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지하도시 -LEVEL7- 량 : …이봐, 일어나! 언제까지 뻗어 있을 거야? 잠을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뜬 주인공. 주변에는 널브러진 술병과 잠에 빠진 사람들이 보인다. 술자리 끝에 모두들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든 모양이다. 세수를 하고 량에게서 술깨는 약을 받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전날과 비교하면 확실히 태도가 많이 누그러진 그녀.
토오루 : 그야, 일단은 프로니까…. 량 : 겸손해할 필요 없어. 겐하는 페타오 최강이니까. 쿠웡이라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거든. 토오루 : 겐하라…. 량 : 그래도 겐하가 있어서 도움이 되는 걸. 요즘엔 싸움이 격해져서 슈미크람 파일럿도 많이 줄었고…. 그래서 모두들 토오루가 와 준 게 기뻤을 거야. 아직 테러리스트가 되기로 결정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느샌가 모여든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다. 헐렁한 제복을 걸친, 기껏해야 1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얼굴들. 그러나 그들 역시 슈미크람을 몰고 싸우는 어엿한 페타오의 파일럿이었다. 문득, 군에 있던 시절, 아무 주저도 용서도 없이 격추해 버렸던 테러리스트의 슈미크람을 떠올리고 마는 주인공… 때마침 쿠웡이 나타나, 아이들과 량을 다른 곳으로 보내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쿠웡 : …저애들이 신경쓰이나? 토오루 : 당연하지… 저런 꼬마들이 테러리스트의 슈미크람 파일럿이었다니…. 쿠웡 : 나도 괴롭네… 그 책임이 내게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어. 그러나 저들은 스스로 지원해 온 거야. 저애들의 부모형제들도 모두 슈미크람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지. …어떤가? 테러리스트에 체험입대해 본 감상은? 토오루 : …생각했던 바와 다른 것은 부정하지 않겠소. 기대받는 것도 알고… 그렇다곤 해도 난 아직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무엇보다, 난 아직 당신을 믿지 않아. 쿠웡 : …그렇겠지. 하지만 난 믿고 있네. 진실을 알게 되면, 자네가 동지가 되어 줄 거라고. 진실을 안다는 건 괴로운 일이야… 누구라도 그 순간엔 발목을 잡힌 듯한 느낌이 들지. 고독감으로 미쳐버릴 것만 같고. …사회계층의 꼭대기나 밑바닥에 있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들은 많아. 뇌내칩의 진실도 그 중의 하나이고…. 량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며 달려온다. 뒤이어 울리는 경계경보. 세 사람은 작전실로 달리기 시작한다. 구시대에 지어진 관제실에는 브라운관 형식의 모니터가 각종 상황을 표시하고 있다. 상황을 점검하며 초조한 빛을 떠올리는 쿠웡. 넷에 몰입시 역추적을 막기 위해 중계기지로 이용하는 거점 중의 하나가 V·S·S에 발각되어 습격을 받고 있다고 한다. 중계기지의 정보가 해석되면 본거지의 위치가 알려지게 된다. 해석을 막기 위해서는 기지 정보를 삭제해야 하며, 그 동안의 시간을 벌기 위해 테러리스트들이 차례로 넷에 몰입하고 있다. 한발 앞서 몰입하여 기지에서 삭제작업을 하고 있던 아키라가 통신을 보내온다. 마지막 10여분을 남겨두고 적의 공격이 거세지고 있다는 것이다. 겐하의 선봉부대는 다른 임무로 기지를 비웠고, 지금 출동한 것은 예비부대, 아까 본 아이들이다. 혼란에 빠져 V·S·S의 정예부대에 유린당하는 테러리스트의 슈미크람 부대. 은밀행동중이라 통신이나 개입은 불가능하다. 보다못한 쿠웡이 직접 나서려고 하지만 혼란을 우려한 량과 아키라에게 제지당한다. 주인공에게 힘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량. 내색은 안 해도 쿠웡 역시…. 토오루 : …알았어… 녀석들이 도망칠 때까지만 시간을 벌어 주는 거야! 아직 동지가 된 건 아니라고!! 작업 완료까지 남은 시간은 3분,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남은 부대를 모두 돌려보내고 홀로 싸움을 떠맡은 주인공. ■ 지정시간 내에 적을 20기 이상 격파하면 포스크래쉬 '봉황 떨구기(鳳凰落とし)' 입수. 작업 완료를 알리는 아키라의 목소리와 함께 철수. 기지 정보는 지켜냈지만, 이 싸움에 출격한 병력의 절반 이상은 뇌사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우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아지트. 장례의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쿠웡의 연설이 울려퍼지고 있다. 조금만 더 빨리 출격했으면 희생자도 줄었을 것이다… 자책을 해도 지금 와서는 소용없는 일. 행사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간 기지. 겐하가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나서 "애든 어른이든 전투에서 죽는 놈이 바보"라며 한바탕 내뱉고는 사라진다. 뒤이어 량이 다가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쿠웡은 복수전을 겸해 I·V·S사를 현실세계와 넷에서 동시에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밝힌다. 바이오칩 부문의 초거대 메이커이자 뇌내칩의 최대 공급원 중에 하나인 기업이다. 쿠웡 : 그렇기 때문에 쳐들어가는 것이다. 지금까지와 같은 산발적인 활동으로는, 피해가 늘어나는 것에 비해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우니까. 토오루 : '효과'라니…? 쿠웡 : 영혼을 더럽히는 칩의 생산중지, 그리고 그 실체를 민중들에게 폭로하는 일이다.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토오루 : 슈미크람에 타고서 공격에 참가해 달라는 거지…? 쿠웡 : 그 말대로일세. 받아들여 주겠나? 토오루 : 기다려 봐… 확실히 지난번에는 당신들을 도왔어. 그렇다곤 해도 난 당신의 말을 믿진 않아. 량 : 잠깐! …너 아직도 그런 말을…?! 토오루 : 게다가 I·V·S를 공격한다고 하면 군이 출동할 게 확실해. 날더러 옛 동료들과 싸우라는 건가? 쿠웡 : …그렇군. 그 말이 옳아. 난 아직 자네에게 '칩의 진실'에 대한 증거를 밝히지 않았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번에 참가해 달라는 것이다. 이 싸움에 함께한다면 자네는 내 말이 틀림없는 진실임을 알게 될 테니까. 확신이 느껴지는 쿠웡의 말에 마음이 약간 흔들린다. 만일 쿠웡이 말하는 '증거'를 볼 수 있다면, 참가할 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이라나 요오스케와 싸울 수는 없다. 자칫하면 V·S·S로 간 쯔키나와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쿠웡 : …당연히, 동료와 싸워야 한다면 고민하게 되겠지…. 하지만 나는 자네의 고뇌를 이해하기에 부탁하는 것이다. 토오루 : …그럼 뭔데? 그 '칩의 진실'이란 게 친구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하려는 건가? 쿠웡 : 어떤 의미로는 그렇지… 왜냐하면, 자네의 동료 또한 모르는 사이에 그 악의에 지배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머릿속이 혼란해진다… 쿠웡의 말이 옳다면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을 터이다. 그럼에도, 내 마음 밑바닥에서는 조금씩 쿠웡의 말을 믿기 시작하고 있는 또다른 내가 있다…. 토오루 : 젠장!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군! …"숨겨주고 있으니 싸우라"고 명령하는 편이 차라리 속시원하잖아!! 쿠웡 : 여기선 누구도 자네에게 명령하지 않아… 여기는 군대도 아니고, 군을 빠져나온 순간부터 자넨 한 명의 전사가 되었으니까. 전사는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난 자네의 결단을 존중하겠네.(량과 함께 자리를 뜬다) 밤이 찾아오면 인공조명의 밝기가 단계적으로 낮아진다. 지하에서도 생활리듬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이라도 자연스러움을 배제할 수는 없는 것. 고기가 든 스프를 들고 량이 찾아온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열지만, 아침나절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 량 : 뭐, 기운 내라고. 이름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렇게 얼굴도 기억하고 있잖아. 토오루 : 량은 쿠웡이 말하는 걸 믿어…? 량 : 당연하지. 안 그랬으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토오루 : …그건 그렇지만… 내가 묻고 싶은 건, 어떻게 해서 그렇게까지 믿을 수 있냐는 거야. 량 : 어째서라니…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어. 쿠웡은 부모님 대신 날 키워줬고… 나한테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피붙이같은 존재니까. …그래서 알 수 있어. 말은 안 해도, 쿠웡은 틀림없이 토오루가 함께 싸워 주길 바라고 있을 거야. 토오루 : …마음은 알겠는데, 나한테 기대하진 마…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난 그 사람 말을 믿을 수 없어. 량 : …너도 정말 고집쟁이구나! 토오루 : 고집쟁이라니… 그럼 고집을 부리지 못할 만큼 확실한 증거를 보여줘! 량 : 싸움에 같이 따라가면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하잖아! 토오루 : 같이 가면 옛 동료들하고 싸울 수도 있는데? 량 : 자세히는 모르지만, 세뇌칩을 막는 건 그 친구들을 돕는 일도 되잖아! 토오루는 친구들을 돕고 싶지 않아? 토오루 : 그건…. 량, 단순한 네가 부러워… 나도 그렇게 사물을 단호하게 분간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량 : 뭐? 토오루, 너 지금 나 놀렸지! 토오루 : 안 놀렸어. 칭찬한 거야. 량 : 거짓말! …난 머리는 안 좋아도, 무슨 생각 하는지는 감으로 다 알아! 토오루 : 그럼 내 딜레마도 생각 좀 해 봐! 어째서 이해해 주질 않는 거야?! 량 : 디 뭐시긴지, 그런 어려운 말 써도 모른다고! 토오루 : 그럼 그냥 모르는 채로 있어! 이 들고양이 계집애!! 량 : 뭐라고?! …이자식이!! 열받은 량은 주먹을 들어올리고, 반사적으로 눈을 감아버리지만…. 좀처럼 주먹이 날아오지 않는다. 살며시 눈을 뜨고 보자, 량은 손을 들어올린 채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고 있다… 이윽고, 그녀는 눈의 초점을 허공에 둔 채 스르르 손을 내린다. 이름을 부르자, 막 잠에서 깬 것처럼 사방을 둘러보고는 이상하다는 듯 혼잣말을 내뱉는다. 량 : …나 지금 뭐 하고 있었어…? 토오루 : 뭐라니… 말싸움하다가 날 때리려고 했잖아. 량 : 그랬어? …어, 어째서…?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아니… 아니야…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그녀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짜내며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휘젓는다. 토오루 : …량… 도대체? 량 : 안돼… 어째서… 도와줘! 누가 도와줘어!! 시, 싫어어어어!!!! 이젠 못 참겠어…!!!! 토오루 : 량…!! 반사적으로 량을 끌어안는 주인공.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녀를 진정시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거친 숨을 내쉬며 량이 젖은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다.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것처럼, 불안과 애원이 뒤섞인 시선으로. 토오루 : 진정해… 괜찮으니까 진정해…. 떨리는 손을 꼭 쥐며 속삭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맞잡는다. 그 손은 차갑고 땀에 젖어 있었다…. 토오루 : 좋아… 내가 누군지 알겠어? 량 : 토오루…? 토오루 : 그래… 알아보니 다행이군.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량은 일종의 착란상태에 빠진 것이 틀림없다. 이쪽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금물이다. 아키라가 예전에 가르쳐 준 대로 천천히 이야기를 걸어 본다.
량 : 생각이 안 나… 아침에 장례식 끝나고 뭔가 했는데… 이대로 전부 잊어버릴 것 같아…. 토오루 : 바보… 자기 입으로 기억력이 나쁘다고 했으면서. 그런 건 자주 있는 일이야. 량 : 그치만… 그렇지만….(주위를 둘러본다) …그러고 보니까, 나 토오루한테 뭔가 볼일이 있어서 온 것 같아… 엄청 중요한 일로…. 토오루 : 그래, 맞아. 량은 날 설득하려고 식사를 들고서 내 방에 찾아왔어. 그렇지? 량 : 그랬던가… 응, 그런 것 같기도 해. 량은 눈을 꼭 감은 채 침묵에 잠기고… 잠시 후, 다시 뜨인 그녀의 눈에는 이성의 빛이 돌아와 있었다. 량 : 고마워… 이젠 괜찮아.(일어선다) 토오루 : 정말 괜찮아? 량 : 아아… 괜찮아. 이런 일 자주 있거든. 토오루 :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량 : 걱정 마. 지병이야… 아주 흔한 건망증. 힘없이 미소짓는 그녀의 몸이 순간 비틀거린다. 당황하여 순간적으로 그녀를 받아안고는 토오루 : …걱정시키고 싶지 않으면 무리하지 말고 잠시 쉬어. 량 : ……응.(몸을 기댄다) 조금 생각났어… 맞아, 토오루한테 부탁하러 왔지… 거절당하면 마구 때려줄 생각으로…. 토오루 : 아아… 하마터면 두들겨맞을 뻔했어…. 량 : …그랬구나… 미안해… 그런데도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고…. …그래서, 토오루는 허락해 주는 거야? 토오루 : ……. 량 : 미안… 그럴 리가 없지… 사실은 나도 알아. 토오루가 친구를 깊이 생각하는 거…. 아키라를 보면 아는데, 그러면서도 인정할 수가 없었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그래도 부탁해. 이번만은 나하고 쿠웡을 믿어 줘… 그 결과를 못 믿겠다면 다신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토오루 : …비겁해 량. 량 : ……. 토오루 : 비겁해. 여자애가 이런 모습을 보이면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잖아. 량 : …여자애? 토오루 : 그래, 이렇게 귀여운 여자애가 울면서 매달리면, 남자는 싫다는 말 못하는 거 알지? 량 : 귀엽다고? …그런 말 처음 들어…. 토오루 : 분하지만, 량은 귀여운 여자야…. 량 : …그렇다고 해서 거절할 수 없다니 이상해…. 내가 여자든 뭐든 신경 안 써도 되는데… 토오루는 좋은 사람이구나… 슈미크람 파일럿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아. 토오루 : 나야말로, 량이 테러리스트란 게 믿어지지 않는 걸. 그대로 우리들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테러리스트인 량… 겉모습은 아름답지만, 남자 못지않게 굳세고 들고양이처럼 괄괄한 소녀. 매력적이긴 해도, 지금까지는 서로를 터놓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럴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새삼스럽게 량이 매력적인 소녀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량 역시 조금은 당황한 표정으로, 가만히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 쿠웡 : …이제 그만 괜찮겠나? 토오루군. 량 : 아… 이건 아니야! 그러니까, 나 또 발작을 일으켜서…. 쿠웡 : …그런가. 토오루군이 간호해 줬니? 토오루 : 미, 미안… 하, 하지만, 이상한 짓은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쿠웡 : 알고 있네. 그러니까 사과할 필요는 없어… 감사하네. 덕분에 발작이 최소한으로 가라앉은 모양이야. 확실히 난 운치없는 남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아. 자아, 량… 오늘은 그만 약을 먹고 자렴. 알겠지? 량 : …아, 으응. 토오루 : 쿠웡, 지금 그건 도대체… 량한테는 대체 무슨 지병이…? 쿠웡 : 신경쓰지 말게… 지금은 그 이상 묻지 말아주게나. …그대로 두 사람은 어둠침침한 건물 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8장 지하도시 -LEVEL7-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