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출처 : http://www.kogado.com/html/kuroneko/sr/

번역문 작성 : CARPEDIEM(mine1215@lycos.co.kr)

게재 : C'z the day(http://mine1215.cafe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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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용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심포닉 레인』의 소개 페이지에 실린 캐릭터별 단편 스토리를 번역한 것입니다. 게임 본편보다 약간 앞 시기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만약 게임을 플레이중이라면 모두 클리어한 다음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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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phonic Rain Short Story
Prelude 01 - 『Arietta Fine』


【1】
-이제 당분간은 못 만나는 거야?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추운 밤이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이 돌이 깔린 지면을 비추고 있다.
그 불빛 바로 아래에 멈춰서서, 아리에타는 그렇게 말했다.
어딘가 섭섭한 듯한, 그녀다운 연약한 목소리였다.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기라도 하듯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목도리를 고쳐 두르고 나서 그녀의 물음에 대답한다.

-…그렇구나. 내일이면 기차를 타고 떠나야 해.
-그런가.


두 사람 모두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벌써 몇 개월 전부터 계속 나왔던 말이고, 처음엔 그 이야기를 하며 좋아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날짜가 지나면서 기분이 점점 우울하게 바뀌어, 지금은 그때의 기분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가… 내일이라.

알은 다시한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나서, 내 목에 팔을 둘렀다.
가녀린 몸을 살며시 끌어안고, 그녀의 양 볼에 살짝 키스한다.
알은 간지러운 듯이 작은 소리를 내고는 몸의 힘을 뺐다.
이런 식으로 알과 첫 포옹을 했던 때의 일을, 지금도 난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2】
기분좋은 피로감을 느끼며, 나는 토르티니타와 함께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구려 파이프 의자가 삐걱거릴 정도로 온 체중을 맡긴 채, 둘은 크게 한숨을 내쉰다.

-지쳤구나… 크리스.
-응, 피곤해.


창문으로 비춰드는 햇살이 붉게 물들었다.
점심 무렵에 선생님이 볼일이 있다며 외출하신 뒤로 시간이 벌써 이만큼 흐른 모양이다.
음악실의 독특한 냄새 속에서, 이번엔 크게 숨을 들이쉰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 다녔던 이 음악교실과도 앞으로 몇 달 후면 작별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나와 토르타는 이 거리를 떠나 피오바 음악학원에 다니기 위해.
알은 여기의 명물이기도 한 빵집에서 일하기 위해.
이곳에선,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학생은 드문 편이다.
그 중에서도 나와 토르타는 더욱 특별했다.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좋은 시설을 자랑하며, 수많은 저명한 음악가를 배출한 피오바 음악학원.
그 관문은 매우 좁아서, 입학할 수 있는 인원은 시험을 치는 학생수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토르타는 자신의 실력으로 당당하게 입학자격을 얻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거의 운으로 통과한 거나 다름없다.
마도악기 '포르텔'. 이름만 들으면 어쩐지 근사해 보이는 이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재능을, 난 우연히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시선은 위를 향한 채 바로 옆에 놓여 있는 포르텔 건반에 손을 얹자, '피익~'하고 김빠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게 뭐야.

토르타가 황당하다는 투로 말한다.

-그냥 만져 봤어. 치려던 거 아니야.

포르텔은 연주자를 가린다. 마력이 없는 인간은 소리조차 낼 수 없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그것을 재능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내게는 그러한 자각은 없었다.
지금보다도 훨씬 옛날, 세계에 마법이 충만해 있던 시절.
이제는 역사 교과서나 소설에나 나올 법한, 머나먼 세계처럼 들리는 이야기.

사람들은 모두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하며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교과서에는 다양한 설이 실려 있지만 진실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인해, 사람들은 마력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기나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마법의 빈 자리를 과학이 메꾸어 갔다.
지금은 증기의 힘으로 기차가 달리고, 가솔린을 이용한 자동차가 다니고 있다.
당시에 비해 지금이 더 살기 어려워졌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옛날부터 전해오는 악기가 포르텔이고, 드물게 마력을 지니고 태어나는 인간만이 이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지만, 이는 타고난 것으로, 사실상 확률의 문제일 뿐이다.
그 확률도 수만 분의 일이라고 하며, 실제로 이 나라에는 포르텔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수백 명도 더 된다.
꽤 높은 확률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내 포르텔의 음색은 -자기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그렇게 나쁘진 않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포르텔을 동경하고, 마력을 가진 인간은 대부분이 포르텔 연주자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포르텔을 중심으로 한 음악'이라는 문화 자체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의 재능이 있는 자는 우대를 받고, 그를 위한 뒷받침도 충실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이, 이제부터 나와 토르타가 다니게 될 피오바 음악학원.
수많은 유명한 포르텔 연주자와, 음악에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배출하는, 나라의 자랑이라고도 할 만한 학교이다.
그 일원이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 오늘 오전. 두툼한 봉투에 든 두 사람 몫의 합격통지서를 아리에타가 여기로 가져다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쭈욱 우릴 가르쳐 주신 음악교실 선생님도 함께 기뻐해 주셨다.
이 교실에서 피오바의 학생이 나온 게 자랑스럽다고 하셨지.
선생님이 외출하시고 알도 뭔가 일이 있다면서 돌아갔지만, 나와 토르타는 여기에 남아 마음껏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들떠 있었다.
우리 외에 다른 학생은 없다시피 한 작은 교실이어서, 예비열쇠도 갖고 있고, 평소에도 남아서 놀곤 했다.

-무슨 생각 해? 아까부터 계속 말도 없이.

갑자기 토르타가 말을 걸었다. 두 사람 다 계속 위를 향한 채 대화를 이어나간다.

-응? 옛날 일.
-어렸을 때?
-그거보다 훨씬 옛날. 역사 이야기라든지.
-그게 뭐야. 안 어울리게.


토르타 역시 꽤나 기분이 좋은지, 웃으면서 가볍게 맞장구를 친다.

-한 곡 더 칠까?
-우웅~ 목 아픈데… 한 곡 정도라면 괜찮겠지.


나도 많이 지쳐 있었지만,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누워 뒹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다시 의자에 앉으려 생각하고 있을 때,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만 돌려 누구인지를 살핀다.

-역시 남아있었구나. 다행이야.

바구니에 무언가를 잔뜩 담은 아리에타가 약간 위태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교실에 들어왔다.
선생님이 자신의 집 일부를 개축해 만든 이 교실은, 악보나 받침대를 보관하는 악기고와 화이트보드, 열 명 가량이 함께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되어 있다.
평범한 집이라면 상당히 넓은 방이겠지만, 그랜드피아노 두 대와 파이프 의자 10개가 늘어서 있어서 비좁은 느낌을 준다.
알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놓여진 의자들 사이로 걸어오더니, 내 앞에 서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뭘 보고 있어?
-천장. 피곤해서 그냥 올려다보고 있었어.


말을 나누면서 다시 일어나 앉고는, 알과 마주보도록 의자 위치를 옮겼다.

-알, 무슨 일 있어?

계속 천장을 보고 있던 토르타가 약간 언짢은 듯이 말했다.
노래를 하려던 참에 중단이 돼서 그런 거겠지.
이러쿵저러쿵 해도 토르타는 노래부르는 걸 좋아하니까.

-뭐냐니… 마중나온 거야. 이제 곧 저녁시간이잖아.
크리스도 올 거지?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우리 집은 들렀다 왔어?
-응. 둘 다 온다고.


나와 알·토르타 쌍둥이 자매는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말하자면 소꿉친구이다.
같은 또래 아이들이 있어서인지 부모님끼리도 서로 친하다.
일요일에는 각자 집에서 만든 요리를 가져와 함께 먹기도 할 정도니까.
'지난 주에는 우리 집에서 먹었으니 이번엔 알네 집에서' 하는 식으로.

-근데 저녁밥이라면서 그건 뭐야? 냄새가 좋은데.

알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서 구수한 냄새가 풍겨나왔다.
아리에타는 요리가 취미이고, 봄부터는 거리에 있는 빵집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다.
요즘 들어서는 집에서도 자주 빵을 만드는지, 우리 집까지 냄새가 날아오기도 한다.

-축하하는 뜻으로 만들었어. 원래는 3시쯤에 먹을 수 있게 만들려고 했는데… 재료가 없어서 사가지고 왔더니 늦어버렸네.

그 재료도 엄청 많이 사온 게 아닐까.
두 손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바구니에는, 쏟아질 정도로 빵이 잔뜩 들어 있었다.

-뭐 됐어. 일단 하나 먹을게. 저녁은 저녁대로 먹을 거니까.
-아… 그치만 식사는?
-일부러 가지고 온 건 우리더러 먹으라는 거 아니야?


투덜대면서 토르타가 빵 하나를 집었다. 나는 두 개를 집어 하나를 알에게 내밀었다.
알은 바구니를 옆의 의자에 내려놓고, 할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받아들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셋은 마주보고 의자에 앉아 와글와글 떠들면서 빵을 먹었다.
갓 구워낸 빵은 아무런 조미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몇 개라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달콤하고 맛있었다.
4개째에 손을 뻗었을 때, 그제서야 알이 내 손을 막았다.

-크리스, 이제 그만 먹어.
-…그래도 저녁까진 아직 한 시간은 남았잖아.
-응. 7시 정도면 다 된다고 엄마가 그러셨어.
-그때까진 배도 다 꺼질 거야.


그렇게 변명을 해 보지만, 알은 단호한 태도로 바구니를 멀리 치운다.
평소의 알은 연약하고 얌전한 느낌의 소녀이지만, 안된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그렇다고 믿는 일에 관해서는 놀랄 만큼 강한 의지를 보일 때가 있다.
이렇게 되면 얌전히 말을 듣는 수밖에 없다.
기가 센 동생 토르타도 이럴 때는 그녀에게 거역하지 못한다.

-할 수 없지. 그럼 이만 나가 볼까? 걷다 보면 배도 꺼질 테고.

그렇게 말하고 내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두 사람도 내 뒤를 따라 일어섰다.
의자를 원래 위치로 되돌려 놓고, 에어콘과 전기를 껐다. 창문으로 비춰드는 햇살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겨울이 되고 나서는 해가 정말 일찍 떨어진다. 채 10분도 되기 전에 주변이 캄캄해지겠지.
가지고 있던 예비열쇠를 우편함에 넣고 셋이서 밖으로 나온다. 총 학생수가 세 명인 음악교실은 이런 식으로 일과를 마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선생님이 우리들을 전면적으로 신뢰해 주시는 덕분에, 부재중에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요즘 들어서 '우리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하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런 걱정은 필요없을지도 모르겠다.
수업료를 받긴 하지만 금액도 얼마 안 되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가끔씩 우리한테 나오는 과자나 홍차값으로 날아가는 것 같다.
선생님은 본업도 따로 있고, 이 교실은 거의 취미삼아 하는 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한 사람이라도 새 학생이 들어오면,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음악의 즐거움을 가르치면서 이 교실을 계속 운영하시겠지.
아니, 만약 들어오지 않더라도 학생을 기다리면서 은근슬쩍 선전을 하고 다니지 않을까.
지금도 학생은 달랑 둘밖에 없으니.

알은 노래실력이 그다지… 아니, 많이 별로여서, 지금은 연습도 거의 하지 않는다.
가끔 가다 오늘처럼 우리가 뭘 하는지 엿보고는, 간식거리를 가져다 주는 게 고작이다.
음악교실을 나와, 어두워지기 시작한 길을 셋이서 걷는다.
이 근처는 민가도 별로 없고, 날이 저물면 통행인도 거의 없기 때문에 조금은 썰렁하다.
띄엄띄엄 세워진 가로등이 깜빡거리며 들어오기 시작한다.
우리들의 집은 선생님 댁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셋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마지막 모퉁이에서 토르타가 문득 멈춰섰다.

-난 이대로 들어갈 건데, 두 사람 어떡할래? 좀 더 걷다가 올 거야?

갑자기 토르타가 이런 말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배려를 무시하는 건 어느 쪽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에? …아, 그렇구나. 그럼 알, 한 바퀴 돌고 올까?
7시까지 돌아오면 되는 거지?
-아, 으응. 그렇긴 한데… 토르타는?
-방해되기 싫으니까 둘이서 다녀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토르타는 바로 모퉁이를 돌아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알과 함께 바라본다.

-가 버렸어. 괜히 토르타가 신경쓰게 만든 거 같네.

알이 조금은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토르타의 행동에 제일 당황하고 있는 건 아리에타였다.
나는 별로 신경쓰이지도 않고, 무엇보다 토르타 자신이 스스로 한 일인데.
토르타의 호의를 받아들여, 우리들은 똑바로 뻗은 길을 걷는다.
다음 모퉁이를 지나 조금 멀리 돌아서 가면,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딱 7시가 되어 있을 것이다.
데이트라고 할 것까진 아니지만, 이런 단둘만의 산책은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시간이었다.


【3】
나와 알이 사귀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특별한 계기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아리에타를 좋아한다고 깨닫게 된 것은 그렇게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소꿉친구인 쌍둥이 자매는 너무나도 가까이 있어서, 어느 시기까지는 '친구'라는 위치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함께 놀고, 함께 공부하고, 가족처럼 허물없이 지내고, 때로는 가족 이상으로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까.
알과 토르타를 이성으로 의식하게 된 것도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리고, 토르타가 아닌 알을 선택한 것도 사소한 이유에서이다.
말로 표현하자면 진부하고 별 것 아닌 일이지만, '알에게는 내가 필요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토르타는 노래의 재능을 타고나, 그에 걸맞은 노력을 통해 실력으로 자신의 미래를 움켜쥐었다.
물론 알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고, 그에 대한 노력을 하면서 그녀 나름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함께할 거라면 같은 음악의 길을 가고 있는 토르타를 택하는 편이 낫다고, 주변 사람들 누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난 아리에타를 택했다.

각자의 부모님도 그러했지만, 그 결정에 대해 가장 놀란 것은 알 본인이었다.
알은 자신이 노래가 서투르다는 것에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에서 내세우는 음악이라는 분야에서, 동생은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 일로 그녀는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등록은 계속 하고 있으면서도 음악교실엔 나오지 않고, 점점 집안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음악 자체는 좋아해서 이따금씩 우리들의 연주를 들으러 찾아왔다.
언제나 먼 발치에서, 누구에게도 눈치채이지 않게, 조용히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차렸을 때, 난 알을 좋아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아름다운 노랫소리. 틀림없이 그것은 훌륭하다.
그러나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훌륭한 일이다.
알이 쓸데없는 열등감을 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것이며, 그녀는 좀 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약하고, 자신을 인정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도 사실을 따져 보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라, 결국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뿐이다.
긴긴 회상에서 깨어났을 때는, 주변은 이미 완전히 캄캄해져 있었다.
문득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알은 언제나 그렇듯이 조용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때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가 현실로 돌아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

-미안. 잠시 딴 생각 했어.
-무슨 생각?


살며시 웃으며 알이 묻는다.

-예전 일… 알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알은 아직도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 동작이 너무 귀여워서, 무심코 끌어안고 싶어진다.
하지만 우리들은 아직 손조차 잡아 본 일이 없다.

-…어, 어쨌든, 그… 축하해.
-응?
-피오바에 합격한 거.
-아아, 고마워. 그치만 난 포르텔을 연주할 수 있다는 거 말곤 없는데.
-'말고'가 아니지. 지금까지 쭉 열심히 연습했잖아.
-그냥 음악이 좋을 뿐이야. 특별히 열심히 한 적도 없고.
-그렇다면 더욱 잘된 일 아니야?
-…응. 고마워.


진지한 알의 말투도 그녀답게 느껴져서 어쩐지 기뻤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연습한 보람이 있다고 느껴진다.
무심코 미소를 짓고는,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린다.
그와 동시에, 알이 어두운 말투로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래도… 그렇게 되면 앞으로 3년 동안 못 만나잖아.
-…에?


황급히 돌아보자, 슬픈 표정으로 가로등 불빛을 받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주변에 인기척은 없다.
북부지방에 위치한 이 거리는,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추워진다.
그런 추위 속에 서 있는 알을, 정신을 차려 보니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품 안에서 알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까의 말을 생각해 보면 '미안'이라든가 '고마워'라는 그런 얘기겠지.
설령 아니라 해도, 그녀를 안은 손을 늦출 필요는 없다.
잠시 동안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가, 알은 내게서 몸을 빼며 마지막 순간에 말했다.

-진심으로 축하해.


【4】
그 후로 수 개월 동안, 나는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학생용 아파트의 임대계약에, 이사 준비, 교복과 교재 준비 등등.
그래도 휴일엔 되도록 알과 자주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남겨진 시간에는 한도가 있다.
우리 두 사람에게는 그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들은 마지막 남은 하루를 함께 지내고 있다.

-잠시 동안만, 울어도 될까?

내 품에 안긴 채 알이 속삭였다.
나는 대답 대신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잠시 그러고 있었지만, 훌쩍이거나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조용히 어깨를 들먹이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져서, 나까지 울어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알은 꿋꿋하게 웃음까지 보이면서 포옹을 풀었다.

-난처하게 해서 미안해. 이젠 안 울 테니까 괜찮아.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비뚤어진 목도리를 다시 고쳐 맸다.
알이 손수 떠 준 목도리를 두르자, 그녀의 향기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목도리가 때맞춰 다 돼서 다행이야.
그래도 피오바는 여기보다 훨씬 남쪽이니까 별로 필요는 없겠지만.
-겨울은 어디든지 다 추워. 소중하게 쓸게.


그리고 나서 얼마 동안,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하고 싶은 것들은 너무나도 많은데,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머릿속으로는 이것저것 생각하지만, 그게 정말로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렇게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말은 나오지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알이었다. 이럴 때는 역시 여성이 강하다는 건가.

-맞아, 크리스한테 줄 게 하나 더 있어.
오늘 주지 않으면 짐 속에 안 들어갈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가방에서 두터운 봉투 비슷한 물건을 꺼냈다.
두께는 10cm 정도일까.
자세히 보니 진짜로 봉투였다. 뒤이어 비닐로 싸인 종이다발이 나왔다.
그것도 굉장히 많은 양이.

-그건?
-지난번에 매주 편지 쓴다고 했지? 그래서 준비했지요.
이 편지세트, 전부 합쳐서 150장이 넘어.
-…대단한 양이로군.
-크리스가 돌아올 때까지 날수를 계산해서, 매주 한 번씩 보낼 수 있게 맞췄어.
-…시간이 많았구나.
-응. 그동안 계속 못 만났잖아.


알이 토라진 듯이 입술을 내밀고, 두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웃었다.
얼마 전이었다면 나도 이런 농담은 안 했을 것이다.
만약에 했더라도, 알이 울상을 짓는 걸 보고는 바로 사과했겠지.
그래도 농담을 나눌 만큼 여유를 되찾을 시간은 있었던 모양이다.
알에게서 편지세트를 받아들자, 의외로 무겁고 양도 꽤 많았다.

-되게 많네. 뭐, 3년분이니 당연한가.
-응, 맞아. 내 방에도 똑같은 걸 사 놨는데, 서랍 하나가 그걸로 꽉 찼어.


고무밴드로 묶인 봉투 한 장을 손으로 만져 보고, 한 장 한 장은 엄청나게 얇다는 것을 실감한다.
'3년분의 무게'라고 하면 될까.
두툼한 봉투다발을 손에 들고, 나는 다시한번 알에게 말했다.

-매주 편지할게. 학교에서 뭘 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쓸 거리가 없을 땐…
썰렁한 얘기만 적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쓸게.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얼굴로, 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침울한 분위기를 날려버리기 위해, 손에 쥔 봉투다발을 들고, 이번엔 밝은 말투로 덧붙였다.

-그래도 이만큼이나 있으면 전혀 줄었다는 느낌이 안 나겠어. 처음 한 달 정도는.
-…그렇네. 1년이 지나야 겨우 1/3이니까.


웃게 해 주려던 것이 도리어 실패. 금세 알아차렸다.
그 말은, 홀로 지내야만 하는 시간의 길이를 재확인시키는 것이었으니까.

-…그, 그게 그러니까.
-아, 그치만!


어서 다음 말을 생각해내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뭔가 좋은 일이라도 생각난 듯이 알이 밝게 말한다.

-생각해 보니까, 전혀 줄어들지 않아.
-에?
-이쪽에서 봉투를 하나 보내면 크리스한테서 편지가 하나 오잖아.
줄어든 만큼 똑같이 늘어나니까.
-…그래도, 그러면.


그러면 어째서 알은 저렇게 밝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 의문도 다음에 이어지는 말로 금방 풀렸다.

-내 서랍이 크리스 편지로 채워진다고 생각했더니 조금 기분이 좋아졌어.
-아… 그렇구나.
-언젠가 서랍이 편지로 꽉 차면 크리스가 돌아오는 거지?
-…그거 좋은데.
-그치? 응, 그렇게 생각해야겠어.


알은 웃는 얼굴로, 자신이 생각해낸 명답에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걸로, 앞으로 3년을 지낼 새로운 집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무엇을 할 것인지가 정해졌다.
학생용 붙박이 가구 중에 제일 멋진 서랍을 찾아서 거기에다 이 편지다발을 넣어야지.
그리고 그날 중으로 첫번째 편지를 써야겠다.
내용은 아무래도 좋다. 생각보다 방이 깨끗하다든가, 지저분하다든가.
창문으로 보이는 경치라도 상관없어. 내가 느낀 전부를 편지에 적을 것이다.

-그럼 이만 돌아가야지. 토르타도 부모님도 걱정하실 텐데.
내일 아침 일찍 출발이잖아?
-아침 6시 기차였던가. 그걸 타도 한밤중에 도착이래.
-크리스는 아침잠이 많으니까 서둘러야겠네.


알은 웃음을 지으며, 빠른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 걸어간다.
아직 아쉬움은 남아있지만, 그것도 편지에 담아 이야기하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편지가 우리들을 이어 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조금은 희망을 가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아리에타! 좀 천천히 가!

그것이 기뻐서, 다시한번 그녀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