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honic Rain ⓒ 2003, 2004, 2005 KOGADO STUDIO, INC.

번역문 작성 : CARPEDIEM(mine1215@lycos.co.kr)

게재 : C'z the day(http://mine1215.cafe24.com/)

들어가기 전에
-본 문서는 PC용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심포닉 레인』의 팬디스크인 『Digital Picture Collection Plus』에 수록된 외전 소설을 번역한 것입니다. 후일 발매된 『심포닉 레인 애장판』에도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소설은 게임 본편보다 약간 앞 시기, 또는 엔딩 이후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본편 스토리에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만약 게임을 플레이중이라면 반드시 모두 클리어한 다음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대본에 대한 권한은 작성자에게 있으며, 무단전재 및 링크는 금지합니다.




Symphonic Rain Original Novel
#4 - Foolish poet 『愚かな詩人』


【1】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찬 실내에서도, 주변의 온갖 잡음과 노랫소리에 뒤섞여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와 닿는다.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화음을 구성하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 주선율도 아닌 알토의 노랫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2】
아는 친구와 체나콜로(※1)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녀석이 아무 말도 없이 늦어지는 바람에 하릴없이 기다리게 되었다. 노랫소리를 들은 것은 한껏 지루함에 시달리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확실히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저 목소리가 예쁜 학생이라면 여기 피오바 음악학원에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유독 존재감을 내세우는 그 목소리에 살짝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그 주인의 미모에도.
그녀가 노래를 시작해서 끝낼 때까지, 나는 체나콜로 중심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난 후에도 계속.
이 방의 지배자는 그녀였다. 노래가 끝나고, 그녀가 움직이자 주위의 모든 사람이 함께 움직였다. 그녀를 위해 마실 것을 챙기는 사람. 지금의 노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얼굴을 들이미는 사람. 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는 다음에 그녀가 어떤 곡을 부를지 알고 싶어했다.
모두에게 공평하도록, 그녀는 그들이 제각기 원하는 것을 제공했다. 누군가에게는 미소를, 누군가에게는 잔을 받아드는 우아한 몸짓을.

-다들 괜찮다면 한 곡 더 부탁해도 될까요?

찬성하는 다수의 목소리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며, 그녀는 유명한 곡 이름을 댔다. 피아노 주자는 "그거라면 눈 감고도 칠 수 있다"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는, 악보를 꺼내러 가려던 학생을 멈추게 했다.
지휘자는 없었지만,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악기 주자들은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신호삼아 다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3】
팔시타 포세트.
이름과 얼굴은 알고 있었다. 성적 우수한 전임 학생회장으로, 성악과에서 제일 유명하고 장래도 확실시되는 학생.
하지만 그녀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노래를 듣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나 마찬가지니까.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한산해진 체나콜로 벽에 기대어 이것저것 생각해 본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아 그녀의 노랫소리를 떠올려 본다. 확실히 멋진 목소리였지만, 그 단어만으로는 다 표현할 길이 없다.
목소리의 질, 성량, 음정의 정확도. '음악기호에 충실한 수준'을 넘어서는 창법, 목소리의 억양, 거기에 담긴 감정. 난 성악 전문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노래는 모든 면에서 훌륭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그 이상 가는 무언가가 있다고 강하게 느꼈다.
노래하는 기술이나 표면적인 아름다움으로 따져 보면, 수준이 비슷한 학생은 이 학원 안에 틀림없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다.
그녀가 노래부르고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즐거운 듯이 노래부르는 옆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음악의 여운이 사라지고, 피아노 연주자가 살며시 페달에서 발을 떼는 - 나무가 맞닿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바뀌었다. 그것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나 자신의 변화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녀의 무언가가 변화한 거겠지.
그럼 뭐가 바뀌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다른 가수와 다르다고 느꼈던 이유와는 물론 아무 관계도 없을 것이다.
그저, 즐거운 표정으로 노래부르는 그녀의 얼굴이 내 눈에 새겨져 사라지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노래가 끝난 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얼굴은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멍하니 '그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측이라기보다 거의 망상에 가까운 생각을 털어버리고는, 시계, 그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5분만 더 기다려 보고 안 오면 돌아가자. 그렇게 친한 친구도 아니었으니까. 연주가 아니었으면 진작 체나콜로를 나왔을 터이다. '앞으로 5분'도 관두고 방에서 나가려 할 때, 마치 계산이라도 한 것처럼 문이 열렸다.

-어머, 돌아가는 건가요?

부드러운 알토 목소리가, 아까 들었던 노랫소리 그대로 귓전에 울렸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바람맞았나 보군요.
-아아, 역시.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 단순한 몸짓마저도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단순히 얼굴이 예쁘다는 것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품다니, 스스로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별다른 저항감은 없었다.

-앙상블을 안 하는 걸 보고 약속이라도 있나 했어요.
-포르텔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지요.


딱히 의식한 것은 아닌데도, 어느샌가 예의바른 말투가 되어 있었다. 여자에게 작업을 걸 때는 일부러 정중한 말을 골라 쓰지만, 이번만큼은 말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아차릴 만큼 지극히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포르텔과였구나… 아쉽네요. 오늘은 피아노과랑 성악과밖에 없어서. 포르텔도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난 그리 잘 치는 편이 아니라, 방해가 안 돼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노래를 듣고 난 후로는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건 들어 봐야 알죠.
-유감이지만 겸손치레는 아닙니다.


정말로 겸손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까지 포르텔 연습을 열심히 안 한 것이 조금은 후회스러웠다. 2년이 넘는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이.
포르텔과 학생이 피오바 음악학원을 졸업하려면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파트너의 노래에 맞추어 협주하며 쟁쟁한 음악가들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이 졸헙시험은 앞으로 음악가로서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가 되면 포르텔과 3학년들은 함께 노래할 파트너를 찾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파트너를 정하지 못했다.
체나콜로에 남아있지 않았다면 그녀와 이렇게 이야기할 일도 없었을 테고, 하물며 그녀가 파트너가 될 가능성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망설이고 있던 말이, 놀랍게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혹시 그쪽도 괜찮다면 한번 맞춰 보겠어요? 난 언제든지 좋으니까.

거절하는 말이 목까지 치밀었지만, 그보다 먼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 먼저 확인을 해야지. 졸업연주 파트너는 정했나요?

질문을 받고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잘 됐다. 나는 팔시타 포세트. 그냥 '팔'이라고 불러 줘요.

그녀가 내민 손은 약간 차가웠지만, 상상했던 것만큼 부드럽진 않았다.

-난…… 아시노.
-네? 당신이 아시노?


간신히 이름을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미안해요. 친구한테서 '오늘은 못 만나게 됐다'며 말해달라고 부탁받았는데.
-에?
-노래에 정신이 팔려서 잊어버렸네요.


그녀는 꾸밈없이 환하게 웃었다.
이것이 팔시타 포세트와의 만남.
내가 세번째로 숭배하게 된 여성과의 만남이었다.


【4】
나답지 않군.

평소답지 않게 긴장을 하면서, 포르텔을 사이에 두고 팔과 마주 앉았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이틀 후. 이야기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흘러갔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쳐, 지금 시간이 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대로 연습실까지 오게 되었다. '한번 맞춰 보고 싶다'는 말은 단순한 인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 다 아는 곡이 좋으려나?
-가능하면.


면전에서 창피는 당하고 싶지 않았다. 팔이 만들었다는 곡을 한눈에 바로 연주할 수 있다고는 꿈도 꾸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만든 곡은 이런 데서 내보일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럼 난 뭘 하러 여기 왔지?

-그렇게 긴장 안 해도 돼요.

속마음을 들켰다고 해서 화는 나지 않았다. 만일 다른 여학생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기분이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녀의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동정의 빛이 있었다면 더욱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그런 걸 알 수 있나요?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형편없는 자신을 인정하는 체념에 가까운 말이 흘러나왔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도 있기는 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나'라는 인간의 본질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속 어딘가에서 깨닫고 있었다.

-네. 그래도 즐겁게 하면 되잖아요? 시험해 보겠다는 게 아니라, 지금은 그저 아시노군이 치는 포르텔 소리가 듣고 싶으니까.

그녀의 말에는 무작정 믿고 싶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서 도망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허세를 부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포르텔 건반에 손을 얹었다.


【5】
코델 선생님 시간에 몇백 번이나 연습한 곡인 만큼, 손가락은 매끄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방 구석에서 들을 때보다 훨씬 또렷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같으면 건반을 손으로 따라가는 것도 벅찼지만, 오늘은 여유가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자, 즐거운 듯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팔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정말로 노래부르기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히 잦아들고, 화음의 잔재가 포르텔을 빠져나갈 때까지의 짧은 순간 동안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러나…….

-왜 그래요? 아시노군.

변화는 없었다.
노래부르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노래하기 전부터- 인생을 즐기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질문은 무시하고, 이쪽에서 되물어 본다.

-내 포르텔은 어떤가요? 까놓고 말해 별로라는 건 스스로도 잘 압니다. 그래도….
-그래도 듣고 싶나요?


마치 그런 질문이 올 거라고 예상이라도 한 듯이 거침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네. 듣고 싶군요.
-알았어요.


다소곳한 태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진실을 말할 것이다. 칭찬이나 위로 따위는 없이.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결과를 알고 싶다는 욕구에는 이기지 못했다.

-아시노군은 포르텔을 좋아하나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팔은 딱 부러지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이건 질문이 아니다. '싫어하는군요'라고 단정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싫어합니다.
-그러면 왜 포르텔과에?
-잘 알면서.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아시노 알티에레.


한 글자씩 또박또박, 그녀는 내 이름을 불렀다.

-'알티에레'라면… 혹시 그 알티에레 가문?
-네에… 그런 겁니다. 작위도 없고, 별로 유명하지도 않지만….


그 이름은 100년도 넘은 옛 체제의 유물이다. 조금 넓은 집에 살면서 약간의 부유함을 누릴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일 뿐.
그렇다고 쓸데없이 깎아내릴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다. 그 이름의 가치를 인정하는 자가 있다면 적당히 이용도 하고,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허세가 소용없었다.

-포르텔을 칠 수 있고, 집은 귀족가문… 근사하지 않아요?
-그래도… 내가 바라서 된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귀족의 체질이란 건, 개개인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만큼 오만하고 뿌리깊은 것이었다.
거기에다 포르텔을 칠 수 있는 아들까지 있다. 그런 사회적 지위를 일부러 내던지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럼 난 뭘 하고 싶었던 거지?
거기까지 내 속마음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뭐… 그렇다곤 해도, 이렇게 둘이서 앙상블도 해 봤으니까, 지금은 잘 됐다고 생각해요.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멋진 노랫소리를 듣고 흥미를 느꼈다. 졸업연주 파트너 후보로서 시험삼아 협주도 해 보았다.
……그걸로 끝이다. 평소같았으면 이 단계에서 달콤한 말로 유혹 정도는 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는 이제야 겨우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 사이.
물론 분위기에 휩쓸렸다는 이유도 있기는 하다.

-혹시 그쪽 집안도 귀족?
-나? 아니, 난 아녜요.
-그래요? 하지만 말투라든가 행동을 보면 그럴 것 같은데.
-…그런가요.


조금은 기뻐하든지, 아니면 살짝 얼굴을 붉히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난 아니예요.

조용히 말하며 팔은 고개를 저었다.

-자, 다시 한번 해 볼까요?

화제를 얼버무리려는 듯이 그녀는 잠시 자리를 떴다가, 돌아왔을 때는 손에 악보를 들고 있었다.

-이젠 포르텔이 좋아졌지요? 그럼 내 곡도 한번 맞춰 볼까요.
-나라도 괜찮겠어요?
-이런 말 하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아직 파트너를 정한 건 아니니까요. 여러 사람들이랑 맞춰 본 다음에 정하고 싶어요.


가슴에 달린 펜던트를 손으로 더듬으며, 그녀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음악은 나한테 정말정말 소중한 존재. 그러니까 타협은 절대 없어요.
-그런데도 나랑 맞춰 보겠다는 겁니까?
-네, 그래요.


한 가지를 더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째서 '포르텔이 싫다'고 한 나를?


【6】
-크리스 베르틴이란 사람, 아시노군 친구?

창밖은 살짝 어두워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사람들로 붐비던 체나콜로는, 지금은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다.
슬슬 때가 되었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이름을 그녀 입으로 들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후로도 몇 번인가 협주를 해 보고, 그녀가 정말로 수많은 포르텔과 학생들과 연습을 해 보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는 친구들 중 몇 명은 이미 그녀와 안면이 있었다. 게다가 포르텔 연주자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녀를 위해 몇 명인가와는 이야기도 해 보았다. 물론 그녀의 파트너 후보로서.
그 위치에 내가 제일 가까울 거란 생각은 해 보지 않았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하지만 유일하게 예외인 인물이 바로 크리스 베르틴이었다.

-뭐어, 친구… 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할 수도 있어'요?
-조금 미묘하거든요… 나랑 크리스는.


정확히 말하자면 크리스가 조금 특별했다. 나쁘게 말하면 '이질적'이었다.

-미묘? 괜찮다면 얘기해 주겠어요?

의자에 앉더니, 팔은 이야기를 듣는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꼬고 손으로 턱을 괸 그 모습은, 이전에 착각을 했을 때처럼 묘하게 귀족스러운 느낌이 났다.

-크리스랑 얘기해 본 적은?
-없어요.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조금. 아직 파트너를 못 정했다는 거랑, 아시노군하고 친구사이라는 것 말고는 전혀.


크리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토르티니타 단 둘뿐이다. 그리고 그에 관해 알고 싶어했던 사람은 팔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나도 처음이었다.

크리스가 연주하는 포르텔 음은 좀 특이해서,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듣는 이에 따라서는 그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녀석의 포르텔 소리를 처음으로 들은 것은 벌써 2년 전 일.
그때의 음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7】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던 포르텔과 같은 반의 누군가가 친목회를 하자는 말을 꺼내서, 체나콜로에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협주를 하는 분위기로 흘러가서, 순서를 정해 번갈아가며 포르텔을 치게 되었다. 나머지 사람은 옆에 있는 악기창고에서 적당한 악기를 골라오거나, 노래를 부르는 걸로 하고.
너도나도 앞장서서 포르텔을 연주하는 동안, 내내 벽에 등을 기댄 채 노래도 피아노도 나서지 않는 남학생이 하나 있었다. 나도 누군가의 권유로 한 번 연주를 했지만, 그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으면서, 그렇다고 당장 돌아갈 생각도 없는 듯 보였다.
모두 연주를 끝내고 마지막 몇 사람만이 남았을 때, 옆에 있던 여학생이 말을 걸자, 그제서야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포르텔 앞에 앉았다. 자기소개에서 밝힌 이름은 '크리스 베르틴'이었다.
크리스가 포르텔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악기를 연주하던 사람 중에 절반은 손을 멈추고, 노래부르던 사람 중에 절반은 노래를 그쳤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계속 연주하는 녀석들은 설사 당나귀가 포르텔을 치고 있더라도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던 건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숨을 멈추고 포르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연주를 멈춘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눈살을 찌푸리고, 나머지 극히 일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질(異質).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 한 단어뿐이었다.

한 곡이 끝나자, 크리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인사를 하고는 다시 벽에 등을 기댔다.
체나콜로가 갑자기 수선스러워지더니, 몇 사람인가는 그와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사람들은 그를 한 번 노려보고 다음부터는 무시해 버렸다.
연주가 재개되자 마치 크리스의 존재는 잊혀진 것처럼, 체나콜로 안은 다시 음악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8】
크리스의 음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무조건 찬사가 나오는 그런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애가 타고, 괜히 화가 나고, 그러면서도 크리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차츰 가시고 나자, 이번에는 흥미가 솟았다.
꽃병에서 꽃 한 송이를 뽑아 그의 눈앞에 살며시 내밀었다.

-잠시 시간 좀 될까?

처음에 크리스는, 내가 말을 건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몰랐는지,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야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눈동자는 살짝 흐려져 있거나,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크리스 베르틴.
-……으응?
-'벽에 기댄 꽃'은 너한테는 안 어울려.


그렇게 말하고는 그의 가슴 주머니에 꽃을 꽂아주었다. 여자였다면 이 선물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겠지만, 크리스는 곤란한 표정으로 꽃을 쳐다보고는 내게 물었다.

-너는?
-아시노 알티에레.
-그래. 근데… 나한테 뭔가 볼일이라도?


딱히 그런 게 있는 건 아니었다.

-볼일이 없는데 말을 걸면 안 되나?
-아니… 별로 그런 건. 볼일도 없으면서 누군가가 말을 거는 건 여기 와서 처음이거든.
-친목회라고 모였는데 얘기나 해 볼까 해서.
-…그래.


그리고 나서 출신지라든가 포르텔과 등에 관해 이야기를 해 봤지만, 분위기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포르텔 소리를 듣고 느꼈던 짜증을 연주자 자신에게서도 느끼게 되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는 결국 물어보았다.

-너 말이야… 여긴 뭐 하러 왔어?
-…함께 오자고 해서.
-싫으면 중간에 그냥 돌아가면 되잖아.
-만날 사람이 있어.
-대체 누굴?


'너같은 걸 누가'라는 비아냥을 담아 대꾸를 했지만, 그는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문 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여학생 하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앙상블 도중에 아무 거리낌도 없이 문을 열어젖힌 탓에, 연주가 멈추진 않았지만 몇 명인가는 소리나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쪽을 향해 걸어오더니, 나를 무시하고는 크리스에게 속삭였다.

-강의실에서 기다리라고 했지?
-그래서 메모 남겨두고 왔잖아.


그녀는 손에 무언가 종이를 들고 있었는데, 주먹으로 꽉 쥐고 있었는지 쭈글쭈글했다. 간신히 알아본 것은 '체나콜로'라는 글자였다.

-크리스, 이쪽은?

기가 세 보이긴 했지만, 얼굴은 꽤 예뻤다. 소개 정도는 해 둘까 싶어서 중간에 끼어들자, 그녀는 마치 뜯어보는 듯한 시선을 이쪽으로 향했다.

-으응, 아시노라고 해. 이쪽은 토르티니타.

크리스가 소개를 했지만 토르티니타는 여전히 말이 없다.

-만나게 되어 반갑군. 난 아시노 알티에레.
-……안녕.


크리스보다도 무뚝뚝하잖아… 그렇게 생각했지만, 잔뜩 굳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린 급한 일이 생겨서… 미안.

토르티니타는 크리스의 손을 잡고서,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그거 뭐야?

크리스 가슴에 있는 꽃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곤란한 듯 웃으며, 크리스는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물었다.

-이게 뭐지?
-꽃이잖아.
-어떡하면 돼?
-…글쎄.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선물이라도 하지?


크리스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불쾌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는 토르티니타한테로 가서는 그 꽃을 건네주었다.
일순간, 굳어 있던 토르티니타의 표정이 환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그녀는 곧바로 얼굴을 돌리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크리스는 그 의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종종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때는 아직 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9】
-짜증? 크리스가 치는 포르텔 소리를 듣고?

크리스와의 첫 만남 이야기를 듣고 난 팔은 그렇게 물었다. 그녀석의 음이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그래요.
-어디가 그렇게 짜증이 났어요?
-그녀석이 내는 음은 어두워요. 꾸물꾸물하고, 무언가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듯한 느낌….
-크리스가 도망치고 있는 대상은?
-글쎄… 아마도 '현실'이 아닐지.
-……현실.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인다.
그 순간, 말하려 하지 않았던 사실까지 무심코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녀석은 현실을 보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녀석한테 있는 건 비가 내리는 환상과, 편지 속에서만 존재하는 애인, 그리고 가짜 친구뿐….
-……무슨 뜻이죠?


말을 꺼내고 나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농담이라며 얼버무리기에는 너무 많이 이야기했고, 무언가의 비유라고 대충 넘기기에도 너무 구체적이었다.
크리스와 처음 만나고 나서 며칠 후, 토르티니타와 한 약속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하지만 이성으로는 이해해도, 도저히 냉정한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어째서 크리스한테 그렇게 신경을 씁니까? 다른 녀석들 얘길 할 땐 그렇게까지 안 물었으면서.
-왜냐면…….


팔은 미소지었다.

-아시노군이 이것저것 많이 얘기해 주니까요.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더.
-그것도… 그렇군요.


나는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포르텔을 연주할 능력은 틀림없이 있었지만, 그건 '재능'이라고 부르기엔 낯간지러운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포르텔 실력에 관해 험담을 들어도 얼굴을 붉히거나 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크리스 베르틴, 그녀석만은 특별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이유없이 짜증이 난다. 이야기를 해 봐도, 포르텔 치는 소리를 듣고 있어도.
그렇지만 이 학원에 들어와서 제일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크리스였다. 내가 유일하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팔에게도 말했듯이, '그녀석이 내 제일 친한 친구'라고 하기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그래도 아시노군은 가짜 친구인가요?
-……그래요.
-어째서?
-그녀석은 달라요. 비가 내리는 환상이 보일 정도니까.
-그럼… 그 '보인다'는 건 어떤 의미로?
-의미고 뭐고… 말 그대로라니까요. 지금 찾아가서 '오늘도 이렇게 비가 많이 와서 큰일이네요'라고 얘기해 보면 압니다.
-…웃지 않을까요?
-네. 아마도 웃겠지요.
-…….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겁니다.


곤란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크리스의 모습을 또렷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늘 있는 일인데 뭐.


【10】
그날 아침은 평소보다 늦게 집을 나섰다. 지각은 거의 확실했지만, 포르텔의 역사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피오바 학원은 지각에 관대한 편이다. 실력이 없는 학생에게는 꼭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1교시가 끝날 때까지 시간 때울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교사 입구 근처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남녀학생 두 사람으로 보였는데, 흐릿하게 보이는 여학생의 리본 색깔을 보고 나와 같은 신입생임을 알아차렸다. 자기 처지는 제쳐두고, 입학하자마자 지각을 한 신입생이 누군지 구경이나 할까 하고 다가가려 했지만, 그 두 사람이 크리스와 토르티니타라는 것을 알고 발을 멈추었다.
며칠 전의 첫 만남 때문인지, 그들에게 별로 좋은 인상은 없었다. 그대로 반대쪽을 향해 걸어가려다가, 토르티니타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다시 멈춰섰다.
토르티니타는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크리스 머리를 닦고 있었다. 학원 오는 도중에 강물에라도 빠진 건가?


【11】
-여어, 크리스, 토르티니타.

어차피 시간을 때울 거라면 몇 마디라도 말을 나눠 본 사람과 있는 게 낫겠다 싶어 생각을 고쳐먹고 말을 걸자, 토르티니타는 이쪽을 돌아보고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넌….
-자기소개는 지난번에 했지?
-안녕 아시노. 너도 지각이야?


푹 덮어쓰고 있던 수건을 벗어 손에 들고 크리스가 대답했다.

-어디 분수에라도 뛰어들었어?

웃으면서 그렇게 물었지만, 크리스가 든 수건은 방금 막 걷은 것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게다가 머리칼도 젖은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무언가 물어보려고 할 때, 그것을 가로막듯이 토르티니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설마 그럴 리가.

건조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동안, 토르티니타는 크리스를 재촉했다.

-크리스는 먼저 가 있어. 난 잠깐 아시노군이랑 얘기할 게 있어서.
-얘기?
-됐으니까 얼른. 1층 제2강의실이면 이리 쭉 가서 왼쪽 맞지? 교실 틀리지 말고. 아, 그리고… 지각했으니까 교실 들어갈 때 꼭 사과해.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이, 토르티니타는 빠른 말투로 이야기를 쏟아낸다. 하지만 크리스는 반발은커녕 의심도 안 드는지 체념과도 닮은 미소를 떠올렸다.

-…알았어. 근데 아시노는 어떡할 거야?
-난….


'크리스와 함께 강의실로 간다'는 선택도 가능했지만, 그보다도 난 토르티니타의 이상한 행동에 흥미를 느꼈다.

-나도 토르티니타랑 얘기할 게 있어. 먼저 가라.
-…그래? 알았어. 이따 보자.


깔끔하게 접은 수건을 토르티니타에게 건네주고, 크리스는 그대로 안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라는 의문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은 모양이다.
남은 두 사람은 미묘한 거리를 유지한 채 마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토르티니타였다.

-…크리스한테 무슨 볼일?
-같은 과 동급생이랑 얘기하는데 볼일이 필요한가?
-되도록이면 우리한테 말 걸지 말아 줄래?
-갑자기 무슨 소릴.
-더 이상은 할 말 없어.


이쪽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매섭다. 이제 겨우 두번째 만남이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래 표정이 그런 여자도 있겠지만, 토르티니타는 조금 달랐다. 어딘가 무리하고 있는 듯한 느낌.
크리스에게 꽃을 받았을 때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평범한 여자다운', 그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때 보았던 게 진짜 토르티니타 얼굴이 아닐까?

-그쪽은 할 말이 없어도 이쪽은 있을지도. 무엇보다 우린 같은 반이거든.
-우리한테 신경 안 써도 돼.


토르티니타는 발길을 돌렸다.

-얘기 끝이야. 크리스한텐 내가 말해 둘 테니까.
-아까 그녀석이 수건으로 머리 닦고 있었지? 그건 뭐야?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토르티니타 등에 대고 질문을 던져 본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너랑은 상관없는 일 아니야?

다시 돌아선 토르티니타는 전혀 흔들림없는 태도로 내 눈을 쏘아보았다. 확실히 미인이다.

-뭔가 숨기고 있지? 토르티니타.
-누가 그걸 순순히 가르쳐 준대?
-3년 동안 계속 감춰둘 수 있을까? 너 혼자서.


반쯤은 속내를 떠볼 생각으로 던진 말이었다. 뭘 숨기고 있냐는 질문에 '아무것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면 더 이상 캐묻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토르티니타는 공격적인 말투로 날 위협하려고 했다. 필사적으로 숨기고자 하는 의지는 느껴졌지만, 그녀는 완벽하게 냉정해지진 못했다.

-…할 수 있어.
-그렇다곤 해도, 아는 녀석이 하나쯤은 더 있는 게 너한테도 편하지 않겠어?


잠시 주저하듯 말이 없는 틈을 타서 한 마디를 덧붙인다.

-특히 같은 반 친구가 알고 있다면.
-네가 크리스 친구라고?
-될 수도 있겠지. 지금은 아직 아니지만.
-거절하겠어.
-뭐,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건 자유지. 내가 누구랑 말을 하든 그것도 내 자유지만.


토르티니타의 표정이 한층 험악해진다.

-…왜 그렇게 크리스한테 들러붙는데?
-그냥 알고 싶어서 그래. 재미있어 보이잖아.
-너 재밌으라고 이러는 거 아니야.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사실을 이야기하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딴 사람한테 얘기하면…….

말투도 부드러운 것이 웃는 얼굴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너한테 무슨 짓 할지 나도 몰라.
-그거 무섭군.


진심이었다. 간신히 농담조로 받아넘기자, 토르티니타는 속삭이듯 짤막하게 말했다.

-크리스는 비가 내리는 환상을 보고 있어.
-환상이라니… 그럼 비가 내린다고 믿는 거야?
-여긴 비의 거리니까.
-그게 언제 적 얘기야.
-당연히 지금 얘기지. 생각보다 머리가 안 좋군.
-정말로 머리좋은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잘 해야 되지 않나?


비아냥이 오가고 둘 다 잠시 침묵한 다음, 이번에는 내가 말을 걸었다.

-이유는?
-말 못 해.
-어째서?
-진짜 바보 아니야?


지금은 더 이상은 무리인가.

-뭐 됐어. 그런 일이라면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지.
-아니. 너보고 도와달라는 게 아냐. 더 이상 우리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가르쳐 준 거니까. 지금 내 얘긴 전부 잊어버리고… 다신 우리한테 말 걸지 마.
-끼어들지 아닐지 결정하는 건 네가 아닌데.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너희 둘만큼은 아니지.
-그건 인정해… 그러니까 머리가 이상한 우리랑은 별로 안 친한 게 좋을 거라고 충고하잖아.


재미있어서.
흥미가 있으니까.
그런 대답도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극히 당연하고, 그러면서도 진실이 담긴 대답을 끄집어냈다.

-그녀석이 치는 포르텔 소리에 관심이 있어서… 랄까.

지금 생각해 봐도, 크리스의 포르텔 음에는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연주회에 간 적도 있지만, 다음날에는 그걸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난 음악 자체에 흥미가 없었다.
크리스의 음은 그렇지 않았다. 귀를 틀어막고 싶을 만큼은 아닌데도, 어딘가 불쾌한 느낌을 주는 그 음은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만약 크리스가 체나콜로에서 포르텔을 연주한다면… 나는 방에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짜증이 나도 결국은 마지막까지 다 들어버리겠지. 이유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게는 밖으로 나갈 권리가 있는데.

-…잊어먹고 말 안 한 게 하나 더.
-뭔데?
-혹시라도 딴 사람한테….
-그건 아까 들었잖아.
-그 다음 얘기. 다른 누구보다, 크리스한테 말하면 절대로 가만 안 둬.
-…….
-그렇게 못 하겠다면 아까 말한 대로 다 잊어버려.


어깨를 움츠리며 자리를 뜨려고 할 때,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한껏 낮춘 목소리로 토르티니타가 물었다.

-대답은?

미처 대답하기 전에, 1교시가 끝났음을 알리는 벨이 울려퍼졌다.
강의실에서 나오는 학생들로 복도는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마주 본 채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흘러…….

-둘 다 뭐 하고 있어? 1교시 다 끝났잖아.

크리스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으응, 아무것도 아냐. 잠깐 얘기에 좀 빠져서.


웃으면서 토르티니타가 대답하자, 크리스는 이번에도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따라 웃었다.

-신기하네. 토르타가 이야기를 하느라 수업을 빼먹다니.
-어이, 크리스.
-응? 왜 그래 아시노?


제정신이 아니야. 뭔가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

-이렇게 매일 비가 와서 힘들겠다.

크리스는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곤란한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늘 있는 일인데 뭐.


【12】
서로에게 꼬옥 붙은 채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아시노, 1교시는 땡땡이?

몇 번인가 이야기한 적이 있는 같은 반 여학생이었다. 이름은… 뭐였더라?

-포르텔 역사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여느 때처럼 가볍게 대답하자, 그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그제서야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방금 얘기하던 사람, 크리스 베르틴 맞지?
-…으응.
-평소엔 누구하고도 통 말을 안 해서 깜짝 놀랐어. 수업시간에도 먼산만 쳐다보고. 아시노랑 친구야?
-…글쎄?
-아하하, 아시노는 누구하고도 얘기 잘하는구나.
-그런 거지.
-근데 걔 어딘가 음침하지 않아? 맨날 같이 있는 여자애랑 이상한 얘기만 하고.
-이상한 얘기?
-'비의 거리'라든가, 뭐더라… 비 얘기라든가. 아시노는 뭐 아는 거 있어?


아주 잠깐 망설인 다음 대답한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슬쩍 눈길을 돌려 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토르티니타가 미소짓고 있었다.

-여기 역사에 관심 있는 거 아닐까?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것도 그렇네.


다른 사람들 있는 자리에서 비 얘기는 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충고해 둘 필요가 있겠다.


【13】
-비가 내리는… 환상….

팔의 목소리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마치 다른 사람의 불행을 진심으로 동정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미안하지만 나도 거기까진 모르겠네요.


그로부터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난 모르고 있다.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했지만, 아무리 해도 들어맞지 않는 조각이 있었다.

아리에타.

편지 속에만 등장하는 크리스의 애인. 크리스는 그녀에 관해 거의 말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도….

착 가라앉았던 말투를 바꾸며, 팔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시노군이랑 크리스군은 정말 좋은 친구인가 봐요.
-…그렇지 않은데.
-크리스군 이야기를 할 때면 아시노군 얼굴이 편안해지는 걸요.
-그래요? 기분 나빠지는 얘기같은데….
-그래도, 다른 사람 일로 그렇게 화를 내고 할 수 있다는 건, 역시 아시노군이 좋은 사람이라 그래요.


부정하는 말이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른다. 그녀의 따뜻한 말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아니… 난 그녀석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이용?
-그녀석의 포르텔 소리에는 가치가 있어요. 그러니까 친구 흉내만 내는 거지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덧붙인다.

-날 경멸하나요?
-아니오.


팔은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난 알아요. 아시노군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4】
-함께 저녁 어때요?

크리스 이야기를 한 다음, 그녀에게 식사 초대를 받고 집까지 따라왔다.
지금까지 여자 방에 들어와 본 적은 꽤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수수한 곳은 처음이었다.

-집이 별로 여자답지 않아서 미안하네요.
-아…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권하는 대로 앉은 의자도 쿠션조차 없이 딱딱하고 차가웠다.

-얼른 요리 만들게요.
-…네.


솔직히 말해서 놀랐다. 잔뜩 쌓인 쿠션이나 화사한 커튼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는 이런 방에, 정말로 그녀가 살고 있는 걸까?
학원이 위치한 장소가 장소인 만큼, 혼자서 지내는 학생도 적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부모 도움으로 아무런 부족함도 없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귀족이나 부잣집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포르텔과는 국가에서 지원을 해 주기 때문에, 학생 신분으로 일을 하면서 혼자 사는 경우도 있다는 말은 들어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포르텔 쳐도 돼요. 이 동네에선 연주가 시끄럽다고 따지는 사람 없으니까.

단칸 거실에서 부엌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여기서 말을 걸면 저쪽에서 들을 수 있는, 이런 비좁은 공간이 그녀가 지내는 집이었다.

…결국, 나는 포르텔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팔이 만든 요리가 나올 때까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15】
그녀의 요리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호화스러웠다. 구시가지에 있는 트라토리아(※2)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집 요리를 똑같이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맛은 두말할 필요 없이 훌륭했지만, 즐거운 식사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다 먹고 난 그릇과 포크를 부엌으로 가져가는 팔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에 대해 더욱 더 알고 싶어졌다.

-설거지는 나중에 할까. 그것보다, 괜찮다면 앙상블 해 볼까요?
-…정말 노래를 좋아하는군요.
-네, 아주 많이.


허브차를 따른 컵을 책상 위에 놓으면서, 그녀는 가방에서 악보를 꺼낸다. 컵에서 김과 함께 은은한 허브향이 퍼져나온다.

-웃지 말고 들어 줄래요?
-…뭘요?


그녀는 웃음을 띄우며 주저주저 말을 꺼낸다.

-나, 프로 성악가가 되는 게 꿈이예요.
-그 실력이라면 충분합니다.
-고마워요.


연습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나도 모르게 포르텔 케이스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난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16】
밤이 점점 깊어가고, 아무리 음악의 도시라도 큰 소리로 연주하기가 곤란해질 만한 시간이 되어서야, 그녀는 만족한 듯 한숨을 쉬었다.

-처음 보는 악보라 자신없다면서, 이젠 제법 손가락이 따라오네요.
-…미안해요. 제대로 치질 못해서.
-처음엔 누구나 다 그래요.


포르텔 앞에 앉은 채로, 책상 위에서 차갑게 식어버린 허브차를 집어들며, 그녀의 뻔한 칭찬을 잠자코 받아들였다.

-팔… 당신은…….
-네?


'대체 누구인가요?' 그렇게 물으려다가, 지나치게 무례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 말을 이어받은 것은 그녀 쪽이었다.

-난…… 고아로 자랐어요.

그렇게 그녀는 띄엄띄엄 말문을 열었다. 자신이 자란 고아원에 대해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해.

-그러니까 낮에 아시노군이 한 말, 난 이해해요. 크리스군을 이용하려고 함께 있다는 거.
-아… 네.
-지금까지 이렇게 졸업연주 파트너를 찾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하고 연습을 했어요. 그렇지만 결국엔 누군가 한 사람을 골라야 하겠죠?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저버리고. 결국 난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어요.


그리고는 황급히 덧붙인다.

-…그보다 나같은 애랑 같이 연주해 줄 사람이 있기나 할지 모르겠지만.
-아니오… 팔이 누구랑 연습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말.

-나한테 말만 해 주면… 언제라도 함께 연주하겠어요.

여자 상대로 지겹도록 써먹은 말인데, 목소리가 갈라져 볼품없게 들렸다.

-마감 전날에 그런 얘기 들으면 곤란하지 않아요?
-어떻게든 할 겁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그리고는, 악보를 든 채로 서 있는 팔에게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나한테는 숭배하는 여성이 세 사람 있습니다.
-…아시노군?
-당신 이름이 내 어머니와 같았다면, 그 기적을 '운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텐데.
-어머님 성함은?
-마리아 알티에레.


작업용 문구로는 최악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정말로 그녀에게 끌리는 것을 깨닫고는, 농담스러운 말투로 얼버무리려 하고 있다.

-멋져요. 이름이 참 예쁘네요.

하지만 팔은 정말로 감탄한 것처럼 소리내어 웃었다.


【17】
-믿어도 돼요?

그녀가 침대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싸구려 침대가 삐걱거린다. 몇 번이나 경험한 장면인데도 역시 심장고동이 빨라진다.
…나답지 않게.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크리스 일로 감정에 사로잡히고.

-그럼요, 믿어 주십시오.

살며시 어깨에 손을 얹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내 등을 감싸지 않았다. 그 대신 가슴에 매달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건?
-네?
-그 펜던트.


팔의 가슴에는 녹이 슬어 검붉게 변해버린 펜던트가 가죽끈에 묶여 매달려 있었다. 지금은 그것을 소중한 듯이 손으로 감싸고 있다.

-이건…….

대답을 하면서 눈앞으로 내민다. 색만 봐서는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의 날개를 본따 만든 것처럼 보였다.

-이건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유일한 물건. 원래는 예쁜 은색이었는데, 계속 만지작거렸더니 이렇게 더러워졌어.

어느샌가 그녀가 편안한 반말투를 쓰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도 벗을 수 없어. 이건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한 날개니까.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날개를 쥔 손에 꼬옥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 더럽혀진 날개는, 당신을 닮아서 너무나도 아름다워.

팔시타 포세트.
그녀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흙투성이가 되고 더럽혀진 날개. 하지만 그것은 처음의 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멋진 말이군요.
-말 안 했던가요? 원래 난 시인이 되고 싶었답니다.


시선을 둘리며 그녀가 조용히 묻는다.

-그럼 왜 시인이 되지 않았나요?
-…알티에레. 내 이름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요… 그런 일도 있군요.


그녀는 일어서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오늘은 좀 피곤해서….
-아니… 나야말로 늦게까지 미안.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약에 팔과 그대로 끝까지 가 버렸다면… 오히려 그것을 더 후회했을 것이다.


【18】
-그럼, 이만 실례.

문 앞에서, 팔은 날 멈추려는 듯 말을 걸었다.

-오늘은 미안해요.
-뭐가 말입니까?


짐짓 모르는 척 대답하자, 그제서야 그녀 얼굴에 평소와 같은 웃음이 돌아왔다. 그래도 손은 여전히 날개 펜던트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 날개는 당신을 꼭 닮았어요. 아름답고, 그러면서….
-멋진 말이군요.


그녀는 아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앙상블을 하고 싶으면 얘기해 줘요. 언제 어느 때든,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할 테니까.
-……내 얘기를 다 듣고 나서도 그런 말을 해 줄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난… 당신에 대해 알고 싶거든요.


그 순간이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변화가, 그녀 안에서 보였다.
그것이 어떤 변화인지를 말로 표현하기는 역시 불가능했다.

-아시노군.
-…예.
-언젠가 그때가 오면…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마치 예언자처럼, 전혀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시노 알티에레.

그녀는 다시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언젠가 그때가 오면.


End


※1 : cenacolo. 본편에서는 '살롱'과 같은 뜻으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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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trattoria. 이탈리아의 대중음식점. '레스토랑'과 같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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