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그 위에 말끔히 덮개가 씌워져 있다는 것.
내가 고아원을 떠났다가 처음으로 돌아와 연주를 했던 그날, 원장님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이 포르텔은 희망'이라고. 각자의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이곳으로 오게 된 아이들의 희망.
이 고아원에서 내 이름이 잊혀지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분에 넘치는 행복을 손에 넣은 여자아이. 이 악기를 연주할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과 더불어서.
나는 살며시 포르텔 덮개를 벗기고 건반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모든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거라고, 새삼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아직 잠 안 잤어?
-?! 아… 선배.
-한밤중에 쳤다가 혼나는 거 아니야?
-그게… 진짜로 치려던 건 아니었어요.


얼른 손가락을 떼고 그녀를 향해 돌아선다.

-그랬구나.

한밤중에 포르텔을 꺼낸 이유를 물어보지도 않은 채, 팔 선배는 그저 미소짓고 있었다.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머릿속으로 적당한 말을 찾는다. 그러고 보니 선배가 여기서 묵겠다고 한 이유도 아직 듣지 않았다.

-선배는… 어째서?
-응? 그냥 잠이 안 와서. 물이라도 한잔 마실까 하고 나와 봤더니 뒷모습이 보이잖아.
-그, 그래요?
-리셀시아도 잠이 안 와?
-…네에.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덮개를 다시 씌우려고 집어들었을 때, 선배가 말리려는 듯이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조금 쳐 볼래?
-그치만 시간이….
-작은 소리로 하면 괜찮아. 다들 지쳐서 잠들었으니까.


그저 동경의 눈길을 받고만 있을 뿐인 나와 달리, 팔 선배는 고아원 아이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처음에는 다들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었지만, 선배의 미소에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것만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곁으로 모여들고, 늦은 시간까지 모두와 함께 어울리는 그녀의 모습이 내 눈에는 너무나도 눈부시게 비쳤다.
선배는 나랑은 달라. 아니, 내가 선배와 너무 다르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것도 나쁜 의미로.

-자장가라도 안 될까?

분위기가 어색해질 정도로 긴 침묵에, 팔 선배가 약간 곤란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뇨. 그런 게….
-그럼 조금만 쳐 줘. 나도 작게 부를 테니까.


장난꾸러기처럼 살짝 웃으며, 선배는 내게서 뺏어든 포르텔 덮개를 곱게 접었다. '선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하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이대로는 영 잠이 안 와서.

그렇게 말하고, 무대에서 노래할 때와는 달리 편안한 자세로 책상에 걸터앉았다. 나는 그것을 신호삼아, 소리를 낮추어 조심조심 포르텔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창문으로 비쳐들어온 흐릿한 달빛을 받아,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모습이 도드라졌다. 환상적인 조명을 받으며, 팔 선배는 눈을 감고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눈을 감는다.
조촐한 음악회는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그녀를 부럽다고 느끼던 얄팍한 생각도,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행복감 앞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저 이 시간이 즐겁고,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있고 싶다는 충동마저 들었다.
그러나 마지막은 반드시 찾아온다. 행복한 시간이든, 그렇지 않은 시간이든.

-…후아, 기분좋다.
-수, 수고하셨어요.
-응, 수고했어.


내가 알고 있는 자장가 몇 곡이 끝나고, 둘이서 잠시 여운에 취해 있을 때, 팔 선배가 뭔가 생각난 것처럼 무심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포르텔 소리는 어제랑은 조금 다른 것 같아.
-네?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 이요?


선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을 기다렸다. 이 사람이 내 연주를 듣고 무언가를 느꼈다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짚이는 것은, 이곳이 내가 태어난 장소라는 사실과, 그로 인해 가슴속에 떠오른 크리스 선배 말고는 없었다.
그날, 나는 크리스 선배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젠 오지 말아 주세요'라고 차가운 말을 던졌고, 그 약속은 지켜졌다.
내가 거기서 계속 노래를 불렀다면, 선배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사실은 크리스 선배가 찾아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날 신경써 주지 않을까?'라든가, 그런 약삭빠른 계산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었기에 나는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내 마음대로 노래할 수 있는 찰나의 순간, 그것은 확실히 행복한 시간이었다.

-역시 뭔가 있었구나?

노랫소리처럼 부드러운 팔 선배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린다.

-혹시 여기서 태어났어?
-…네. 알고 계셨어요?
-아니, 지금 알았어. 우리가 공연을 다니는 고아원 중에 리셀시아가 살던 곳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래서 어제랑 소리가 다른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일부러 거짓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크리스 선배를 억지로 마음속에서 몰아냈다.

-그럼 내일은 내 차례인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팔 선배는 작게 말했다. 그녀가 태어나 자란 장소… 내일 찾아갈 고아원이 되겠지.

-내일은 오늘보다 더 열심히 불러야지….

혼잣말처럼 그렇게 이야기하고, 선배는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이 사람도 '희망'이구나. 나랑은… 말하기도 남부끄러운 '재능'이라는 행운 덕분에 지금 여기에 있는 나와는 다른, '진정한 희망'.
거기에는, 내가 간절히 바라는 이상에 꼭 들어맞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날, '오지 말아 주세요'는 거절의 말을 듣고도 날 찾아와 준 다정한 사람. 정말정말 좋아하는,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언젠가 되고 싶었던 또다른 나.


【3】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 리셀시아 체자리니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선망의 빛을 알아채고, 나는 만족감과 동시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래?
-아, 아뇨… 아무것도 아녜요.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잘까요?
-그럴까.


작아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내가 시샘해 마지않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귀족에게 입양되어 유복한 삶을 살고 있는 소녀. 리셀시아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렇게 그녀와 같은 자리에 서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을 아깝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단지, 만약 내게 포르텔의 재능이 있어서, 그녀처럼 귀족에게 거두어졌더라면… 내가 바라던 이상형에 훨씬 더 가까이 와 있었을 것이다. 모든 시간을 나 자신만을 위해 투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셀시아는, '내가 되고 싶었던 또 한 사람의 나'라고 할 수 있었다.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여기서 한번, 그녀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려 본다.
오늘 연주만큼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크리스 베르틴을 떠올리게 만드는 듯한 음색. 듣고 있노라면 연주자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나탈레 후에 처음 협주를 해 보았을 때는 그런 인상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뭐가 다른 거지? 이유를 알 수 있다면, 혹시 나도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무언가를 메울 수 있을까?
그 점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 볼 가치는 있을 것 같다. 오늘은 깊이 사정을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내일인가….

추억에 지나치게 이끌리고 있다는 건 나 자신도 잘 안다.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장소라도, 딱 하루만 참고 견디면 되는 것을. 이번 위문공연은 틀림없이 내게 적지않은 이득이 될 것이다.
나는 기분을 가다듬고,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세면대 거울을 보며 다짐했다.

-…똑바로 잘 하는 거야.


【4】
리셀시아네 고아원에서 아침을 먹고, 마중하러 온 그라베의 차에 올라타서 한 시간 정도 달렸을까.
나는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풍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꺼낸 악보를 들여다보는 척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런 식으로 외면하고 있어도, 언젠가 마주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팔 선배, 이제 거의 다 왔나 봐요.

내가 어서 빨리 고아원에 도착하길 바랄 거라 생각했을까. 리셀시아가 미소지으며 말을 걸었다.
일순간, 적당한 표정을 꾸며내지 못했다. 내 얼굴을 보더니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평소같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실수를, 하필이면 이런 데서 저지르다니.

-…그래? 고마워.

간신히 그렇게 대답하자, 리셀시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방금 전 얼굴은 긴장한 탓이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반쯤은 그랬기도 하고.

-그럼 가 볼까.

차가 멈춤과 동시에 그라베가 재촉을 한다. 나는 최대한 무표정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앞서 차에서 내린 리셀시아가 다가와서 작게 속삭였다.

-먼저 들어가세요.

신경을 써 주겠다는 건지, 그녀는 또다시 그 짜증나는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덕분에 조금은 기분이 풀렸다. 한순간에 감정이 북받치고 나니 바로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고마워.

그렇게 대답하고, 그리우면서도 동시에 혐오스러운 고아원 정문으로 들어섰다. 눈에 띄는 것은 지저분한 벽과 내걸린 빨래들. 코를 찌르는 곰팡이와 땀내.
나는 살짝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눈을 뜬 다음 순간에는,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왔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복도 저편을 보자, 기억에 남아있는 낡아빠진 책상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는 옛날 내 보호자의 얼굴이 보였다. 손님이 온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손을 멈추고 이쪽을 보았다. 그리고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와서, 포옹이라도 하려는 듯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오렴 팔. 편지는 잘 읽었어요. 정말 고맙구나.
-…오랜만에 뵙네요. 모데스토 원장님.


나는 감정을 억누른 웃음을 지으며 포옹을 받고는, 따뜻한 목소리를 건네며 등을 살짝 토닥였다. 그녀도 내 등을 몇 번인가 토닥거리고는, 살짝 몸을 빼고 시선을 내게 맞춘다.

-예전처럼 '엄마'라고 불러 줘도 되는데.
-이젠 어린애가 아니잖아요.


최대한 농담처럼 보이도록 대답한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조금 더 거리를 두고,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눈길을 던진다. 그 동작이 만족스러웠는지, 원장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안녕하세요….

내 뒤에 있던 리셀시아가 쭈뼛쭈뼛 인사말을 건넨다. 지저분한 고아원 모습을 보고 놀란 거겠지. 여기에 비하면 그녀가 지내던 곳은 차라리 천국처럼 보일런지도 모르겠다. 이 고아원은 부자들이 취미삼아 경영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어머나? 귀여운 파트너가 함께 있네?
-아… 네에.
-리셀시아도 참, 자기가 '네'라고 하네.
-아… 우웅… 아뇨.
-후훗, 실제로도 그러면서.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분위기에서, 나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을 무시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 있는 아이들의 수많은 눈동자가 날 바라보고 있다. 동경? 그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추악한 시샘의 눈길이 더 많겠지. 실제로 나는, 단 한 번 이곳을 찾아온 악단 사람들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본 적이 있으니까.
어제 묵었던 고아원이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꼬박꼬박 세 끼 식사가 나오고, 추위를 막아줄 따스한 모포도 모두에게 빠짐없이 돌아간다. 겨우 그뿐이지만, 여기 있는 아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들이다.
나는 그것이 싫어서 고아원을 도망쳐나온 적도 있다.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러 모은 돈으로 연명한 적도.

-…저기….
-…?


갑자기 내 옷자락을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언니는 여기 있다가 학원 갔어?
-…응.
-굉장하다!


소박한 질문이었다. 여덟 살 정도 됐을까? 비쩍 야위고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왜… 어째서 그렇게 웃을 수 있지? 어떻게 그런 눈으로 날 볼 수 있는 거야?
그것은, 내가 무엇보다도 보고 싶지 않았던 순수한 동경의 눈빛이었다.
미워하란 말이야. 널 그런 지경으로 몰아넣은 이 세상을.
한껏 질투해 봐. 너보다 행복하고 부유한 녀석들을.

나는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왔다. 언제나 위를 바라보고, 끊임없이 노력해서….
그렇기에 난, 이 꼬마에게 당당히 말할 권리가 있다.

-너도 될 수 있단다. 열심히 열심히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같은 고아들은, 정말 죽을 각오로 애를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선배.

리셀시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그녀는 내 말의 참뜻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방금 그 말처럼 아름다운 현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는 됐다. 그만하고 어서 준비해라.

무뚝뚝한 그 목소리가 지금은 오히려 고마웠다. 나는 바로 대답하고, 그 아이에게서 등을 돌린 채 준비를 시작한다.
그라베는 미리 준비한 의자에도 앉지 않고, 벽에 등을 기대지도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이 고아원에 있는 어떤 물건도 그에겐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태도에 혐오감마저 느껴지지만, 내가 목표로 하는 장소는 결국 그런 곳이다.
리셀시아는 방금 전 삼류연극의 여운에서 아직 덜 깼는지, 연주 준비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힐끔힐끔 날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방금 전 아이의 그것과 겹쳐진다. 어째서 이자들은 날 이렇게까지 불쾌하게 만드는 걸까.

-그럼 시작할까?
-네, 네엣!


나는, 되도록이면 의자에 앉은 아이들 쪽을 보지 않으려고 리셀시아만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포르텔이 아름다운 음색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5】
-정말로 그냥 가려고?
-…마음 써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아이들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싫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면, 나에 대한 원장의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바보짓을 하루에 두 번씩 하고 싶지는 않았다. 꾸며낼 수 있는 최대한의 슬픔과 애정을 담은 얼굴로, 나는 그녀의 권유를 거절했다.
여기서 내가 묵게 되면 아이들 식사가 그만큼 줄어드니까. 이런 곳에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게 결코 아니다.
나는 그런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연기하며, 마지막으로 그녀의 포옹만은 거부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그라베는 이미 자동차에 타고 있었다. 리셀시아는 날 기다렸는지 차문 앞에 서 있었다.

발길을 서두르며, 그러면서도 몇 번씩 뒤돌아보는 동작을 잊지 않고, 나는 차로 향했다. 뒤에서 다시 말을 걸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채.

-언니….
-…응? 너는?
-오늘 여기서 안 자고 가?


아까 말을 걸었던 순진하고 어리석은 그 아이가, 다시 내 옷자락을 붙들고 있다. 당장 뿌리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간신히 참아넘겼다. 어떤 달콤한 말로 그 손을 떼어놓을까 궁리하고 있을 때, 다시 자동차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여기서 한가하게 있을 시간 없다. 옛 정이란 것도 있으니 그냥 하루 지내거라. 내일 차를 보내주마.

그라베는 그 말을 남기고 창문을 닫았다. 그대로 차가 떠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얼마 안 가서 다시 멈춘다. 마음이 바뀌었나 싶어서 뒤쫓아가려다가, 꼬마가 아직도 날 붙들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발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리셀시아를 남긴 채.

-저….

내게로 달려온 리셀시아는, 강아지처럼 숨을 헐떡이면서도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도 여기서 묵을게요.
-…그래?


눈길을 돌리자, 아이도 날 보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느 쪽을 봐도 불쾌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어느샌가 모데스토 원장까지 다가와서는 날 포위하듯이 서 있다. 나는 땅바닥을 쳐다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팔, 오늘만큼은 아무 신경 안 써도 돼요. 성대하게 환영해 주진 못하겠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네가 여기 아이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개숙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원장은 환한 얼굴로 몇 번이고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감사의 말을 입 밖으로 짜냈다.

-감사… 합니다….


【6】
그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최악이었다. 웃는 얼굴은 내게 가장 익숙한 가면이었기에, 그 정도 일로 쉽게 벗겨지진 않는다. 하지만 그만큼 피로도 평소보다 더했다.
고문과도 같은 환영행사로부터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밤도 늦은 시각이었다. 나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눈을 감는다.
싸구려 침대. 시트는 마지막으로 빤 것이 언제였는지도 모를 만큼 지독한 냄새가 났다. 모든 것이 불쾌하게 느껴져서,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팔 선배?

그 부름에 대답하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왜?
-주무실 거면 그 전에 옷을 갈아입는 게….
-…알고 있어.
-그, 그러면 괜찮지만….


오늘은 이 좁아터진 방에서 둘이 자야 한다. 고아원에서 제일 넓은 방이긴 했지만, 커다란 아동용 2층침대가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는 갑갑한 방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선배….
-응?
-아직 안 주무실 건가요?


옷도 아직 안 갈아입은 걸 보고, 리셀시아는 그렇게 착각을 했나 보다. 사실은 그냥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을 지경인데.

-…왜?
-그냥 잠시… 얘기라도 했으면 싶어서.


거절할까도 생각했지만, 어제 그 일도 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리셀시아는 작은 책상과 세트인 조그마한 의자에 자리를 잡는다. 책상 위에 놓인 촛불이 일렁이며 그녀의 옆모습을 비추었다.

-죄송해요. 멋대로 아래 침대를 써서.
-아니. 난 위쪽 침대가 좋거든.


리셀시아는 수줍은 듯 미소를 떠올리고 있다. 뭐가 그렇게 즐겁다고.

-그런데, 얘기라니?
-…그게… 그러니까… 오늘은 수고 많으셨어요.
-응? 아아, 같이 고생했으면서 뭐. 그리고 오늘은 고마워. 일부러 여기서 묵어 준다고 아이들도 기뻐했어.
-아뇨… 제가 뭘.


여기 남은 이유는 날 도와주고 싶어서라든가, 대충 그런 거겠지.

-…그래서, 얘기하려던 게 있는데, 그게….
-응.
-아까 선배 노래, 훌륭했어요. 저같은 애가 말하기엔 뭐하지만… 오늘 노래는 정말로 멋졌어요.
-그래? 고마워.


솔직히 말하면, 오늘 여기서 내가 노래를 불렀는지조차 제대로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1초라도 빨리 여길 나가고 싶다고, 그런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순진한 눈빛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리셀시아가 있는 쪽만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포르텔, 조금만 쳐 줄래?
-자장가요?


어제 일도 있어서인지, 리셀시아는 알겠다는 듯 씨익 웃으며 포르텔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즐거워 보이는 그 모습을 보며, '다른 인간들도 얘처럼 다루기 편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준비 다 됐어요.
-그럼 아무거나 적당히 쳐 줘. 거기에 맞춰 부를게.
-네.


리셀시아가 작은 소리로 포르텔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제 들었던 음색과는 또 달랐지만… 어쩐지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크리스 베르틴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던 어제의 음은, 지금은 흔적도 없다. 그럼… 왜?
나는 반주에 맞춰 노래부르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저 귀를 기울이며 온몸으로 포르텔의 음을 느끼고 있었다.
곡이 끝나자, 리셀시아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뭐가 잘못됐나요?
-……아니.
-어딘가 이상했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조금만 더 계속해 줄래?
-네… 네에.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 포르텔 소리는 날 위한 것이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른 어느 누구도, 리셀시아 자신도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날 향해서, 그녀는 계속 포르텔을 연주하고 있다.
'다루기 편하다'는 노골적인 감상 말고, 이번에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편안했다. 크리스 베르틴의 포르텔을 처음 들었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과도 또 다른 분위기였다.
아시노의 말을 빌자면, 크리스의 음은 '모든 것이 용서받는 듯한' 느낌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 자신의 말로 리셀시아의 음을 표현하자면, '모든 것을 받아들여 주는 듯한' 그런 음이었다.

-그거, 습관인가요?

어느샌가 포르텔 소리가 멎고, 리셀시아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고 놀랐지만, 질문의 내용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그… 가슴에 있는 펜던트… 만지작거리는 거.


한 마디도 노래를 부르지 않는 날 보며 의문이 들었을 텐데, 리셀시아는 그것을 말하는 대신에 관계없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가슴으로 시선을 옮기자, 내 손은 펜던트를 만지고 있었다. 낡고 오래되어 표면은 손때로 더러워지고, 새겨진 무늬도 다 닳아 거의 분간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럴지도.

지금껏 의식한 적은 없었지만, 손바닥에 남은 그 감촉은 너무나도 친숙했다. 마치 잊어버리고 있던 공기의 존재를 재확인하듯이, 다시 펜던트를 쓰다듬어 본다.
이 펜던트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은 이걸로 두 명째. 첫번째는 아시노 알티에레였던가.

-하지만 그 더럽혀진 날개는, 널 닮아서 너무나도 아름다워.

그의 마음은 그 미사여구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 말솜씨를 이용해 먹고 살 수 있다면 나름대로 이용가치는 있었겠지만, 결국은 귀족의 자식. 재능도 없는 포르텔 따위는 때려치고, 꿈이라던 시인이나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정도 결단력도 없는 인간한테는 관심 없다.

-오늘은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그게… 많이 힘들어 보여서.


그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답이었지만, 리셀시아는 내 진심을 알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 선배한테 힘이 되고 싶어요.


조금 전의 포르텔 소리가 그녀의 진짜 실력이라면, 이용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입양이라고는 해도 그자가 부친이라는 사실 또한 가벼이 넘길 수 없다.
한때는 주위로부터 고립시키고, 내게 의존하도록 만들어서 손에 넣으려 한 적도 있다.
크리스 베르틴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언젠가는 이런 전개가 되었을 것이다. 그를 손에 넣지 못한 건 지금도 아쉽지만, 처음 계획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리셀시아.
-네.
-조금 전에 이 펜던트를 보고 물어봤지?
-…네에.
-이 펜던트는 나한테 정말 소중한 거야.


리셀시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이 고아원 앞에 버려졌을 때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물건. 단 하나, 내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것.

그녀가 그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면서, 나는 가슴에서 펜던트를 살며시 빼냈다. 가죽끈을 풀고, 두 날개 중에 한쪽을 손 위에 얹었다.

-끈이나 비슷한 거 없을까?
-끈이요? 어디….


몇 번이고 품을 뒤져 주머니에 손을 넣어 봤지만, 찾는 물건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리셀시아가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녀의 머리카락에 시선을 주었다. 리셀시아는 금세 알아차리고는, 머리를 묶고 있던 가느다란 리본을 풀어서 나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들고, 거무스름하게 빛바랜 은빛 날개를 끈에 꿰었다.

-이걸… 너한테 줄게.
-…선배…!


촛불의 흐릿한 빛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을 붉히며, 리셀시아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목을 향해 살며시 손을 내밀자, 그녀는 눈을 감고 내게 살짝 다가섰다. 그리고는… 속삭였다.

-저… 지금까지 계속 선배를 동경했어요. 선배처럼 되고 싶다고, 내가 정말로 되고 싶었던 이상형이라고.

…아주 잠깐 동안, 진심으로 이 계집애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되고 싶었다고? 포르텔을 칠 수 있고, 귀족한테 입양돼서 편안하게 살고 있는 너같은 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 고아원에서 사흘만 지내 보면 그런 환상 따위 산산조각날 걸.

그 순간, 내 옷자락을 잡아끌던 멍청한 꼬맹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 추레한 꼬마가 어떻게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거야? 꿈도 희망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나날의 힘든 노동과,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형편없는 식사. 돌아올 곳이라곤 이 지저분한 침대밖에 없는데.

-…팔 선배?

리셀시아가 눈을 뜨고 코앞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에 놓인 내 두 손은, 언제라도 그 가녀린 목을 조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손에 힘을 주기만 하면 아주 간단히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짓을 저지를 만큼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런 거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 목이 참 예쁘구나.
-그, 그런가요?


리셀시아는 볼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숙였다. 아무 고생도 모르고 행복하게 자란 증거인, 순진무구한 웃음을 떠올리면서.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추악한 인간인가.
후회는 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때가 온다면, 나는 지금까지 이용한 사람들, 배반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머리숙여 용서를 빌어야만 한다. 그런 건 죽어도 싫어.

-너한테 줄게. 소중히 간직해 줘.
-네… 네엣!


그녀는 마치 날 감싸안듯이, 가슴에 매달린 펜던트를 꼬옥 쥔 채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만 자자. 피곤하지?

일부러 조금 전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나는 그렇게 말했다.


【7】
다음날… 이라고는 해도, 해가 뜨자마자 금세 눈이 떠져서, 나는 잠시 산책이라도 해 볼까 하고 생각했다. 이 시간에는 아이들도 아직 안 일어났을 테니까.
옷을 갈아입고,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돌이 깔린 뒷길은 아침이슬에 촉촉히 젖어 있었다. 예전에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옆으로 갈라지는 가는 길섶에 쌓인 나무상자 위에 놓인 작은 동전이 눈에 들어왔다.
이 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놀랄 만큼 선명하게 머릿속을 스쳐갔다. 예전엔 나도 이곳에서 길가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곤 했다.
나무상자 위에 놓인 장난감 동전을 집어든다. 속임수용으로 만들어졌는지, 동전 두 닢은 하나는 양쪽 모두 앞면, 하나는 양쪽 모두 뒷면이었다.
두 가지 동전을 손에 쥐고 상대방이 앞이나 뒤를 고르도록 한 다음, 들키지 않도록 자신이 원하는 쪽을 하늘로 던진다. 어린 시절에 그런 장난을 하고 놀았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어젯밤 리셀시아는 '나처럼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지금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만큼 냉정을 되찾고 있다. 그런 식으로 모두를 받아들여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하지만 나는 나다. 그리고 리셀시아도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뚜렷이 갈라진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에게 이끌렸다.
그래도….

손에 들고 있던 동전 하나를 하늘로 던지고, 떨어지는 동전을 손등으로 받아서는 다른 손으로 그 위를 덮었다. 결과는 뻔히 알고 있었지만, 나는 확인을 위해 손을 치웠다.
앞. 뒤집어 보아도 변함없이 앞면이었다.
'이런 사기꾼같은 짓도 나름대로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선배, 여기 계셨어요?

뒤를 돌아보자, 얼굴이 빨개진 채 리셀시아가 서 있었다.

-잘 잤어? 일찍 일어났네.
-선배야말로.


강아지처럼 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젓는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새로운 리본으로 평소처럼 단정히 묶여 있었다.

-리셀시아, 잠깐만.
-네?
-어젯밤에 한 얘기랑 그 마음,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
-네에?
-날 위해서 무언가 해 준다고… 잊어버렸어?
-아, 아뇨! 똑똑히 기억해요!


곧바로 내 말을 부정하면서, 리셀시아는 가슴에 걸린 펜던트를 자랑스러운 듯이 내게 보여주었다.

-그럼 내기해 볼까?
-네?? …내기를?


손에 있는 동전을 그녀에게 보여주며 이야기를 계속한다.

-이쪽이 앞면. 위로 던져서 내가 받으면 앞뒤를 맞혀 봐. 제대로 맞았다면 우리 둘은 함께 잘 할 수 있을 거야.
-……선배.
-이건 내기야. 자, 앞인가 뒤인가 골라 봐.
-그래도… 만약에….
-리세.


작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결심을 한 듯이 확실히 대답했다.

-그럼 앞면으로….

나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동전을 위로 던졌다. 그리고는 손등으로 받은 다음, 리셀시아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녀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진지한 표정으로 동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다.

-…결과는….

덮고 있던 손을 거두고, 그녀의 얼굴 앞으로 팔을 가져간다.

-리세가 이겼네.
-아아…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리셀시아를 뒤로 하고, 나는 돌아가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만 돌아가자.
-앗, 잠깐만요!


뒤따라오는 발소리를 확인하고 다시 위로 동전을 던졌다.
딱 그녀의 눈앞에서 떨어져내리도록 계산해서.

-어? 아앗…!

동전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는 안 들렸으니까, 제대로 잘 받은 모양이다.

-그건 기념으로 줄게.

나는 손바닥에 남은 뒷면뿐인 동전을 꼭 움켜쥐었다.
그것은 우리들과 꼭 닮았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