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출처 : http://www.kogado.com/html/kuroneko/sr/

번역문 작성 : CARPEDIEM(mine1215@lycos.co.kr)

게재 : C'z the day(http://mine1215.cafe24.com/)

들어가기 전에
-PC용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심포닉 레인』의 소개 페이지에 실린 캐릭터별 단편 스토리를 번역한 것입니다. 게임 본편보다 약간 앞 시기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만약 게임을 플레이중이라면 모두 클리어한 다음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본 문서의 무단전재 및 링크는 금지합니다.




Symphonic Rain Short Story
Prelude 03 - 『Falsita Fawcett』


【1】
학원 콘서트 홀은 학생과 내빈들로 가득 차 있었다.
1년에 두 번, 봄과 여름에 치러지는 이 정기연주회는, 연주하는 학생과 이를 들으러 오는 학생, 그리고 학생들의 실력을 보러 오는 음악회 관계자들로 언제나 성황을 이룬다.
바깥은 한여름이지만, 내부는 우수한 공기조절설비 덕분에 많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놀라우리만치 쾌적하다.

정기연주회는 학년·과별로 일정이 나누어지며, 모든 행사가 끝나려면 1주일 이상이 소요된다.
오늘은 포르텔과 3학년이 중심이다.
그리고 다음 차례는 내가 담당하는 마지막 학생의 차례였다.

-이번엔 코델 선생님이 담당이신 학생이지요? 이름이….
-크리스 베르틴입니다.
-소리가 참 좋더군요. 작년에 처음 들어 봤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옆에 앉은 성악과 선생이 내게 말을 걸었다.
경력으로 치면 나와 동기이지만, 나이도 비슷하고 음악에 대한 취미도 맞아서인지, 평소에도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이런 행사때는 자리를 함께하는 경우도 많다.
개인적으로는 나 역시 크리스에게 보통 이상의 기대를 품고 있다.
그가 연주하는 포르텔의 음색에는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마력을 음으로 변환하는 장치'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악기는 연주자의 재능을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그것이 이 악기의 특징이자 또한 이점이었다.
단, 그 이점은 반대로 결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개인의 자질을 명확하게 소리로 나타내 버린다.
마력을 지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포르텔 연주자. 이 세계에서는 여기저기 부르는 곳이 많아 보이지만, 유명하면서 실력까지 함께 갖춘 연주자는 내가 아는 한에서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뭐, 이렇게 엄격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나 말고는 거의 없겠지만.

-선생님도 기대하고 계시지요?
-…네에. 문제도 산더미처럼 많긴 하지만.


이 말도 사실이다. 아직도 크리스는 고른 음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포르텔 연주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나, 그의 경우는 허용범위를 넘어선 느낌이다.
그것도 고려하여 수업을 진행하고는 있지만, 크리스 자신이 고칠 생각이 없는 건지, 전혀 개선될 기미가 없다.
그래도 나는 크리스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하네요.

그 말을 듣고 다시 무대에 눈길을 돌리자, 크리스가 자신의 포르텔을 세팅하고 있는 중이었다.
외부인이 많이 참석하는 이 연주회는, 학생 발표회라고는 해도 정식으로 제본된 안내책자가 배포된다.
다시한번 책자를 훑어보며, 이 다음에는 특별히 볼 만한 연주가 없다는 것을 어둠 속에서 확인했다.
책자에서 눈을 뗌과 거의 동시에 회장 안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크리스는 포르텔 건반에 손가락을 얹고 호흡을 고르고 있다.
그리고… 기다리던 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2】
크리스의 연주가 끝나고, 오후 일정도 반 정도가 종료되었다.
이제부터 10분 가량의 휴식시간을 위해 장내의 조명이 한꺼번에 켜졌다.
동료 교사의 감상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가서 가볍게 설교라도 해 줘야겠군요.
-하하하, 손가락이 못 따라가는 부분이 있었지요?
그걸 뺀다고 해도 역시 전 저 친구가 좋네요. 선생님 제자들은 정말 좋은 아이들이 많습니다.
-아니, 간신히 합격점이랄까요. 아직도 가르칠 게 많은데 벌써 3학년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1년이 더 남아있다곤 해도 크리스의 근본적인 부분은 변함이 없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계속 들으실 겁니까?
-네. 저희 3학년 중에서도 포르텔과 학생과 함께 졸업연주를 하고 싶다는 애들이 꽤 있어서요. 사전조사도 겸해서.
-크리스는 추천하기가 그렇군요.
-독특한 버릇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무난한 목소리와 짝을 이루면 오히려 연주가 돋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일단 생각해 보지요.


그렇게 대답하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옆쪽으로 몸을 돌렸더니, 여학생 하나가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통로로 나오자, 좀 전에 이야기하던 동기 선생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뒤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여학생을 어디선가 본 듯한 기억이 나서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본다.
그러자 그 선생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나요?
-잠깐만 이 친구 얘기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회장 안이어서인지, 작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여학생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내 곁으로 다가온다.

-아까 말했던, 포르텔과 학생과 짝을 이루고 싶다는 학생입니다만, 선생님께 이야기가 있다고 하네요.
-저어….
-아아, 너는… 팔시타군이었지?


목소리를 듣고 그제서야 이름이 생각났다.
올 봄까지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재원이지.
음악 쪽의 재능도 나무랄 데가 없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이다.

-예. 팔시타 포세트라고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나한테?
-네.


그녀의 말과 거의 동시에 부저가 울리며, 다음 프로그램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알겠다. 여기서 이야기하긴 뭐하니까 밖으로 나가지.

성악과 선생이 내게 가볍게 목례를 하자 그녀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3】
아슬아슬하게 연주회장 밖으로 나오자, 문 바로 옆에 서 있던 진행요원이 문을 닫았다.

-그런데, 이야기라는 게?
-방금 선생님께 들은 건데, 코델 선생님이 방금 연주했던 크리스 베르틴군을 맡고 계시다고 해서요.
-틀림없이 내 담당이지. 불초한 제자이지만.
-다행이다. 그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크리스의 포르텔이 마음에 들었나?
그 기분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동시에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들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
얘기가 길어지겠다 싶으면 장소를 바꿔도 상관없어. 지금 그녀석을 보러 가는 참이거든.
-아니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닙니다.
졸업연주 파트너를 정했는지만 확인하고 싶어서요.
-…마음에 들었나?
-네.
-결코 뛰어난 연주는 아니었는데.
-예. 그렇게 생각해요.
-딱 부러지게 말하는군. 뭐, 반박할 생각은 없지만.
-…죄송합니다.
-아니, 신경쓰지 마라. 하지만, 그런데도 어째서?


당연한 의문을 표시하자, 그녀는 잠시 눈길을 돌리고는, 생각에 잠긴 듯 얼마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마음이 쓰여서요.

라는 것이 잠시 후에 나온 그녀의 대답이었다.

-그렇긴 해도, 그저께부터 계속 포르텔과 연주를 들어 보고, 오늘까지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어요.
실력은 있는데 아직 파트너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그 질문이라면 바로 대답해 줄 수 있지. 크리스는 아직 파트너를 정하지 않았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꽤나 적극적인 아이지만, 그 태도에 호감이 간다.
그러고 보니, 교사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고, 장래에는 프로의 길이 확정되어 있다는 소문도 들은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몇 명이나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포르텔과 선생이라면 기꺼이 자기 학생을 소개해 줬을 것이다.
단지 내 경우에는 소개해 줄 학생이 연주가 너무 튄다는 것.
두 사람의 특징을 고려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뭐가 신경이 쓰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석이 두 손 들고 추천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먼저 말해 두지.
-네, 그래도 좋습니다. 오늘은 그냥 확인만 해 두고 싶었어요.
-그런가. 일단 말을 해 놓을까?
-아니오. 때가 되면 제가 직접 말하겠습니다. 다른 사람과도 이것저것 말을 해 봐야 하니까요.
-알겠다. 일단 네 이야기는 기억해 두지. 무슨 일이 있으면 내 연습실로 오도록.
평일은 대부분 거기 있으니까. 수업시간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좋아.


3학년이 되면 수업시간대는 거의 변하는 일이 없다.
1·2학년때는 다른 과의 기초과목을 배우거나 다양한 강의를 들어야 하지만, 3학년이 되면 거의 개인실습이 주가 된다.
가끔 특별강의같은 것도 있지만 학점에 직접 영향은 없고, 모든 것은 학생의 자주적인 판단에 맡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수도 제한되어 있고, 일반 학교와 비교하면 선생의 수도 매우 많다.
현재 내 업무는 담당하고 있는 학생의 수업뿐.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학생이 연습실로 찾아오면 개인수업을 한다.
그것은 성악과도 마찬가지였다.

-감사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때는 꼭 오렴.


그녀는 다시 깍듯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근본이 성실한 건지, 그 동작도 완벽히 몸에 밴 느낌이다.
과연, 이 정도라면 피오바의 쟁쟁한 선생들이 귀여워할 만도 하지.
학원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곳의 강사 중에는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현역 음악가들도 많다.
대다수는 현역에서 물러난 원로들이지만, 그 중에는 일선에서 뛰면서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현역들도 있다.
그리고, 음악가는 기본적으로 자존심이 세고 칭찬에 약하다.
일부러든 아니든, 그녀는 남들에게 호감을 사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처럼 학원을 졸업하고 그대로 선생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가르치는 편이 적성에 맞는다고 학생 시절부터 생각했는데, 그 판단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강사로서의 실력은 학원 내에서도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고, 나도 현실에 만족하고 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완벽한 학생보다는 어딘가가 빠진 듯한, 말하자면 손이 가는 학생에게 더 애착이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음악에 대한 그녀의 자세나 확실한 태도에는 호감이 간다.
저런 학생과 함께라면 크리스도 조금은 변할 수 있을까.

-…그럼 어디.

연습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당사자가 슬슬 지칠 때도 됐군.
시계를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기회가 있다면 저쪽에서 또 만나러 오겠지. 그때는 목소리도 한번 들어 보고 싶다.
불초한 제자를 위해 그녀의 이름을 일단은 기억 속에 새겨 두었다.


【4】
처음으로 팔시타 포세트를 만난 후로 3개월이 넘게 지났다.
성악과에 있거나 알고 지내는 강사, 그녀를 아는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기도 했다.
한결같이 칭찬 일색이어서 도움될 만한 내용은 별로 없었지만, 그런 평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있었다.
예의바르고, 재능도 있고, 노력도 열심히 한다.
흠잡을 곳이 없다는 게 귀염성이 좀 없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싫은 느낌도 들지 않을 만큼 깔끔한 것도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실제로 이야기를 해 보고 그녀가 마음에 들어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으니까.
크리스의 파트너로는 과분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 뒤로는 석 달이나 아무 소식도 없어서 그 일도 차츰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녀를 소개해 준 성악과 선생으로부터 '오늘 이야기를 하러 갈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듣고 문득 생각이 났다.
그래서, 오겠다면 오후수업 전에 오도록 전해 달라고 그에게 부탁을 했다.

졸업연주회는 1월 중순. 달력도 벌써 12월에 접어들려 하고 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데, 아직도 크리스는 느긋한 모양이다.
그녀와 만나 이야기를 해 두는 것은 크리스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거리에 나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점심시간을 아직 반 이상 남겨둔 상태에서 학교로 돌아왔다.
연습실 문은 열어 두었으니, 이미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1건물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데, 내 학생 시절 은사이기도 한 인물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서둘러야 하지만, 그렇다고 무례를 범할 수도 없어서, 나는 옆으로 물러나 멈춰서서 그가 알아볼 때까지 기다렸다.

-코델인가.
-안녕하십니까, 그라베 선생님.


위엄이 느껴지는 묵직한 말투와 함께, 그는 내 쪽을 흘끗 보았다.
그는 이름높은 귀족이자, 이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유명한 음악가이다.
몸에 밴 위엄이란 건 이런 아무렇지도 않은 데서도 풍겨나오는 거라고, 늘 감탄하게 된다.
전에는 이곳의 강사로 일하며 내 담당을 맡은 적도 있다.
지금은 직접 학생을 가르치고 있진 않지만, 피오바 학원장의 요청으로 해마다 몇 차례씩은 특별강사로 초빙되어 오곤 한다.
그만큼 이 세계에서는 힘을 가진 인물이었다.

-또 특별강사로 오신 건가요?
-아아. 학원장 녀석이 또 부탁을 해서.
-견학할 기회가 있으면 참고삼아 잘 부탁드겠습니다.


너무 의례적이어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무례해도 안된다.
남들 위에 서는 입장이 되었다곤 하지만, 역시 인간관계란 어렵다.

-아니, 자네라면 괜찮을 거야. 포르텔의 재능은 없었지만, 가르치는 쪽으로는 나보다도 뛰어나니까. 소문은 들어 알고 있네. 올바른 길을 가고 있나 보더군.
-…아니오. 아직 멀었습니다.


이 사람한테 재능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대꾸할 말도 없다.
분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무리 입이 험해도 그가 위대한 음악가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게다가 나 또한 남의 말을 할 처지는 아니다.
그라베 선생을 싫어하는 옛 지인들에게 '험한 입이 옮았다'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그럼 실례하겠네. 일이 바빠서.
-예… 아, 하나만 여쭤 봐도 될까요?
-음? 뭔가?
-팔시타 포세트라는 학생을 알고 계신지요.


그의 전공은 포르텔이지만, 음악에 관해서는 다방면으로 두루 손을 뻗치고 있다.
이름만이라도 알고 있나 해서 가볍게 물어 봤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응? 아, 물론 알고 있지. 좋은 학생이야.
-아… 예에.
-무슨 일이 있었나?
-아니오… 이제 졸업연주회도 다가왔고 해서.
-자네 담당학생과 조를 짜고 싶은가? 그 기분 알지. 그 친구가 아직 1학년이었다면 꼭 짝을 지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이 이상의 대화는 무리이다.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 그가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기서도 칭찬인가. 아무래도 팔시타라는 아이는 굉장한 인물인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크리스보다도 그녀를 걱정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쪽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라베 선생을 전송하고, 팔시타가 기다리고 있을 연습실로 향했다.


【5】
-많이 기다렸지?

문을 열자,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이미 와 있었다.
할 일이 없었는지, 피아노 앞에서 발성연습이라도 하고 있었나 보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아니오. 시간보다 조금 일찍 온 걸요.
멋대로 피아노를 만져서 죄송합니다.
-신경쓰지 마라. 그보다, 일단 한 곡 불러 볼래? 제대로 들어 보고 싶은데.
-네? 괜찮은가요?
-부탁하는 쪽은 난데.


쓴웃음을 지으며, 연습실에 설치되어 있는 포르텔 앞에 앉는다.
문을 열었을 때 새어나온 소리를 슬쩍 듣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제대로 된 노래를 들어 보고 싶었다.
내 안에도 아직 음악가의 피가 남아있는 걸까.

-발성은 마쳤겠지?
-네. 아침연습때 해 두었어요. 곡은 어떤 걸로 할까요?


겁내지 않는다. 훌륭한 태도이다.
노래하기로 결정한 순간, 이미 선생이 아닌 음악가로서 나를 보고 있다.
예의만 바른 게 아니라 심지도 굳은 모양이다.

-무슨 곡으로 할래? 악보를 준비할 시간이 없으니 그냥 부를 수 있는 걸로 하나 골라 주겠니?
-뭐든지 좋습니다. 유명한 포르텔 협주곡이라면 거의 다 부를 수 있어요.
-크리스한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로군.


그녀는 생긋 미소지으며 내 눈을 보았다.
장난을 칠 생각도 없었으므로, 유명한 곡을 기억 속에서 골라내 첫 소절을 치기 시작했다.

포르텔의 여운과 노랫소리의 여운이 부드럽게 뒤섞여, 공기에 녹아들듯 천천히 사라져 갔다.
노래를 마친 그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야아, 대단한데.
-아니오.


자신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 반대말은 당연히 '겸손'이겠지만, 그녀의 음성은 극히 자연스럽고 거부감이 없다.
그리고 그 노랫소리는, 지금까지 들었던 사람들의 평가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6】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다른 후보도 있는 거지?
-네, 물론이지요. 다른 사람하고도 이것저것 맞춰 보고 있어요.
아… 그렇다고 해서 어중간한 기분으로 고르는 건….
-아니, 그런 걱정은 안 한다. 여럿 중에서 가장 괜찮다 싶은 사람을 고르면 돼.
오히려 널 걱정하고 싶은 걸.
-크리스군 말인가요?
-그래. 만나본 적은 있니? 뭔가 이야기는 해 봤어?
-아니오, 아직. 요즘은 좀 바빠서… 그리고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파트너는 정해졌나요?
-아니, 아직이다. 오전수업 하기 전에 물어봤으니 확실해.
이 참에 만나 보는 게 좋지 않겠어?
-저도 좀 바빠서요. 시간이 날 때 만나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근데, 오늘 볼일은 이게 전부?
-네. 이야기를 들었으니 됐어요.
-미안하구나. 쓸데없이 시간을 뺏어서.
-아니오, 즐거웠는 걸요. 실력있는 사람하고 협주를 하면 좋은 공부도 되고.


낯간지러운 말을 남기고, 정말로 바쁜 모양인지 그녀는 바로 연습실을 나갔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본다.
진지하게 파트너를 찾으려 들지 않는 크리스를 위해 이쪽에서도 대상을 물색해 둘 생각이었는데, 그녀라면 좋은 후보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고 만족하고 있었더니, 어느샌가 점심시간도 끝난 모양이다.
등 뒤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문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아시노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저도 실례합니다.

뒤이어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는 당연히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아시노, 잘 지냈나?
-안녕하세요.
-방금 목소리, 팔시타?
-예. 문 앞에서 마주쳐서 잠깐 얘기를 좀.


이녀석 역시 불초한 제자이다.
크리스와 마찬가지로 아직 파트너가 없으면서, 지금의 웃는 얼굴에서도 불안한 기색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아는 사이냐?
-일단은 그렇게 되지요.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더 적을 테지만.
-그도 그렇군.


학생회장을 지냈을 정도니 나보다 학생들이 더 잘 알고 있는 것도 당연하지.
크리스와 달리, 아시노는 사교성만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파트너에 관해서는 맡겨 둬도 괜찮겠지.
단지 포르텔 실력은 별로지만.
거기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을 안 하는 게 문제인데, 걱정하는 내 마음은 좀처럼 전해지지 않는다.

그때 마침, 점심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자, 그럼 수업을 시작해 볼까.

걱정거리는 산더미처럼 많다. 어째서 이런 손이 가는 제자일수록 귀엽게 보이는 걸까.
자식은 부모 마음 모른다는 말처럼, 아시노도 크리스도 내 마음은 하나도 모른다.
쓴웃음을 지으며, 선생도 꽤나 힘든 일이라는 걸 실감한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