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honic Rain ⓒ 2003, 2004, 2005 KOGADO STUDIO, INC.

번역문 작성 : CARPEDIEM(mine1215@lycos.co.kr)

게재 : C'z the day(http://mine1215.cafe24.com/)

들어가기 전에
-본 문서는 PC용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심포닉 레인』의 팬디스크인 『Digital Picture Collection Plus』에 수록된 외전 소설을 번역한 것입니다. 후일 발매된 『심포닉 레인 애장판』에도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소설은 게임 본편보다 약간 앞 시기, 또는 엔딩 이후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본편 스토리에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만약 게임을 플레이중이라면 반드시 모두 클리어한 다음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대본에 대한 권한은 작성자에게 있으며, 무단전재 및 링크는 금지합니다.




Symphonic Rain Original Novel
#03 - The book of a fairy 『妖精の本』


【1】
'그 요정은 하늘을 날 수 없었다.'

아리에타는 책장을 넘기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렇게 열중해서 읽은 건 아니었지만, 단편소설 삽화에 나온 작고 예쁜 요정 그림과 함께 그녀의 관심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요정은 희미하게 반짝이는 작은 날개가 달렸고, 지금까지 책에서 보았던 어느 요정과도 닮지 않았다. 아리에타는 지난 페이지를 뒤져 다른 단편에 실린 요정의 삽화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의 뿌리에 놓인 주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떤 요정일까?

아리에타는 혼잣말을 하며 다음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요정 이야기를 모은 단편집의 중간쯤, 그녀의 머릿속에서 '요정'이라는 존재가 막 구체적인 이미지로 자리잡으려 할 때 그 단편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계. 느낄 수도 없는 세계. 지금보다 훨씬 옛날, 이 세상이 마력으로 가득하던 시절, 요정들은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었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드물게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인간이 이름을 지어주고 그들의 존재를 이 세계에 자리잡게 만들었다.
다른 소설은 대개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 단편은 요정들만이 사는 세계에서, 오직 요정 '파타'의 이야기만을 다루고 있었다.

아리에타는 일단 책을 덮고, 빵 굽는 향기가 피어오르는 오븐을 향해 발을 옮겼다. 상태를 보고 '다 구워지려면 조금 더 있어야 돼'라고 판단하고는 시계를 확인한다.

-앞으로 30분 정도면 되려나?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들, 크리스와 토르티니타의 연습이 끝나는 것도 딱 그 무렵일 것이다. 그 시간에 맞춰서 굽기 시작했으니 당연하다. 구워낸 빵을 바로 가져갈 수 있도록 바구니를 챙겨 놓고, 아리에타는 다시 오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방금 전 읽던 페이지를 다시 찾아내서, 삽화에 실린 요정을 바라보았다.


【2】
그 요정의 이름은 '파타'였다. 그녀는 언제나 다른 요정들의 웃음거리였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던 파타는 몸집도 작고, 날개 크기도 다른 요정들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파타는 다른 요정들의 비웃음도, 동정 섞인 시선에도 늘 행복한 듯한 웃음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자신만의 자랑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가수가 많은 요정들 중에서 파타의 노랫소리는 특별히 훌륭하다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친구 요정들은 그 노랫소리를 칭찬하며, 곧잘 감기에 걸려 앓아눕곤 하는 그녀를 문병와서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조르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파타도 그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여, 잠긴 목으로 친구들에게 열심히 노래를 불러주었다.


【3】
거기까지 읽다가, 아리에타는 오븐에서 탄내가 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 참.

오븐에서 꺼낸 빵은, 아주 약간이지만 살짝 그을려 있었다. 아리에타는 '또 실패야'라면서 살짝 투덜대고는 검게 탄 부분을 손으로 털어냈다. 모양새는 볼품없게 되었지만, 어떻게든 먹을 수는 있겠다고 판단했는지, 아리에타는 빵을 바구니에 채우고는 다시한번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는 읽다 만 소설 페이지를 접어 표시해 놓고 집을 나섰다.

-와아~ 날씨 좀 봐.

말투만큼은 느긋하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며, 아리에타는 눈부신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름을 눈앞에 둔 날씨에 종종걸음을 하고 있으려니 이마에 촉촉하게 땀이 흘러내린다.
돌이 깔린 인도 바로 옆을 차들이 지나쳐 간다. 휴일이어서 자동차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차바퀴에서 날리는 모래먼지가 빵에 묻지 않도록 아리에타는 허리를 숙였다. 도로 반대편으로 눈길을 주고는, 크리스와 토르티니타가 기다리는 음악교실을 향해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사뿐히 달려갔다.

-안녕~

아리에타는 노크도 없이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오늘은 선생님이 안 오신다고 들었다. 음악교실에 다니는 학생이라고는 아리에타, 크리스, 토르티니타 셋뿐이었고, 이럴 때를 대비해서 열쇠도 집에 가져다 놓고 있다. 그렇다곤 해도 아리에타는 출석부에 이름만 올라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고, 요즘 와서는 두 사람과 함께 연습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이렇게 휴일 저녁쯤에 마중을 나오는 것이 전부.
그 일에 대해 그녀는 나름대로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음악교실'이라고는 해도 개인주택의 방 하나를 개조해서 만든 작은 시설인지라, 문 옆에 세워진 작은 나무간판에 그렇게 적혀 있지 않았다면, 밖에서 얼핏 봐서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리에타는 복도를 지나 2층을 향해 나아간다.
목적지 문 앞에 도착해서 그녀는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방음장치가 된 두꺼운 문을 살짝 열고 방 안을 살피듯이 얼굴을 가져다 댄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안을 들여다보자,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동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얼굴에 떠오른 것은 감동도, 그렇다고 질투의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문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빠짐없이 듣고자 하는 진지함이 있을 뿐.

-…어? 오늘은 좀 늦었네.

연주소리가 멎고, 크리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문에는 등을 돌리고 있었으면서 어느 틈에 시선을 알아차린 걸까.
그 목소리에 놀라는 기색도 없이, 아리에타는 조용히 교실로 들어섰다.

-연주 더 안 해?
-알이 평소보다 조금 늦어서 그냥 치고 있었어.


크리스는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재빨리 포르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토르티니타는 조립식 악보대를 케이스에 집어넣으면 끝이니까, 연습이 끝나고 나서 곧 정리를 한 모양이다. 바로 아리에타에게 다가와서는 말을 걸었다.

-…조금.
-앗, 이 냄새는?


토르티니타가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씨익 미소를 지었다. 빵을 구워온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알아차린 것은 그 빵의 상태일 것이다. 뒤쪽에서 크리스가 농담조로 거들었다.

-뭔데? 또 태웠어?
-…'또'라고 할 정도는 아니야.
-두 번에 한 번은 그렇잖아.
-그, 그래도… 처음보단 훨씬 낫지 않아?


토르티니타가 농담을 던지자 크리스가 바로 변명에 들어간다. 그런 대화가 부끄러운지, 아리에타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 미안미안. 거짓말이야. 요즘엔 세 번에 한 번 정도?

사과치고는 꽤나 천연덕스러운 토르티니타의 말을 듣고 아리에타도 다시 웃음을 짓는다. 최근 세 사람 사이에서 자주 오가는 대화였다.
아리에타가 느닷없이 음악교실에 그만 나오겠다고 말을 꺼낸 뒤로 아직 몇 달이 지났을 뿐이다. 그리고 그날부터 아리에타는 다른 방법으로 휴일을 보내게 되었다. 두 사람이 연습하는 동안에 예전부터 취미였던 빵을 만들어서, 여기로 가져와 셋이서 나눠먹는다. 요즘은 그녀가 휴일에 뭘 하고 지내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뭐, 맛은 좋으니까. 하나 줘.

크리스는 웃으면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아리에타가 들고 온 바구니에서 빵을 하나 끄집어내 입에 넣는다. 토르티니타도 빵을 하나 집었다.
세 사람은 전기를 끄고 교실 밖으로 나와, 마지막으로 현관에 자물쇠를 채웠다.

-연습은 어때? 요즘엔 뭘로 하고 있어?

걸으면서 아리에타가 묻자, 크리스는 토르티니타와 얼굴을 마주보고는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시키는 대로 어려운 곡들만 잔뜩.
-크리스는 그나마 낫잖아. 가사 외울 필요도 없고.


그 말을 듣고 아리에타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크리스나 토르티니타만큼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마도 절대 눈치채지 못할 미묘한 변화였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아리에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알아차린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아리에타 역시 그들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열심히 해. 난 이렇게 빵 만들어서 응원하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아리에타는 웃음지으며 말했다. 그녀가 빠진 덕분에 선생님은 남은 두 사람 수준에 맞는 곡을 연주하도록 시킨 거겠지. 두 사람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아리에타는 자랑스럽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지만, 본인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빵 만드는 게 질렸으면 다시 안 돌아올래?
-맞아. 알 노래를 못 들으니까 심심하잖아.
-토르타 또 그런 소리 한다. 어차피 난….


장난스런 말투나 행동은 여전했지만, 아리에타를 그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는지, 토르티니타는 느닷없이 아리에타를 꼬옥 끌어안았다.

-에? 뭐… 꺄악!
-언제든지 기다릴게.


그렇게 말하면서 토르티니타는 빵을 하나 더 집어들었다.

-근데….

빵을 우물거리면서 토르티니타가 말을 잇는다. 아리에타는 주의를 줄까 했지만, 그래도 말은 알아들을 수 있으니 됐다고 치고, 동생의 식사 예절을 탓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렇게 태운 건 오래간만 아니야?
-아… 으응. 잠깐 책 보다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크리스도 빵을 하나 집고는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 책 많이 읽나 보던데. 뭐 보고 있어?
-오늘은… 요정 이야기?
-요정이라니, 그거?
-…응.


그들이 사는 이 세계에는 물론 요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없다'고 증명된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 마력이 가득하던 옛날, 그들은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었다. 인간이 이름을 지어주고 그 존재를 확인하던 시절은 확실히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로 전해지는 모습이나 특징은 제각각이었지만, 멋진 노래를 부른다거나 날개로 하늘을 나는 모습 등은 대체로 비슷했다.

-그 요정 이야기를 모은 단편소설집.

제목은 잊어버렸노라고 아리에타는 덧붙였다.

-정말로 있을까?
-…있으면 좋겠는데.


크리스의 소박한 의문에, 아리에타는 혼잣말처럼 조용히 대답했다.


【4】
그날 저녁 내내, 아리에타는 소설 내용에 신경이 쓰였다. 크리스네 가족과 함께한 저녁식사는 여느 때처럼 평온한 분위기로 끝났지만, 그녀는 대화에 별로 끼어들지 않은 채 그냥 조용히 미소짓고 있는 시간이 많았다.
크리스 가족이 돌아가자마자, 아리에타는 자매가 함께 쓰는 방으로 돌아와서 낮에 읽다 만 단편소설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토르티니타도 방에 들어왔다.

-그거 재밌어?
-응? 아… 그럭저럭.
-그래? 그럼 방해 안 되게 피아노라도 쳐 볼까.
-그거 좋겠다.


토르티니타도 딴 마음은 없었고, 두 사람 다 피아노 소리가 방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각자가 하려던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속삭이듯 조용히 노래부르며 토르티니타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아리에타는 거기에 이끌리듯이 침대에 누워, 책 속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5】
파타는 몸 상태가 좋은 날은 곧잘 외출을 했다. 날개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인간처럼 두 발로 걸어다니는 그 모습은 주변의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파타는 결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저 다른 요정들이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눈부신 듯 올려다보며 미소지을 뿐이었다.

-하늘을 날면 기분 좋아?
-꼭 그렇지도 않아.


파타의 몇 안 되는 친구들은 언제나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맞추듯이 땅에 발을 딛고 걸었다.

-자아, 걷지 말고 날아. 난 보고만 있어도 신나는 걸.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 친구들에게 그렇게 부탁했다. 친구들은 할 수 없다는 듯이 하늘로 날아오르지만, 그것이 바로 그들의 참모습이며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얼마 안 지나 그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누비면서, '하늘을 난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온몸으로 표현하였다.
그 광경을 보며, 파타는 그들처럼 자신의 날개를 열심히 파닥거렸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공중으로 떠오를 수 있고, 주변을 날아다니는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두번째로 즐겁게 여기는 시간이었다.


【6】
점점 비행에 빠져들어 하나둘씩 어딘가로 날아가는 친구들을 떠나보내고 나서, 파타는 집으로 돌아온다. 나무를 파내 만든 요정의 집에는 짚으로 된 폭신한 침대가 있는데, 파타는 거기에 누워 어서 빨리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친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녀가 세번째로 좋아하는 일이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면, 파타는 서둘러 문으로 향한다.
요정들의 시간은 조용히 흘러간다. 하루 종일 날아다니며 지내다가, 하늘이 어두워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 시간이 되면, 사라져 가는 붉은 저녁햇살 속을 날아다니는 요정의 모습이 똑똑히 잘 보였다.
파타는 그 중에서 친구들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힘껏 손을 흔들었다. 거기에 대답이라도 하듯, 몇몇 요정이 그쪽을 향해 선회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신호삼아, 파타는 지면에서 몇 m 정도 높이에 있는 문에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하늘을 날 수 없다. 단지, 날개를 힘껏 파닥거리면 짧은 거리나마 활공을 할 수 있다. 파타는 그것을 '난다'고 표현했지만, 대부분의 요정들은 그 말을 웃음거리로 삼았다. 웃지 않는 것은 그녀의 친구들뿐이었다.
그렇게 그녀와 친구들은 평소처럼 지면을 향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간다. 고도는 점점 떨어지지만, 부드럽게 나선을 그리듯 날아 내려오는 그 시간은, 주변의 요정들이 놀랄 만큼 천천히 흘러갔다. 그렇지만 파타는 그 시간이 길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느샌가 파타 주변에는 수많은 요정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그녀를 비웃으러 온 것이지만, 그래도 파타는 즐거웠다.
이 때가 바로 그녀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7】
아리에타는 갈증을 느끼고, 침대 가장자리에 책을 잠시 놓아둔 채 일어섰다. 토르티니타는 아직도 피아노에 열중해서, 그녀가 일어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리에타는 토르티니타의 뒷모습을 향해 살며시 미소짓고는 방을 나섰다.
잠시 후, 아리에타는 허브차가 담긴 컵을 양손에 들고 살짝 열어놓은 문을 등으로 밀며 방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피아노를 치며 노래부르고 있는 토르티니타를 방해하지 않도록 한 손에 든 컵을 바로 옆 책상에 놓고, 자신의 컵에 입을 가져간다. 그때 문득, 스탠드를 놓아둔 침대 옆 선반 위에 따스한 김이 피어오르는 컵이 놓여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토르타.

자세히 보니, 업라이트 피아노 위에도 -아마도 토르티니타가 가져온- 컵이 놓여 있다.(피아노 위에 물건을 올려놓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보고 아리에타는 자신이 가져온 컵을 옆으로 치운 다음, 토르티니타가 가져다 준 초콜라타 칼다(※1)를 한 입 머금었다.
그리고는 다시 책을 펼친다.
'어째서 파타는 늘 그렇게 웃고 지낼 수 있을까' 하고,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슴에 품은 채.


【8】
요정들의 시간은 그들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느릿느릿 흘러간다. 그렇다고는 해도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앞으로 나아간다. 되돌아가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그저 한결같이 앞으로.
요정에게도 수명이란 것이 존재한다. 인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긴 시간 동안, 그들도 천천히 나이를 먹는다. 하지만 겉모습과 생활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저 삶이란 것에 지쳤을 때, 피로해진 정신이 그것을 원하게 된다고, 그들이 아는 범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요정이 말했다.

어떤 요정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하지만 파타는 확실하게 '죽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했다.
어째서 죽음을 두려워하느냐고 친구가 물었다.
시간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그것은 그녀의 몸을 마지막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파타 자신이 느끼고 있었다. 설령 그녀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더라도.


【9】
아리에타는 다시 '어째서?'라고 생각했다. 왜 그녀가 죽어야 하지?
파타를 비웃는 심술궂은 요정들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운명'인 듯하다. 애초부터 파타를 멸시하던 요정들은 '기적'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자체가 정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알?
-…왜?
-표정이 이상해.


평소 좋아하는 초콜라타 대신 허브차를 마시며, 토르티니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리에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리에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젓고, 곁에 있던 컵을 손에 쥐었다.

-초콜라타 고마워.
-응? 아아, 허브차도 고마워.


2개씩 놓인 서로의 컵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살짝 웃었다.

-그 책 재밌어?
-……글쎄. 아마도.
-아마도?
-웃기고 재미난 이야기가 아닌 건 확실해.
-…흐음~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듯한 맞장구를 치며 토르티니타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어보았다.

-이제 다 읽었어?
-어디 보자….


무릎 위에 놓인 책을 들춰보며, 아리에타는 남은 페이지를 확인한다.

-뒷이야기가 좀 더 있나 봐.
-뭐?
-나머진 내일 볼까?
-더 읽고 싶다는 얼굴인데?
-응, 조금.
-그럼 됐어. 얼른 다 읽어버려.


토라진 것도 체념한 것도 아닌 표정으로, 토르티니타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제멋대로인 면도 고분고분한 면도 모두 알고 있는 아리에타는, 그런 동생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렇기에 토르티니타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여 다시 책장을 펼쳤다.


【10】
지푸라기로 만든 침대에 누워, 파타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곁에는 그녀의 친구들이 모여서 이것저것 시중을 들어 주고 있다.
요정은 원래 혼자서 지내고 홀로 늙어가기 때문에, 그들의 집은 별로 넓지 않다. 그런 공간에서 여럿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파타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된 이후 - 다시 말해 친구들이 그녀를 찾아온 다음부터, 이 작고 좁은 집은 손님들로 늘 북적거렸다.
사람이 많으면 환자에게 안 좋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파타가 원했기 때문에 결국은 모두가 매일같이 이 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리고 파타는 -내심으로는 아무리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더라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웃음을 그치는 일은 없었다. 친구들이 그 이유를 물어보면 그저 한 마디로 대답하고 다시 웃을 뿐이었다.

-그야, 기쁘니까 웃지.


【11】
그렇게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파타는 한 가지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한결같이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정들이 절대로 찾지 않는 골짜기가 있다. 바닥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 때문에, 아무리 멋지게 날 수 있는 요정이라도 그 연약한 날개로는 제대로 날 수가 없다.
그 골짜기에, 가장 센 바람이 부는 때가 있다. 오늘은 바로 그 보름날 밤이었다.

-난 골짜기에 갈 거야.

파타는 마치 노래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아올라야지.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던 파타가, 이날만큼은 느릿느릿하지만 꼿꼿이 몸을 일으켰다. 며칠 동안이나 걷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발걸음에는 힘이 있었다.

-어째서! 죽으러 갈 셈이야?
-날려고 간다니?


친구 가운데 누군가가 말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몸을 붙잡으면서까지 말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아직 걸을 수 있어. 그치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거야.

병이 다 나은 다음에. 건강을 차린 다음에. 자리에 있던 모든 친구들이 목까지 올라온 그런 말들을 꾸욱 참았다. 그건 무리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왜 이런 바보같은 짓을.

친구 중에 한 사람이 그녀를 '바보'라고 했다. 파타가 알고 있는 한, 그 친구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파타는 웃었다.

-맞아. 아마도 나는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요정이 될 거야.
-그래서 모두한테 웃음거리가 되려고?
-응.


마치 예상하고 있던 질문을 받은 아이처럼, 그녀는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골짜기로 가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파타는 문 앞에 섰다. 멍하니 지켜보던 친구들이 황급히 뒤를 따른다.

-정말 가려고?
-따라가도 돼?
-이렇게 말리는데도 고집을 부리면 평생 널 용서 안 할 거야. 그래도 괜찮아?


모두의 질문에 파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문 밖으로 미끄러지듯이 몸을 던졌다.
처음 한순간은 활공하듯이 하늘을 날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내내 걸었다. 친구들 역시 걸어서 뒤따라간다. 그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달이 하늘 꼭대기까지 왔을 무렵, 요정들은 골짜기에 도착했다. 몇 시간이나 걸어오면서 파타는 한숨도 쉬지 않았다. 하지만 목적지에 닿고 나서는 잠시 앉아 쉬며 숨을 골라야 했다.
거친 숨소리와 귀를 스치는 바람소리만이 들려오는 조용한 공기 속에서, 아까 파타를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던 요정이 기분 상한 듯이 말을 꺼냈다.

-멍청한 녀석. 죽은 다음에도 모두에게 비웃음거리가 될 텐데.
-응, 그래서 이러는 거야.
-아까도 똑같은 대답 했지? 넌 광대가 되고 싶어? 그게 정말 네가 바라는 거야?
-아마도.


일행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든다. 그리고 모두가 파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파타는 띄엄띄엄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난… 내 힘으로 될 수 있는 '누군가'가 되고 싶었어.

모두의 침묵에 만족한 얼굴로, 파타는 이야기를 계속한다.

-설령 그것이 어리석은 광대라 해도, 그저 '날지 못하는 요정'으로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사실은 그보다 더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무리니까.
난 언제나 웃음거리였어. 날지 못하는 요정. 땅을 기어다니는 요정. 그것도 괜찮아. 어차피 광대로 살아왔다면 끝까지 역할에 충실한 것도 나쁘진 않겠지.
마지막으로 터무니없이 멍청하고 우스운 짓을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친구 하나가, 자조섞인 그녀의 말을 도중에 잘라버리듯이 외쳤다.

-너한텐 노래가 있잖아!
-그건 누구한테나 다 있는 걸.
-네 목소리가 얼마나 멋진데!
-너희들이랑… 다른 요정들만큼은 멋있을지도.


파타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녀가 다른 요정들처럼 하늘을 날 수 있었다면, 어느 누구도 파타의 노래를 멋지다고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요정의 노래는 아름다우니까.

-내가 그대로 침대 위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난 뭘 위해서 존재했던 거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타는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날지 못하는 어리석은 요정이 하늘을 날겠다고 여기 골짜기에서 몸을 던진다면, 그 어리석은 짓 때문에 나는 모두에게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될 거야.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조롱하고…… 그리고 누군가는 날 미워하겠지.

마지막 말은 친구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 이야기는 영원히 전해질 거야. 내가 죽더라도. 날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죽더라도. 그 이야기만큼은 사라지지 않아.

그때, 갑자기 바람이 멎었다. 거센 바람이 불기 직전의 짧은 정적. 파타는 주저없이 골짜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매달리듯 그 뒤를 따른다. 누군가가 파타의 어깨를 붙잡고는 억지로 돌려세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친구는 자신의 날개에서 깃털을 하나 뽑아서는 그녀의 손에 떠넘기듯 쥐어주었다. 파타가 그것을 움켜쥐려고 할 때, 주위에 있던 모든 친구들이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 포갰다.
파타는 손바닥 위에 놓인 깃털들을 꼬옥 움켜쥐고는 조용히 흐느꼈다. 하지만 울음이 나오기 전에 뒤를 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녀의 눈물을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친구 하나가 조용히 물었다.

-같이 가도 돼?

파타는 등을 돌린 채 고개를 젓고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너희들은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모두에게 전해야 돼.

평소와 다름없이 웃음이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 그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는 파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바람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파타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의 자그마한 몸과 연약한 날개는 무자비한 바람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했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 속에서, 친구들은 손끝 하나 꼼짝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12】
날이 밝아올 무렵이 되자 바람도 점차 잦아들었다. 그로부터 다시 몇 시간이 지났을 때, 다시 바람이 멎고 골짜기에는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다.
파타의 친구들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무언가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그녀의 몸이, 아니면 자신들이 건네준 깃털 한 장이. 그저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여느 때처럼 바람이 다시 골짜기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찾고 있던 무언가를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13】
그 후로 며칠이 지나도, 몇 년이 지나도, 어리석은 요정의 이야기는 다른 요정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오직 하나 남은 것은, 날지 못하는 요정이 이 세상에서 살며시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뿐. 친구들 중 어느 누구도, 파타의 어리석은 꿈을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결국 파타는 자신이 바라던 '무언가'가 되지 못했다. 단지 그녀가 가장 싫어하던, '날지 못하는 파타'라는 존재로만 계속 남게 되었을 뿐.
그것도 몇 안 되는 그녀의 친구들 사이에서만.
하지만, 적어도 그들만큼은 마지막까지 파타의 존재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녀의 어리석음 때문도, 그녀에 대한 미움도 아닌, 그녀를 향한 사랑 덕분에.


【14】
-알~!

마치 아리에타가 책읽기를 끝마치는 순간을 계산이라도 한 것처럼, 토르티니타는 바로 옆에 있는 자기 침대에서 폴짝 뛰어들며 아리에타를 끌어안았다.

-자, 잠깐만, 토르타….
-이제 다 읽었지?
-아, 으응… 일단은.
-그럼 얘기라도 하자~


기다리는 동안 꽤나 심심했는지, 토르티니타는 어리광을 부리듯이 아리에타를 졸랐다. 그녀도 그런 말투에는 익숙했던지라,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그럼 말해 줘. 오늘 연습때 이야기라든지.
-그것보다, 알은 오늘 뭐 했어?
-빵 굽고 이 책 읽은 게 다야. 얘기해도 재미없을 걸.
-재미없지 않아~ 나야말로 오늘 하루종일 노래만 불렀는데.


매일같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에게, 특별히 화제가 될 만한 것은 없다. 그래도 쌍둥이 자매는 이렇게 자잘한 일상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아리에타가 음악교실에 안 나오게 된 다음부터는 더욱. 함께 지내는 시간이 줄어들게 된 후로는.

-그럼 빵 얘기 해 줘. 알이 만들어 준 빵 무지무지 맛있단 말이야.
-타지 않으면?
-아, 자기 입으로 말하네. 그치만 정말 맛있다니까.
-제대로만 하면 누가 만들어도 맛있어.
-우웅… 알은 특별한 걸.


아부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토르티니타는 정말로 진지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아리에타는 그렇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얘기해 봤자 기억할 마음도 없으면서'.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아리에타는, 빵 만드는 방법이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토르티니타와 시간을 보냈다.

늦은 밤, 아리에타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떴다. 곁에서 조용히 잠든 토르티니타가 깨지 않도록 살며시 일어나서, 그녀가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스탠드에 불을 켠다.
아리에타는 자신이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난 행복해'라고 단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이 정말로 틀림없고 영원히 변치않을 거라는 확신까지는 들지 않았다.
조용히 한숨을 쉬고, 아리에타는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는 토르티니타가 끼어드는 바람에 마지막 몇 줄을 놓쳐버린, 아까 읽던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짤막한 문장 몇 줄, 그리고 작은 날개를 가진 자그마한 요정의 그림이 있었다.


【15】
요정들의 계절이 흘러가고, 마침내 파타는 모든 요정들로부터 잊혀져 갔다.
만일 파타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도, 과연 그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End


※1 : cioccolata calda. 영어로는 hot chocolate. 코코아나 초콜렛에 커피, 우유 등을 섞어 따뜻하게 데운 이탈리아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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