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출처 : http://www.kogado.com/html/kuroneko/sr/

번역문 작성 : CARPEDIEM(mine1215@lycos.co.kr)

게재 : C'z the day(http://mine1215.cafe24.com/)

들어가기 전에
-PC용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심포닉 레인』의 소개 페이지에 실린 캐릭터별 단편 스토리를 번역한 것입니다. 게임 본편보다 약간 앞 시기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만약 게임을 플레이중이라면 모두 클리어한 다음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본 문서의 무단전재 및 링크는 금지합니다.




Symphonic Rain Short Story
Prelude 05 - 『Phorni』


【1】
춥고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이 거리에 온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비는 멈추지 않는다.
그도 당연한 것이, 옛날부터 이곳은 '비의 거리'라 불리웠고, 앞으로 내가 다닐 음악학원도 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잠시 바깥을 돌아다녔을 뿐인데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머리카락에서는 빗방울이 흘러떨어진다. 아직 짐도 다 정리하지 않은 방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몸을 닦을 수건을 꺼내는 것이었다.
예정대로라면 도착해서 바로 짐을 풀었어야 하지만, 오랫동안 기차를 타고 오면서 몸이 상했는지, 지금까지 쭉 닌나 할머니 댁에서 요양을 해야 했다. 기온 자체는 고향마을보다 높지만, 긴 여행 후에 몸이 흠뻑 젖은 것이 원인일 거라고 할머니도 말씀하셨다.
감기를 치료하기 위해 이틀 정도 할머니 댁에 머물고 난 다음에야, 앞으로 3년간을 보낼 방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춥네.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붙박이 가구에 에어콘도 있다고 했으니, 우선은 난방을 켜기로 했다. 이제 겨우 점심을 지난 시각인데도 실내는 어둠침침하다. 하늘을 뒤덮은 구름 탓에 햇빛은 여기까지 닿지 않는다.
이리저리 뒤져 스위치를 찾아 난방을 켰지만, 몸이 젖은 채로는 감기가 도지고 말 것이다.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는 짐 속에서 옷과 수건이 든 뭉치를 찾아내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윗도리를 벗었다. 그리고 나서 마른 수건으로 온몸을 닦고 있을 때, 그제서야 방 안에 온기가 돌기 시작하고 몸도 따뜻해졌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진 건 아니다. 샤워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아직 하루 정도는 상태를 보는 편이 낫겠다. 붙박이 침대에는 아직 시트도 깔려 있지 않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그 위에 누웠다.
사실은 하루쯤 더 토르타네 집에서 쉬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몇 번이고 말렸지만, 빨리 여기로 오고 싶은 마음에 억지로 뿌리치고 나온 것이다. 1주일 후면 시작될 학원생활을 위해 조금이라도 빨리 익숙해져야 한다. 곤란한 일이 있으면 뭐든지 얘기하라고 닌나 할머니는 말씀하셨지만, 그쪽에 모두 다 의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다. 시작부터 이래서 어쩔 거냐며 마음을 다잡으려고 했지만, 몸이 거기에 따라오질 못한다. 아직 몸 상태도 다 회복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마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알의 얼굴이 떠오르고, 이제부터 해야 할 일도 생각났다.

-…그래, 편지.

짐 가운데 유일하게 손으로 들고 온 커다란 가방에서 종이다발을 꺼낸다. 안까지는 물이 새지 않았는지, 알에게 받았을 때 그대로 깨끗한 상태였다.
쓸 거리는 아직 없었지만, 비라든지, 감기에 걸린 일이라든지, 그런 평범한 얘기라도 괜찮다. 어쨌거나 알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책상으로 향했다.

첫머리를 어떻게 쓸까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편지 쓰고 있네.

놀라서 뒤를 돌아봤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그래도 환청이라기엔 너무나 또렷한 목소리였다. 처음 듣는 여성의, 구체적으로는 작은 소녀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누가 있나?

마치 공포소설의 한 장면처럼 중얼거려 본다. 어딘가 먼 곳의 목소리가 우연히 여기까지 닿은 것일까.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에는 누군가가 있는 기척은 없다. 다시 책상을 향해 마주앉는다.

-잠깐, 어딜 보고 있어?
-…누, 누구야?!
-여기여기.


소리가 나는 쪽, 다시 말해 거의 지면에 닿을 듯한 장소에, 그것이 있었다.
잘 살펴보면 '그것'이라고 표현하기엔 어색했지만, 그래도 평범하지 않은 존재임에는 틀림없었다.

-후아, 이제야 알아차렸구나. 내 모습이 보이지?

여기서 안 보인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스스럼없는 말투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것… 아니 그녀는, 자그마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형상도 아니다. 등에 돋은 날개를 쉴 새 없이 파닥거리며 지면에서 10cm 정도 되는 공간에 떠 있다. 날개라고는 해도 새처럼 기능적인 게 아니라, 상상화에 등장하는 요정같이 작고 아름다운 반투명한 날개였다.
그리고 그녀는, 인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인간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뭐야?

'누구?'라고 묻는 게 나을까 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입을 통해 나온 것은 정직한 단어였다.

-저기 위까지 올려다 줄래? 안 그럼 제대로 얘기 못 하잖아.

올려? 얘기?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눈앞에 있는 미확인생물이 무엇이고, 어째서 내가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되었는가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우선 맨 처음에 떠오른 건, 이것이 환각이라는 사실이었다.

-아… 환각인가.

나도 꽤나 지친 모양이다. 극한상태가 되면 사람은 환상을 보게 된다고 들은 적은 있지만, 설마 감기에 걸린 정도로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한심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알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지만 이대로는 위험하다.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 다시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뜨자, 이미 환상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이었다… 라고 생각하자마자 갑자기 발가락이 따끔했다.

-아얏!

무심결에 소리를 쳤는데, 아무래도 그 환상은 내 발치로 이동해서 내 발가락을 사정없이 꽉꽉 밟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로 꿈일 가능성은 사라졌지만, 증상이 심각하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아픔까지 느끼다니.

-무시하지 말라고! 빨랑 위로 올려달랬지!

어째서인지 기가 센 그 환상은, 책상 위를 가리키며 가슴을 폈다. 그렇게 해도 자그마한 몸 크기는 10cm를 겨우 넘긴 정도이다.

-얼른!

어쩐지 이젠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 들어서, 말하는 대로 그 몸을 집어든다. 한 손에 쏘옥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그리고 살아있는 인간처럼 온기도 있었다. 그 사실에 약간 당황하면서, 동시에 안심도 되었다. 마치 작은 고양이를 안아올린 것처럼.

-이봐, 좀 더 살살!
-미, 미안.


'어째서 내가 사과하고 있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근데… 넌 뭐야?
-에? 나 말야? 난… 뭘까?
-…하아.


온몸의 힘이 쪼옥 빠진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도 난감하지만, 그 내용이 문제의 근본과 직결된 중대한 일이라는 것도 큰 원인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묻고 싶은 건.
-네 이름은?
-이봐,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름·은?
-…크리스.


마치 토르타와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라 최악이라는 의미에서지만.

-크리스? 멋진 이름이네.
-…그, 그럼, 네 이름은?
-나? …난… 이름 없는데.
-그래… 나도 결국 제대로 된 환상을 보고 있군.


현실세계여, 안녕히. 이제 난 제대로 된 삶은 살 수 없을 거야.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알. 덤으로 토르타.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어요.

-그러니까! 환상이 아니라고 했잖아! 또 걷어찬다?
-그럼 뭔데?
-에?


거기서 말문이 막힌 건, 아직 내 머릿속에서 뇌내설정이 완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까.

-그게…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려.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리지.
-그, 그럼 설명할게.
-부탁합니다아.


그렇게 말해 놓고, 그녀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의자에 앉아 크게 심호흡을 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난 요정.
-…….
-왜 조용히 있어? 등에 날개도 달렸고, 이렇게 하늘도 날 수 있고, 그게 제일 적당한 표현 아니야?
-그러니까 나한테 물어도….


딴 건 둘째치고, 좀 전에 제대로 날지도 못했던 게?

-내가 보이는 인간은 크리스가 처음이거든. 인간하고 얘기하는 게 처음이니 이름을 불린 적도 없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래?
-그러니까, 난 원래부터 여기 살고 있었어.
-어째서?
-조용히 하고 들어! 나도 생각중이니까.


…꾸며낸 이야기 확정인가.

-사람들한테 보이지 않는 채로 여기 살고 있었거든. 그랬더니 크리스가 갑자기 들어와서는 편지를 쓰기 시작해서, 말을 걸어 봤지.
-…하아.


건성으로 대답한다. 결국 지금까지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다.

-근데, 어째서 여기 살고 있어?
-…이유같은 거 없어. 난 처음부터 여기 있었으니까. 거기에 의미를 갖게 하고 형태를 갖게 만든 게 크리스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거 묻지 말라니까.
-이름은 크리스가 붙여 주는 거야. 왜냐면, 크리스가 날 알아차렸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존재하게 된 거니까.
-…다시 말해 그건,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라서 그렇다고 이해하면 되나?
-아·니·야. 난 원래부터 그런 존재였지만, 지금까진 누구도 그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이름도 없었고, 이 세계에서 보면 그 존재도 확정돼 있지 않았던 거야.


어느샌가 그녀는 달변가가 되어, 세계가 어떻고 존재가 저떻고, 그런 이야기를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이었지만, 그게 뭐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뒤였다.

-뭐, 뭐야?
-…아니, 좀 생각난 게 있어서.
-뭐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는 나를 보고, 그녀는 놀란 듯이 물어봤다.

-…옛날에 읽은 소설에 그런 얘기가 적혀 있었어.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인간이 아닌 누군가가 세상에 태어나 죽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었다. 알인지 토르타인지 누군가가 재미있다고 해서 읽어 본 책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뇌내설정일 가능성이 또다시 높아졌지만.

-호오~ 그거 훌륭한 작가로군. '사실은 소설보다도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지.
-그러니까 너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요정이란 존재인데, 내가 그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그런 형태를 가지고, 이렇게 나와 같은 언어로 말을 하고 있다… 그렇게 되는 건가?
-뭐, 그런 거지. 게다가 옛날엔 마법도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어. 나같은 존재도 잔뜩 있었고.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럴듯한 기분도 든다. 내가 연주하는 포르텔 역시,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 '마력'이라는 알 수 없는 힘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실제로 내게는 마력이 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참고로 '과학의 영역을 넘었다'기보다는 '과학이 아직 따라잡지 못한'이라는 표현을 쓰는 학자가 많다고 들었지만.

-아, 그건 그렇고, '나같은 존재'라는 건 말하기 귀찮으니까 뭔가 이름을 생각해 봐.
-…내가?
-응, 아무 거나 좋아.


이름이라고 해도 그렇게 간단히 생각날 리가 없다. 정말 이걸 내가 정해야 하나 하고 미심쩍어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 재촉을 했다.

-빨리!
-포… 포니?
-…어라? 어쩐지 느낌이 좋은데?


아무 거나 좋다고 생각하면서 무심결에 눈이 간 것이, 포르텔 케이스에 적혀 있던 제조사의 이름이었다.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다시 말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포르텔을 만들고 있는 회사로, 이름의 유래는 교향곡을 가리키는 '심포니'… 라나 뭐라나.
대충 둘러댄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요정은 몇 번이고 그것을 되뇌며 생긋 미소지었다.

-그럼 내 이름은 포니로 결정! 잘 부탁해 크리스.
-자… 잘 부탁해.


악수를 하려는 듯 내민 손은 너무나도 작아서,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해도 돼.

포니의 말대로 손가락을 내밀자, 가장 작은 새끼손가락도 그녀에겐 통나무를 껴안듯이 팔을 벌리지 않으면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손가락이 맞닿은 곳으로부터, 그 자그마한 몸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어쩐지 편안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도 그럭저럭 통한다… 고 할 수 있다. 일단 내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그녀 자신은 진짜인 것 같고, 그것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무조건 안 믿는 것도 어째 내키지가 않는다.

-근데, 넌 뭐가 하고 싶어?

'잘 부탁해'라는 말을 들은 이상, 얼마간은 여기서 함께 지내야 하겠지. 그 표현이 맞는지 틀린지 따지는 건 제쳐두고, 적어도 '그럼 안녕'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렇네… 아, 저기 있는 거 포르텔 아냐?
-응?


방금 전의 얘기에서 포르텔이 나왔으니까 이미 눈치챘으려니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허둥지둥 케이스가 있는 데로 달려가, 상자를 쓰러뜨리는 척 하며 케이스에 붙은 회사명이 적힌 스티커를 떼냈다.

-아, 으응. 일단 난 포르텔 연주자거든. 다음 주부터 여기 있는 음악학원에 다니게 됐어.
-아, 피오바 음악학원? 거기 알아.
-그, 그래?


요정, 아니 포니의 지식은 어느 정도나 될까. 내가 모르는 사실을 알려준다면 지금보다는 더 믿을 수 있을 텐데.
뭔가 좋은 질문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보다도 먼저 포니가 대답했다.

-그럼 앙상블 하자!

날개를 파닥거리며 즐거운 표정으로 미소짓는다. 아까 던졌던 '뭐가 하고 싶냐'는 질문에 대한 답인 듯하다.

-에? 뭔가 할 수 있어?

이런 몸집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애시당초 그런 악기도 없다.

-악기는 못 다뤄도 노래라면 부를 수 있어.

포니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계속한다.

-난 음악의 요정이거든.


【2】
그 후로 우리들은 다양한 곡을 협주했다. 포니는 자신을 음악의 요정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그녀의 노랫소리는 지금까지 들어 본 다른 누구의 것보다도 훌륭했다. 몇 번인가 프로의 콘서트를 들으러 간 적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훨씬 뛰어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포니의 노래는 완벽했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함께 연주하고 있는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져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몇 곡이고 끊임없이 연주를 하고, 끝날 무렵에는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기분이 되어 있었다.

-수고했어 크리스.
-…응, 수고했어.


그렇게나 많이 노래를 불러 놓고도, 포니는 숨이 찬 기색 하나 없이 아직 더 부르고 싶다는 표정이지만, 병상에서 갓 일어난 내 쪽은 이미 녹초가 되어 이 이상 연주하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협주가 끝날 때까지 그 사실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집중을 해서 음악을 연주했던 것이다.

-…후우.

크게 한숨을 쉬고 침대에 눕는다. 아직 알에게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쓰면 되겠지. 어차피 지금부터 쓴다 해도 우체통에 든 편지를 우체국에서 걷어가는 건 내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쓸 내용도 아직 정하지 않았다.
포니에 관해 적는다 해도 틀림없이 안 믿을 것이다. 나조차도 아직까지 믿기지 않을 지경인데.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과연 알에게는 보일까? 그리고 언젠가 알이 여기에 왔다 해도, 포니와 이야기할 수 있는 때가 올까?

-하아~ 기분 좋다.
-에? 아, 으응.


순수하게 음악 자체가 즐겁다고 느낄 수 있는 건 행복한 일이다. 감기와 비 때문에 축 처져 있던 기분도 지금은 후련해졌다.

-그럼 난 이제 잘 건데, 포니는 뭐 할 거야? 그것보다 평소엔 어떻게 하고 있어?
-나? 난 사라져서 쉬고 싶은 만큼 쉬는데.
-…사라져?
-응.


그렇게 말한 순간, '퐁'하고 기묘한 소리를 내며 포니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나서 바로, 똑같은 소리를 내며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나타났다.

-이렇게.
-…하아.


뭐라고 할까… 미확인생물에게 물리법칙을 따져물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을 목격하고 나자 -그것이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포니가 사라진 채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편이 차라리 현실감이 있었을 것이다.

-근데 크리스, 식사는 어떻게 해?
-오늘은 됐어. 내일 생각할래. 어쨌든 오늘은 졸려. 지친데다가, 병에서 막 회복된 참이거든.
-병이라니… 감기라도 앓았어?
-어제까지. 오늘도 별로 좋진 않았는데, 협주를 했더니 조금은 나아졌나 봐.
-그, 그랬구나. 미리 말해 주지.
-아니. 포니랑 협주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어쩐지 이젠 널 믿을 수 있을 거 같아.
-…뭐야, 지금까진 안 믿었다고?
-당연하지. 그게 보통 아니야?
-뭐… 그것도 그런가.


이해했다는 듯이 포니는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요정은 밥 안 먹어?
-응, 안 먹어.
-…그래. 그럼 더 이상 아무 말 안 할래. 이제 난 잔다.
-아, 그 전에 하나만.
-응?
-창가까지 데려다 줘.


포니는 손으로 창밖을 가리키면서 그쪽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다.

-그야 문제없지만, 어째서 또?
-하늘이라도 볼까 하고.
-이 동네는 구름밖에 안 보이는데. 계속 비가 오거든. 1년 내내 안 멈춘다지.
-…비?
-그런가… 비는 모르는구나.


아까같이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살짝 집어들어서 다른 쪽 손 위에 올려놓았다. 손으로 쥐는 것보다는 약간 불안정하지만, 날개로 중심을 잘 잡고 있는지 굴러떨어질 것 같진 않다.

-…응? 그러고 보니 날개는? 아까부터 공중에 떠 있던 거 같은데, 날아서는 못 가?

생각해 보니, 처음에도 책상 위로 올려다 달라고 했지.

-그게 말이지, 날개도 만능은 아니라서. 10cm 정도는 떠 있을 수 있는데, 그 이상 높이 올라가면 점점 아래로 내려와.
-…어떤 식으로?
-이렇게 슈웅~ 하고 비스듬히 떨어지는 느낌?


어떤 식인지 궁금해서, 시험삼아 포니가 탄 손바닥을 옆으로 세워 보았다.

-왓?! 으와!

즉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손으로 받으려고 했지만, 놀란 듯한 목소리와는 달리 유유히, 마치 새가 하늘을 활공하듯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야, 크리스!

다만, 똑바로는 내려오질 못하는 건지, 꽤나 떨어진 위치에서 내게 소리를 친다.

-…미안. 좀 시험해 보고 싶어져서.
-빨리 창틀에 올려 줘! 또 그러면 가만 안 둔다!
-…네에.


쬐그만 주제에 무서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포니는 다시 내 손바닥에 올라탔다.
이번엔 장난치지 않고 창가로 손을 가져간다. 포니는 그대로 폴짝 뛰어내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게 비야. 여기서는 신기할 것도 없다지. 닌나 할머니랑 토르타… 내가 아는 사람들이 가르쳐 줬어. 그 전에도 책인지 어딘지에서 읽어는 봤지만, 이렇게 실제로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니까.
-…비라.


포니는 얼마 동안 창밖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있었다. 하늘에서 물이 떨어진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 나 잔다. 불 꺼도 돼?
-응. 괜찮아.


자그맣고, 금방이라도 꺼져들 것만 같은 목소리.

-왜 그래?
-으응, 아무 것도 아냐. 잘 자.
-잘 자.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에도 난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노랫소리를 듣고 나서는 정말로 아무래도 좋게 되어버렸다. 음악의 요정이라든지, 내가 적당히 붙인 '포니'라는 이름이라든지.
그런 것도 전부 포함해서, 나는 그녀의 존재를 믿어 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내일 아침 일어나 보니 없어졌더라, 그러면 싫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그날은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내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눈뜨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난다는 것이, 이렇게도 마음을 훈훈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깨우는 방법에 문제가 좀 있긴 했지만.

그리고 나는 포니에게 말했다.

'정식으로 잘 부탁해'라고.


【3】
…그런 꿈을 꾸었다.
아니, 실제로는 꿈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나한테 벌어졌던 일이다. 당시에 관해서는 기억이 별로 없었지만, 지금 이렇게 꿈이라는 형태로 확실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감기는? 괜찮아?
-…아니, 전혀. 근데 포니는 지금 뭘 하고 있어?
-젖은 수건으로 크리스 머릴 식혀주려고.


하나도 발전이 없다.

-지난번에 얘기했지? 네 힘으로는 수건을 짤 수 없다고.

호의에서 나온 행동이란 것은 알고 있다. 또한 매우 감사도 하고 있지만, 그건 마음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는 몰라도, 부엌에서 수건을 적셔서는 제대로 짜지도 않은 채로 가져다 내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포니가 지나간 뒤로는 달팽이가 기어간 것처럼 물자국이 나 있고, 덤으로 이불과 내 머리도 흠뻑 젖어 있다.

-감기는 이제 괜찮아. 부탁이니까 이 이상 악화시키지 말아 줘.
-뭐야! 크리스가 철도 아닌데 여름감기에 걸린 게 잘못이지!
-…그건 책임전가다.
-뭐라고! 외롭다면서 어젠 토르타네 집까지 갔다왔으니 더 나빠진 거야.
-안 나빠졌대도. 이제부터 더 나빠지면 그건 포니 책임이야. 아니, 그 전에… 누가 외롭다고.
-다 들었어. '곁에 있어 줘'라고 잠꼬대하는 거.
-…거짓말.
-거짓말 아냐. 토르타도 들었는 걸.


…으윽, 이 얘기는 내가 불리하다. 자기가 잠꼬대로 무슨 소릴 했는지는 다른 사람 말을 믿는 수밖에 없으니까.

-백 번을 양보해서 말했다손 치더라도, 토르타나 포니한테 그런 거 아니야.
-알이지? 그 정돈 나도 알아. 그래도 외로움 타는 건 마찬가지면서.


의기양양하게 포니가 대답한다. '내가 없으면 책상 위에도 못 올라가면서'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꿀꺽 삼킨다. 좀 전에 꾸었던 꿈의 영향이 남아있는 건지, 포니에게 화를 낼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래그래… 알았어.

일단은 패배를 인정하고, 마른 수건을 찾으러 침대에서 일어선다. 머리에서 물방울이 계속 떨어지고 있지만, 빨리 알아챈 덕에 그렇게까지 차갑진 않다.

결국 알에게는 포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작년과 재작년 12월 25일, 나탈레를 맞아 알이 놀러왔을 때, 그녀의 눈앞에서 포니에게 말을 시켜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토르타도 내 방에 몇 번인가 온 적이 있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 말고는 안 보인다는 불신감도 지금은 거의 잊어버린 상태이다.
한편, 포니는 알과 토르타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요즘에는 나와 이야기할 때도 그냥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어쨌거나, 다음에 또 감기가 들면 오늘같은 식으로 깨우지 마.
-네에네에~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포니는 방금 전 승리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아직도 우쭐해 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우스워서, 아까 꿈에서 마지막에 했던 것처럼 그녀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음악의 요정은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내 손가락을 꼬옥 잡았다. 자그맣고 따스한 그 손이, 젖은 수건을 짜고 난 내 손의 냉기를 가시게 한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크리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