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출처 : http://www.kogado.com/html/kuroneko/sr/

번역문 작성 : CARPEDIEM(mine1215@lycos.co.kr)

게재 : C'z the day(http://mine1215.cafe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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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용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심포닉 레인』의 소개 페이지에 실린 캐릭터별 단편 스토리를 번역한 것입니다. 게임 본편보다 약간 앞 시기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만약 게임을 플레이중이라면 모두 클리어한 다음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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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phonic Rain Short Story
Prelude 02 - 『Tortinita Fine』


【1】
눈을 감은 채, 나는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치즈가 타는 소리.
피어오르는 토마토 소스의 향기.
방 안을 가득 채운 따스함은 여름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와, 냄새가 좋네. 벌써 다 됐나?

금세 달려온 토르타는 그렇게 말했다.
오랜 경험과 느낌으로, 조금 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부러 질문을 해 본다.

-정말 다 됐을까?
-네? 그건 잘 모르겠는데. 할머니는 알지 않아요?
-너한테 묻고 있잖니. 어떠냐?
-에? 으응… 조금 더 있어야… 되려나?


자신없는 듯한 목소리로, 토르타는 오븐에 얼굴을 가까이 대 보는 모양이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안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엔 확실히 말했다.

-응, 아직 좀 더 익혀야 돼.

토르타도 요리에 관해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안심하며 미소를 짓자, 토르토는 기분좋은 듯이 작게 환성을 질렀다.

-다음엔 직접 만들어 볼래?
-우웅… 오늘같은 날은 말고. 할머니가 외출하시는 때라면 혼자 만들어 볼래요. 그럼 실패해도 미안할 사람도 없고.


오늘은 크리스가 집에 오는 날이다.
1년에 네다섯 번 정도이지만 일부러 날 보러 와 준다.
그애가 아직 어렸을 무렵, 나도 손녀들과 함께 크리스네 옆집에 살던 때가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지낸 적이 없었던 크리스는 가끔씩 우리 집으로 놀러와서는 날 '할머니'라고 불렀다.
나도 손자가 하나 생긴 듯한 기분으로 귀여워해 주었다.

내가 홀로 피오바 거리에 이사를 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해서 이 거리에는 동경을 품고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연주에는 재능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말 그대로 동경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고 나름대로 여유가 생기자, 다시 욕심이 들었다.
매주, 매월 거리의 콘서트 홀에서 펼쳐지는 연주회는 -아닐 때도 있지만- 대부분 적당한 가격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살기로 한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게다가 '언젠가는 여기서 살고 싶다'고 계속 말을 했기 때문에 아들 내외도 별로 반대는 하지 않았다.
반쯤은 포기한 거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내 눈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인성 백내장임을 초기단계에서 알게 된 덕분에, 지금은 이렇게 요리도 큰 불편 없이 만들 수 있다.
몇 년에 걸쳐 물건들이 놓인 장소를 외우고, 대부분의 생활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취미로 시작한 이 생활도, 토르타가 집에 오면서부터 나름대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크리스가 다니는 포르텔과와 달리, 국가로부터의 지원이 일체 없는 성악과에 진학하는 것은 평범한 서민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
피오바의 학생은 귀족이나 그들에게 입양된 고아들이 대부분이지만, 토르타같은 일반가정 출신의 아이들도 그 수가 적지 않다.
집세 등으로 인한 아들 부부의 짐을 덜어주고, 무엇보다 귀여운 손녀에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기에 온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렇게 하여,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지만 나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쁜 것이 크리스가 놀러오는 이런 날이다.

-그래서, 크리스는 언제쯤 온다니?
-오후에 온댔어요.
평소때처럼 점심은 자기 집에서 먹는다고.
-그러니…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크리스는 여기에 온 후부터 나와 조금 거리를 두게 되었다.
사실은 오기 전부터 그랬을 터이지만, 나한테는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컸기 때문이라고 보아넘기기에는 힘든 구석이 있다.
아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건 답답한 노릇이다.
어릴 때의 기억을 되짚어 봐도, 나 역시 똑같은 고민을 하면서 자라났다. 조언을 해 주거나, 약간이라면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단, 중요한 부분은 역시 그애들 자신의 힘으로 넘어서야만 한다.
노인이라는 자리는 이렇듯 불편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그럼 일단 라자냐(※1)를 구워 놓으렴.
그렇게 해 두면 나중에 데우기만 하면 되니까.
-알았어요~


크리스가 오고 나면 요리하기도 쉽지 않으니, 준비는 일찍부터 해 둔다.
토르타는 내 지시를 기다리며 이것저것 준비를 시작했다.


【2】
그 뒤로 몇 시간이 지났을까.
조심스럽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기다리다 지친 듯한 토르타가 큰 소리로 대답하며 맞으러 나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점심 지나서라면 기껏해야 2시잖아.
-…미안. 몸이 좀 안 좋아서.


문 앞에서 들려오던 두 사람의 대화는 크리스의 마지막 한 마디로 끝을 고했다. 두 그림자 중에 하나가 내게로 다가오더니, 의자 팔걸이에 놓인 내 손을 만졌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정이 좀 있어서.

손이 약간 뜨겁다. 크리스는 나른한 목소리로 내게 그렇게 말했다.

-감기니? 열이 좀 있는 모양인데.
-그런 것 같아요. 어젯밤부터 여름감기가 들었는지.


잠시 기침을 하고 나서 크리스는 간신히 대답한다. 감기라면 그렇다고 진작에 말해 줬으면 좋았잖니.

-그럼 무리해서 올 필요는 없었는데. 몸이 좋을 때 언제든지 오렴.
-…아니오. 약속을 했으니까.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크리스에게 의자를 권하고, 오늘은 이대로 재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언제나 예의를 차리던 녀석이 바로 자리에 앉았다. 꽤 심한 모양이다.

-좀 누워 있을래?
-…아뇨,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모처럼 왔는데.


그렇게 말하며 크리스는 책상 위에 무언가를 놓았다. 아마도 포르텔 운반용 케이스겠지.

-잠깐만 크리스, 너 비틀거리잖아. 오늘은….
-괜찮다니까. 포르텔도 가져왔으니 평소때처럼….


걱정하는 토르타의 말을 가로막으며 크리스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
그 말을 제지하듯이, 이번엔 내가 이름을 불렀다.

-크리스.
-…네.
-조금 누워 있거라. 손님용 방이 있으니까.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하자, 크리스는 어린아이처럼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3】
1년에 몇 번이긴 하지만, 크리스는 이렇게 집에 놀러와서는 포르텔을 연주해 준다. 점점 실력이 늘어가는 과정을 귀로 확인할 수 있어서 언제나 기대를 하고 있지만, 사정이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포르텔은 어디까지나 건강한 얼굴을 보면서 덤으로 듣는 것이지, 억지로 연주를 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2층에 있는 손님용 침실로 크리스를 안내하려 할 때, 토르타가 뒷일은 전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며 말을 꺼냈다.

-할머닌 쉬고 계세요. 시트 갈고 하려면 힘드니까.
-…알았다. 그럼 너한테 맡길 테니 준비 다 되면 부르렴.
-네에~


기운차게 대답을 하고 토르타는 2층으로 올라갔다. 낡은 건물이긴 해도 튼튼하게 지어진 단독주택은 내게는 과분하다는 생각도 든다. 1층은 거실과 부엌, 그리고 내 침실. 2층에는 토르타의 방과 크리스가 쉴 손님용 침실 등이 있어서, 공간은 충분하다.

-…죄송해요. 모처럼 왔는데.

말투까지 어려졌는지, 크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괜찮다. 그런데 어째서 집에서 안 쉬고?
-닌나 할머니가 기다리실 거 같아서. 게다가…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잖아요.


요리에 관해서는 나도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 그것을 좋아해 주는 건 고맙지만, 우선은 자기 몸을 제일로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말만 하면 언제라도 만들어 줄 텐데.
-매일 부탁할 수는 없잖아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힘이 들 텐데도 크리스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물론 얼굴이 확실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말투에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혼자서 쓸쓸했니?
-그, 그게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감기에 걸렸을 때 누군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적이. 일단 부정은 했어도 전혀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그래. 조금만 더 기다려라.

크리스는 심통이 난 듯 아무 말이 없었지만, 토르타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저… 그럼 조금만 쉬겠습니다.
-그러려무나. 그런데 저녁은 어떻게 할까?
-먹을 수 있다면 먹어야지요. 그걸 보고 왔는데.
-기다렸지… 자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랑 가셔.


이런 상황에서도 입발린 소리를 하고 있는 크리스를, 토르타가 잡아 끌듯이 침실로 데려간다. 오랜만에 집에 와 줘서 기쁜 건지, 아니면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게 기쁜 건지, 어쨌거나 토르타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크리스의 상태는 나중에 보러 가기로 하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감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치즈가 담뿍 들어간 라자냐는 환자 식사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메뉴를 바꿀 필요가 있다.
부엌으로 가서 무엇을 만들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아침은 아무것도 안 먹었을 테니 리조토(※2)를 만들어 줄까 생각하고 있을 때, 토르타가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라? 뭐 만들어요?
-소화 잘 되는 걸로. 오늘 만든 라자냐는 돌아갈 때 싸 주자. 크리스 배 고프다니? 물어보고 왔지?
-으… 역시 예리하다니까. 응, 아직 아무것도 안 먹었나 봐요. 그것도 어제부터. 식욕은 없다지만 억지로라도 먹여야겠어.
-리조토를 만들까 하는데….
-아, 응.
-토르타, 만들어 볼래?
-으아… 난 됐어요. 아직 요리도 서툴고.
-평소에 연습하고 있지? 이런 건 소중한 사람을 위해 만들 때 솜씨가 빨리 느는 거야.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토르타에게 크리스는 충분히 소중한 사람이었다. 감출 생각도 없는지, 본인이 눈앞에 있는데도 뻔히 보이게 행동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크리스는 언제나 곤란한 듯 웃으며 얼버무리곤 하니까, 눈치를 못 챈 것도 아니겠지.
…아리에타에 관한 것도 있으니, 당사자들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는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아이들의 문제는 언젠가 그들 자신의 손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뒤에서 돕는다. 그것조차도 옳은 일인지 나는 확신하지 못한 채. 그저 세 아이들의 행복을 기원할 뿐이다.

-으음… 그럼 만들어 볼래.

주저주저, 그러면서 쑥스러운 듯이 토르타는 말했다.

-…그래, 그러렴. 평소에 연습을 했으니 크리스한테 성과를 보여줘야지.
-…아, 으응. 근데 만든 건 할머니로 해 주시면 안돼요?
-어째서?
-내가 만들었다고 하면 틀림없이 안 먹을 테니까.
-먹은 다음에 말해 주면?
-그것도 안돼. 나중에 '역시 맛없었어'라고 그럴 거야.


토르타의 목소리에 어딘가 체념한 듯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 크리스의 머릿속에는 틀림없이 그렇게 정해져 있을 것이다. 알은 요리를 잘하지만 토르타는 서툴다. 반대로 토르타는 노래를 잘하고 알은 음치.
사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정해버리는 이유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오히려 알과 토르타야말로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내리고, 그 틀 안에서 자라왔으니까.
그러나 지금, 토르타는 변하려 하고 있다. 모자랐던 부분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기쁜 일이다.

-언젠가 더 실력이 늘면 크리스를 놀래켜 줄 거야. 지금은 아직 안돼.
-알았다. 그래도 대충 만들면 안돼요. 내가 만든 걸로 되니까.
-괜찮아요. 약간 눌어도 할머니가 만들었다면 크리스는 아무 말 안 해. 게다가 감기라서 맛도 제대로 모를 거고.
-감기라서 자잘한 맛에 더 민감한 거야. 간이 너무 진해도 너무 싱거워도 안돼. 건강할 때 먹는 요리보다도 훨씬 어려워요.
-…으, 열심히 하겠습니다아.
-좋아. 마지막에 맛을 봐 줄 테니까 서둘러 만들거라.
-응.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얼마 안 있어 냄비를 불에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삐 움직이는 토르타의 그림자를 눈으로 쫓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언제나 요리는 내 역할이었지만, 이제 교대할 시기가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토르타가 학교를 졸업하고 이 집에서 나갈 때까지의 짧은 동안이라는 게 좀 아쉽지만.


【4】
푹 졸인 수프가 점점 줄어들고, 냄비에서 '폭폭'하고 먹음직스러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토르타는 열심히 재료를 섞으며 몇 번씩 맛을 보고 있다.

-할머니… 맛 좀 봐 주세요.
-그래.


작은 그릇과 스푼을 들고, 토르타는 요리를 살짝 식힌 다음 내게 건네주었다.

-…음, 양념은 괜찮구나.
-저, 정말?
-그럼. 거짓말을 왜 하겠니. 나중에 크리스한테도 물어보렴?
-…그건 좀. 맛없다고 하면 싫어.
-…마음대로 해라. 어쨌든 크리스한테 빨리 뭐든 먹여야지.
-네에~


완성된 리조토를 토르타가 조심스럽게 2층으로 가지고 올라간다.
내 다리도 이젠 신통치가 않은지라, 이럴 때 토르타가 있어 주어서 도움이 된다.
그 뒤를 따라 2층으로 향한다.
튼튼한 나무난간을 붙잡고 한 계단 한 계단을 천천히 올라간다.
숨이 찬 모습을 보이면 두 사람이 걱정을 할 테니, 계단을 다 오른 후에 일단 숨을 고른다.
이럴 때는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구나' 하고 실감하게 된다.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크리스가 있는 방에서 말다툼소리가 들린다.
늘 있는 일이려니 생각했지만, 결국 예정보다 빨리 방으로 향하고 말았다.

-욘석들, 뭘 하고 있니.

문을 열며 조용히 말하자, 두 사람은 하던 말을 딱 멈추고 이쪽을 보았다.
흐릿한 시야이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아… 그게, 크리스가 혼자서 먹지도 못하면서 자꾸 불평을 하니까.
-…먹을 수 있다니까.
-그래 놓고서 흘렸잖아!
-열 때문에 손이 미끄러진 거야!
-그게 못 먹는 거지!
-…자자, 두 사람 다 진정하거라.


윗몸을 일으켜 세워 반박을 하고 있던 크리스도, 크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열이 있는 상태에서 큰 소리를 낸 탓이겠지.

-그럼 내가 먹여 줄 테니 토르타는 수건이라도 가져오렴. 크리스는 이제부터 땀을 내야지.
-…네에.
-크리스도 그러면 됐지?
-…네.


무심결이 웃음이 나올 뻔했다. 크리스도 토르타도 아직 어린애들이라니까.
아쉽긴 하나, 늙은이는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고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아야 한다.
너무 비뚤어진다면 도움말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이 둘이라면 괜찮겠지.
나는 믿고 있다.

-…감사합니다. 정말 맛있어요.
-그러니? 약간 불안했는데.
-평소처럼 맛있어요.
-그거 다행이구나.


크리스는 리조토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만족스러운 듯이 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보고 나도 일어선다.

-나중에 토르타가 수건을 가져올 테니 지금은 자거라.
일어나서 땀이 많이 났으면 베개맡에 놓아둔 수건으로 몸을 닦고.
토르타는 자기 방에 가 있으라고 할 테니 부르면 금방 올 게야.
갈아입을 옷도 준비할 거니까 사양하지 마라. 알겠니?
-…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 토르타가 수건을 든 채 방 안을 살피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 할머니.

안에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토르타는 속삭였다.
나도 따라서 소리를 낮추었다.

-전부 다 들었니?
-…응.
-맛있다더구나.
-할머니 앞이라 그래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목소리에는 기쁜 빛을 숨길 수 없다.

-그런 걸로 해 두자. 끝까지 다 들었니?
-응. 수건을 놓고 나와서 내 방에 있으면 되지요?
-그래. 부탁한다. 난 내려가 있으마.
-맡겨 두세요.


토르타는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5】
그리고 나서 얼마 동안, 나는 1층 거실에서 쉬고 있었다.
토르타는 자기 방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지만, 어쩌면 크리스의 상태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이미 밤이 다 되었다. 우리들도 저녁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주요리는 낮에 많이 만들어 놓았으니 크리스 몫을 챙겨 두면 된다. 문제는 언제 먹을 것인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토르타가 돌아오지 않을까 기다렸지만, 내려올 기미는 전혀 없다.
다시 2층으로 올라가는 건 힘들지만, 이젠 그런 말을 하고 있을 상황도 아니다.
2층 계단을 올라 다시한번 숨을 고른다. 아무런 소리도 안 나는 걸 보면 토르타도 자기 방에서 조용히 있는 걸까.
크리스가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니 문에 귀를 가져다 댄다.
그러자 자장가를 부르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옛날부터 내가 들려주었던 노래다. 아마도 토르타가 부르는 거겠지.
그냥 놔두고 싶었지만, 이대로 계속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조심 문을 열자, 노랫소리가 뚝 그쳤다.

-…어라?

크리스는 침대에 누운 채 멋쩍은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다.
그 옆에 놓인 의자에는 토르타가 앉아 있었다. 아니,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상반신을 침대에 얹고 크리스의 발치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노래가 들린다고 생각한 건 기분 탓이었을까.

-일어나 보니 이렇게 돼 있었어요.

처음 왔을 때보다 한결 기운찬 목소리로 크리스가 대답한다.

-…으응. 푹 잤니?
-네. 감사합니다.


평소때처럼 예의바른 말투로 돌아왔다. 그게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동시에 안심이 되었다.

-열은? 아직 몸이 뜨거워?
-이젠 괜찮아요. 벌써 바깥도 어두워졌으니 좀 있다가 돌아가겠습니다.
-자고 가지 않을래? 아침에 돌아가면 학교도 괜찮을 텐데.
-죄송해요.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그 이상은 아무 말도 없이, 크리스는 창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방은 충분히 따뜻했으므로 환기를 위해 창을 연다.
상쾌한 저녁바람이 불어와 방 안의 공기를 바꾸어 놓는다.

-…기분 좋네요.
-그렇구나.


그렇게 대답하고 잠시 더 밖을 보고 있자, 크리스가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반가운 듯이 말을 꺼냈다.

-이거… 무슨 냄샌가요? 어쩐지 되게 그리운 느낌인데.
-응? 냄새?


창가에는 허브를 심은 화분이 놓여 있었는데, 크리스가 그 향기를 맡은 모양이다.
그립다고 하는 걸 보니 예전에 자기 집에도 있었겠지.
그 중에서도 향이 강한 것을 골라 잎 하나를 땄다.

-이거 말이니? 이건 로즈마리. 요리에도 쓰이고 차를 달여도 좋단다.

크리스의 코앞에 잎을 가져가자, 크리스는 맞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었다.

-아, 이거 맞아요. 오래 전… 닌나 할머니 방에서 똑같은 향기를 맡은 적이 있어요.
-계속 키우고 있단다. 예전 것은 저쪽 집에 남겨두고 왔지만, 자주 쓰는 거라 여기서도 키우고 있지.


로즈마리는 주로 집중력을 키워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지만, 감기에도 잘 듣는다.

-그럼 이걸로 허브티를 달여 줄까? 감기에도 좋단다.
-허브티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마셔 본 기억이 나네요.
-크리스는 맛이 쓰다면서 다 마시질 못했지… 기억나니?
-…기억해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허세를 부리듯 말해 놓고, 크리스는 눈길을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토르타가 곤히 잠들어 있다.

-토르타는 언제 잠들었니?
-모르겠어요. 전 밥을 먹고 바로 잤는데, 일어나 보니 이렇게 돼 있어서.
-그렇구나. 그렇게 말다툼을 해도 너흰 친하니까.
-…소꿉친구잖아요.


쑥스러운 것도 아닌, 그렇다고 해서 괴로운 것도 아닌, 어딘가 쓸쓸한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지금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것도 당연할 것이다.
크리스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지만, 침묵을 이기지 못한 듯 나를 향해 몇 번인가 고개를 저었다.

-…알 말이니?

핵심을 찌르듯 물어보았다.
크리스는 감정이 둔한 아이는 아니니 토르타의 마음도 눈치채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답할 수는 없다.

-…네.

얼마간 뜸을 들인 후, 짧게, 그리고 확실히 크리스는 대답했다. 그 순간, 토르타의 몸이 움칫했다.
크리스는 그 이상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나도 억지로 캐물을 생각은 없다.
조용히, 잠들어 있는 토르타에게 말을 걸었다.

-자 토르타, 이제 그만 일어나렴. 우리도 뭔가 먹어야지.
-…우웅… 어? …아, 할머니.


졸린 듯한 목소리와 함께 일어나, 토르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잘 잤어 토르타?

크리스가 약간은 심술궂게 토르타에게 인사를 한다. 토르타도 이에 질세라 대꾸한다.

-뭐야, 외로우니까 곁에 있어 달라고 한 게 누군데.
-…뭐?
-잠꼬대로 그랬어. 기억 못 하겠지만.
-…거짓말.
-그런 거짓말 해서 뭐 하자고. 그 말 듣고 할 수 없어서 여기서 책 읽고 있었더니 졸음이 오잖아.
-…절대 거짓말이야.


토르타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고 크리스의 말을 부정했다.
토르타의 말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되는 대로 입에서 꾸며낸 말이라면 발끈해서 반박을 했을 테니까.
크리스도 그걸 알았는지, 더 이상은 반론을 하지 않고 작은 소리로 뭔가 중얼거리더니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그래. 이제 나랑 할머니 저녁 먹을 건데, 크리스는 식욕 있어?
-…없어.
-어떡할 거야? 좀 더 잘래?
-아니, 이제 됐어. 저녁밥은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지.


크리스는 일어서서 고개를 몇 번 돌려 보았다. 상태는 나쁘지 않은 듯하다.

-열은? 흐음… 많이 내렸군.

토르타가 크리스의 이마에 손을 얹자, 크리스는 싫어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이런 부분이 미묘하다. 평범한 관계라면 쑥스러워하며 싫다고 했을 텐데.


【6】
셋이서 1층으로 내려오자, 크리스는 곧바로 가져왔던 포르텔을 어깨에 메고 돌아갈 채비를 시작했다.

-어? 그렇게 빨리 돌아가?
-…일요일이잖아.


크리스는 짧게 대답하고 옷깃을 여미었다.

-토르타, 부엌에 라자냐 덜어 둔 게 있으니 가져오렴.
-네에. 크리스, 잠깐만 기다려.


이미 한 번 구웠다가 덜어서 포장해 둔 크리스의 몫을 가지러 보냈다.
떠나기 전, 크리스는 내게 다가와 손을 꼭 쥐었다.

-오늘은 정말 감사합니다. 또 올게요.

평소같았으면 돌아갈 무렵에는 좀 더 편안한 말투를 썼을 텐데, 오늘은 식사도 안 했으니 어쩔 수 없나.

-그래 언제든지 편할 때 놀러오거라.
-그럼 내일 봐. 학교는 올 수 있지?
-응, 괜찮아. 내일 보자.


꽤 상태가 좋아졌는지, 크리스는 아까 왔을 때와 달리 시원스럽게 대답하고는, 기운찬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마침 시간도 평소 저녁을 먹던 때가 되어서, 토르타에게 준비를 부탁했다. 2층을 몇 번이고 오르내린 탓에 다리가 아프다. 보통때라면 요리를 나르거나 하는 건 둘이서 같이 하는데.

-아, 할머닌 쉬고 계세요. 오늘은 내가 전부 다 할 테니까.

토르타는 다정하고 착한 아이다.

-자, 이걸로 준비 끝. 시장하셨죠? 빨리 먹어요.

토르타는 활기차게 말하고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식사전 기도를 마치고 약간은 허전한 식탁에 둘러앉는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지만, 크리스의 공기가 아직 남아있어서인지 조금 아쉽다.

-오늘은 아깝네. 크리스도 모처럼 포르텔까지 가져와 놓고.
-애들은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최고야. 말도 할 수 있으니 별 문제 없지 않니.
-뭐, 할머니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지만. 그래도 사실은 할머니 계신 데서 얘기하고 싶었는데.
-얘기?
-졸업연주. 지난번에 말하지 않았어요?
-파트너가 어떻다고 했던가?
-네. 내년 1월인데, 아직 안 정했나 봐.


토르타의 이야기는, 피오바 음악학원의 졸업시험이기도 한 연주회를 말하는 것이다. 발표회라는 이름을 내걸고는 있지만, 졸업생이나 현역 음악가들도 다수 참관하러 와서, 가능성이 있는 학생이라면 그 자리에서 뽑혀가는 일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수준높은 연주회라고 들었다.
그리고 크리스가 있는 포르텔과에서는 단독연주는 허락되지 않고, 가수와의 협연이 필수조건이라고 한다. 성악과는 솔로여도 상관이 없으니 토르타가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토르타는 그저, 진심으로 크리스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반년도 더 남았다면서 진지하게 듣질 않아요. 할머니도 같이 얘기를 해 주면 조금은 마음을 달리 먹을까 했는데.

토르타는 질렸다는 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뒤이어 걱정스러운 듯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다지 좋은 질문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토르타는… 안되겠니?
-…나랑은 안 맞으니까.


자질이라면 특별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토르타의 노래를 들어 보면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연주를 못하는 대신 나는 수많은 음악을 들어 보았다. 손녀라고 해서 점수를 후하게 줄 생각도 없다.
토르타가 말하는 건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알 말이니?
-…응.


나는 다시한번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토르타의 대답도 변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모두 끝낸 다음, 토르타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혼자 거실에 남아 세 아이들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알과 토르타… 그리고 크리스. 그 중에 두 사람이 이곳에 온 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나에게 쓰는 존댓말이나, 토르타를 향한 태도 역시 그가 변하려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것은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변하지 않으려 하고 있기 때문으로도 여겨질 때가 있다.
지난날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그리고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말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아직 안 주무셨어요? 나 이제 잘 건데.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잘 자거라.


그 말을 남기고, 토르타는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정말 착한 아이다.
세 아이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결말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디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End


※1 : lasagna. 넓적한 모양의 파스타와 소스·치즈를 층층이 얹어 구워낸 이탈리아 요리의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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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risotto. 볶은 쌀과 함께 양파나 버섯, 고기·해물 등을 넣고 끓인 이탈리아식 스튜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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