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대가 -FORFEIT-


량이 사라진 아지트에는 며칠째 답답한 공기만이 감돌고 있다. 아키라도 쿠웡도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신경쓰이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다. 포로로 붙잡혀 온 아야네와, I·V·S 해킹 이후로 부쩍 험악해진 겐하의 태도. 주인공과 쿠웡이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서는 바람에 량이 시간을 벌다가 붙잡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현재 페타오는 쿠웡과 겐하의 두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 서로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사라질 수도 없는 불편한 상황. 지금으로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하고 있을 뿐.

채팅방에 펼쳐진 가상의 초원. 이곳에서 친구들과 뛰놀던 일도 지금은 먼 옛날의 기억처럼 느껴진다.
그곳에 나타난 소녀의 전자체. 약속시간에 1분도 어긋나지 않고….

미노리 : ……토오루씨.
토오루 : …잘 왔어 미노리.
메일을 읽어 준 거네?
미노리 : …….

데이터 베이스에서 얻은 뇌내칩의 정보와 일방적인 약속을 담아 보낸 편지. 위험을 무릅쓴 그 편지를 읽고서 미노리는 이곳을 찾아와 주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약속시간에 정확히 맞추어.

미노리 : …그 데이터에 있던 내용, 사실인가요? …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요.
토오루 : 나도 믿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건 I·V·S의 데이터 베이스에서 가져온 거야.

말없이 고개를 떨구는 미노리를 보며, '진실은 괴로운 것'이라던 쿠웡의 말이 생각난다. 그녀를 억지로 이런 고통 속에 끌어들인 사실에 죄악감을 느끼지만….

미노리 : …그래서, 절더러 어쩌라는 거죠? …테러리스트가 되라고 권하는 건가요?
토오루 : …미노리가 원한다면 그것도 좋겠지… 우선은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미노리 : …부탁이요?
토오루 : 지난번 작전에서 붙잡힌 포로가 어디로 호송되었는지 알고 싶어.
미노리 : 제가 그런 일을 어떻게 알아요!
…그게 알고 싶어서 데이터를 보냈나요?

토오루 : 그건 아니야…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곤 하지만, 옛 동료들을 배반하게 돼서 괴로워….
미노리 : …그러니까, '하다못해 배신한 이유라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토오루 : …그럴 거야….
끝까지 주인공을 믿어 주는 미노리.
미노리 : …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가 속해 있는 동안은 군을 배반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토오루씨가 메일을 전해준 보답으로 한 가지는 알려드릴 수 있어요.
작전이 끝나고, 포로가 단 한 명… 젊은 여성이 기지로 호송되어 왔어요.
그 이후로 여자는 기지 어딘가에 감금돼 있나 봐요… 소문으로는, 가끔씩 방에서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린다고….

토오루 : …그래? 고마워… 바로 내가 필요로 하던 정보야.
미노리 : …필요… 혁명을 위해서인가요?
토오루 : 아니, 그 여잔 내 은인이야.
미노리 : …그런 면은 변하지 않았군요… 조금은 안심했어요.
토오루 : …….
미노리 : 그럼 안녕히… 건강하게 지내세요.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은 모두를 불러모아 량의 소재를 밝힌다. 그녀의 구출을 겸해서 기지를 총공격하자는 겐하의 말에, 쿠웡은 귀중한 전력을 낭비할 수 없다며 반대하고, 이를 지켜보던 주인공은 소수정예 병력에 의한 작전을 제안한다. 지원자들이 모여들고, 잠시 고민하던 쿠웡은 작전을 허락하며 주인공에게 지휘를 맡긴다.


다음날, 주인공은 수갑을 차고 군용차량에 실려 기지로 향하고 있다. 탈주병을 체포한 것으로 위장해 무사히 기지로 잠입 성공. 미리 잠복해 있던 아키라의 해킹으로 정보는 깨끗이 차단되었다.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량의 엄청난 기억력과 그에 못지 않은 무지막지한 건망증이 화제에 오른다. 천재적인 기억력과 경이적인 건망증, 그리고 지병의 발작… 량에게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것 같다.
아키라의 유도에 따라, 일행은 감시 시스템의 사각을 노려 나아간다. 보초를 기절시키고 문의 전자자물쇠를 해킹으로 열자, 그곳은 조명이 꺼진 어둠침침한 방이었다. 벽면에는 커다란 창과 문이 하나씩, 천정의 스피커에서는 수상쩍은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아마도 바로 옆방이 취조실인 모양이다. 창을 통해 들여다보자 그곳엔….
량이 괴로운 표정으로 고문대에 묶여 있다. 옆에 서 있는 것은 V·S·S의 타치바나 레이카 사장과 기지 사령관인 곤도우 장관.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량을 비웃으며, 레이카 사장은….

1. 구하러 들어간다
2. 좀 더 상태를 본다


량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조롱을 퍼붓는 레이카. 갑자기 두 사람에게 중앙관제실로 오라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혼자 남은 량은 쿠웡과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기 시작한다.
아키라의 신호에 따라, 주인공은 방으로 뛰어들어가 결박을 풀어주고는, 고문을 당해 걷기 힘든 그녀를 안아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기지를 빠져나오는 일행.

기지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마을. 감사인사를 건네는 량에게, 동료들은 모든 것이 주인공이 세운 계획임을 알려준다. 그녀는 부끄러워하며 주인공의 손을 잡고, 의미있는 웃음과 함께 딴 곳으로 시선을 돌려버리는 동료들.

아키라 : …어이, 그쪽은 무사히 탈출했냐?
토오루 : 그래… 이렇게 깔끔하게 일이 끝나다니, 솔직히 좀 김이 빠지는 걸.
아키라 : 그런가… 그거 불행중 다행이군.
토오루 : …무슨 일 있어?
아키라 : 아아, 마지막 순간에 실수를 해서… 무사히 도망치긴 틀린 모양이다.
토오루 : 뭐라고?!

휴대단말을 꺼내들고 아키라의 상태를 체크해 본다. 아키라가 탄 슈미크람의 내구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키라 : 바이러스가 들러붙어서… 치명상은 아닌데, 은근한 불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느낌이야… 혼자선 떼낼 수가 없어.
토오루 : 알았어… 지금 그쪽으로 간다.
아키라 : 이미 늦었어… 너희가 기지에 닿을 무렵이면 내 머릿속은 프라이가 돼 있을 거야.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한 아키라의 말투. 초조하게 차 안을 둘러보자 구석에 놓인 오래된 단말이 눈에 들어오고… 근처의 공중전화 부스에 단말을 직접 연결하여 넷에 몰입하기로 한다.

구조체 안에서는 아키라의 슈미크람이 바이러스에 침식당하고 있었다. 바이러스를 날려버리고 아키라를 구해내 도망치려는 순간, 경보가 울리고 군 슈미크람과 경비용 바이러스가 나타난다. 옛 동료들과의 전투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지만, 막다른 길에 몰린 이상 달리 방법이 없다.

플레이어만이 알게 되는 진실.
토오루 : 좋아, 앞으로 조금만 더!
아키라 : 잠깐, 전방에 V·S·S의 슈미크람… 커스텀 메이드다!
…꽤 강해 보이는데.
토오루 : V·S·S라면 거리낄 것 없지… 간다!
레이카 : 잠깐 기다려… 너희들한테 물어볼 게 있어.
토오루 : …타치바나 레이카?
레이카 : 건강해 보이네, 테러리스트 꼬맹이들… 귀중한 포로를 훔쳐간 게 너희들 맞지?
토오루 : …….
레이카 : 곤란하게 됐군. 간신히 되찾은 실험체인데… 다른 세 사람도 테러리스트가 돼 있던가?
토오루 : …실험체? …무슨 말이지?
레이카 : 이런, 너희들 아무것도 모른 채 온 거야? 그렇다면 물어봐도 소용없겠네….
토오루 : 아키라, 물러서 있어… 이녀석은 내가 해치운다!

레이카 : 이제 됐어… α7, 돌아오도록.
제법이군… α7은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자신작이었는데. 너도 V·S·S에 입사하지 않을래?
토오루 : 누가 너희들 따위한테….
아키라 : 그래, 이 파시스트 암여우! 지금 그 파일럿도 세뇌당한 희생자겠지?
레이카 : 파시스트라니, 그런 시대착오적인 말을… 쿠웡의 교육도 밑바닥이 보이는군!
인공지능 : 575칩 프로토타입 삽입을 확인… 콘트롤 탈취 가능.
레이카 : 그래… 너, 범죄자였구나?
아키라 : 그, 그게 어쨌다는 거야?! 날 감방으로 돌려보내고 싶으면 실력으로….
레이카 : 멍청한 것… 정말 가엾기도 하지….

그녀의 목소리 톤이 묘하게 바뀌고, 동시에 아키라의 눈이 스륵 풀린다. 그리고 슈미크람의 팔이 떨리면서 천천히 들어올려져….

레이카 : 자아, 꼬마야… 그 멋진 총으로 친구를 쏴 보렴….
아키라 : 아, 안돼… 그런 짓 못해….
레이카 : 할 수 있잖아… 알면서?
아키라 : 아… 아아…….(총을 겨눈다)
토오루 : 아키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 밑에는 범죄자용 보조칩이 삽입돼 있어…
말하자면 '갱생칩'이란 거지. 알고 있냐?

개인적으로 꼽는 발포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
토오루 : 그랬군… 네년, 아키라를 세뇌칩의 실험체로 삼은 거지?!
레이카 : 그런 모양이네… 하지만 도망친 모르모트가 어정대며 돌아다니는 게 잘못이지.
아키라 : 까불지 마… 난 모르모트 따위가 아니얏!!

중화기를 자신의 턱에 찔러넣고 방아쇠를 당겨버리는 아키라. 파편과 총탄이 분수처럼 솟구친다.

토오루 : ……아키라!!!!
레이카 : 크윽! …이래서 제멋대로 자란 시궁창 쥐는 싫다니까!(회선을 끊는다)

슈미크람의 윤곽이 사라지고, 쓰러진 아키라의 전자체를 안아올리는 주인공. 넷의 법칙은 치명상을 입은 피투성이의 육체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아키라 : 헷… 꼴 좋군… 이제 알겠냐 할망구….
토오루 : 더 말하지 마… 이탈 방해구역까지 탈출할 테니까….
아키라 : …젠장… 시시한 인생이었지만 나쁘진 않게 끝나서 다행이야.
토오루 : 바보자식…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 입 다물어!
아키라 : 얘기하게 놔 둬… 뭐, 이것저것 재밌는 일도 있었지… 재벌회사 입사식에 포르노를 틀어놓고, 웃겼어….
토오루 : 아아… 그런 일도 있었지.
아키라 : W&D 간판에 아직도 「초원의 늑대」 로고가 들어가 있는 거 아냐? …헤헤, 그녀석들, 아직도 지우는 방법을 못 찾았어….
토오루 : …그래, 그건 멋있었어.
아키라 : …량을 부탁해. 그녀석 좋은 여자니까… 난 손이 닿지 않았지만, 너라면….
토오루 : 아키라…?!

품 속에서 아키라의 전자체가 소멸한다… 아키라의 심장이 멎음과 동시에, 넷의 법칙은 그 육체의 시뮬레이션을 중단한 것이다.

토오루 : 아키라…!!!!
바보자식… 혼자서… 제멋대로 가 버리고….

필사적으로 정신을 추스르며 구조체를 이탈하려는 순간….

야기사와 : 무장을 해제하라, 소우마 토오루. 불응하면 사격하겠다.

전방에 군의 슈미크람 부대가 일렬로 대기하고 있다. 최전방에 선 것은 1소대의 옛 동료들….

토오루 : …….
미노리 : 토오루씨, 토오루씨는 카이라씨나 요오스케씨를 안 쏘는 거지요…?
카이라 : 제발 토오루… 우린 널 죽이고 싶지 않아.
곤도우 : 뭘 하고 있나! 스파이 따위, 어떻게 하든 총살감이다! 빨리 쏘지 못할까!!
미노리 : 그런…!

만사 끝장이다… 눈을 감고 마지막을 기다리는 찰나….

겐하 : 얏호오! 와하하하핫! 기병대 등장이시다!!

외침소리에 눈을 뜨자, 군 슈미크람 부대의 배후로 겐하와 그 부하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곧이어 눈앞에서 난전이 벌어진다.

겐하 : 얘들아! 복수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버렷!!
미노리 : …테, 테러리스트입니다!! 각 기 응전!! …어째서 이런…!!
요오스케 : 젠장!! 적이 너무 많아!! 증원 부탁한다!!
겐하 : 여어, 토오루… 량을 구출했다면서? 고맙다고 해 두지.
살생부에 올린 다음엔 절대 안 지우는 게 원칙이지만… 이번엔 특별히 봐주마.
토오루 : …어째서 여기에 왔나?
겐하 : 널 도우려고 온 건 아니야. 적을 죽일 찬스가 있으면 망설이지 않는 게 내 미덕이지.
축제에 낄 생각이 없으면 돌아가라. 맨날 칙칙한 얼굴이나 하고서는….
토오루 : …아, 그래….

싸움터를 내달려 구조체를 빠져나오자 개인회선이 연결된다.

미노리 : 토오루씨…….
토오루 : …카이라하고 요오스케는 무사해…?
미노리 : …그걸 물어봐서 어쩔 건가요?
토오루 : …….
미노리 : …전사했습니다… 이상….

미노리와의 교신이 끊어진다. 아마도 영원히….


량이 무사히 귀환하고, 겐하의 부대가 군에 뼈아픈 일격을 가했다. 아지트에 들뜬 분위기가 흐르고, 주인공 역시 영웅으로 떠받들어지지만… 그런 공기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아지트의 구조체에 몰입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아키라도, 1소대 동료들도 전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운이 없었다. 내 책임이 아니다. 전장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갖가지 변명을 떠올려 보아도 혼자만 살아남은 것 또한 사실.

겐하 : 매일매일 그렇게 혼자서 고독에 잠기는 게 좋은가? 영웅씨.

옛 동료들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겐하에게 달려들고 싶지만, 그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겐하 : 우헤헷, 그 물어뜯을 듯한 눈, 최고야!
토오루 : …뭐가 우습지?
겐하 : 난 말이야… 불행을 괴로워하고 있는 녀석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어.
알고말고… 동료들이 죽어서 분한 거지? 혼자서 살아남은 게 미안하지? 으음~ 정말로 순수한 감각이야.
토오루 : 네가 뭘 알아?! 친구도 애인도 없을 녀석이!!
겐하 : 그러니까 알지… 난 사랑이고 우정이고 하는 행복한 기분은 모르니까, 전혀 공감할 수 없어.
그렇지만 말이야, 괴로움이나 고통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잘 알아… 그래, 이녀석이 발딱 설 정도로 공감할 수 있거든.
나만큼 애정이 깊은 사람도 없지. 죽이거나 덮친 녀석들은 모두 사랑하니까. 제일 사랑하는 건 요란스럽게 울며 소리치는 녀석이지만… 하하하핫!
토오루 : …미친 XX…!
겐하 : 그러니까 나만큼은 속여넘길 수 없어. 넌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 살아남고… 그걸 가지고 훌쩍거리면서, 그런 자신에 취해 있는 게 기분좋을 뿐이지?
괜찮대도… 인간은 다 그런 거야. 아무리 순수한 척 해 봐야,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있는 옛 전우는 까마득히 잊고 있으니까.
토오루 : …옛 전우? 아야네 말인가?
겐하 : …거 봐, 잊어버렸지?
토오루 : …아야네는 어떻게 됐어?
겐하 : 건강하지. 아주 만족스러워… 괴롭히면 귀엽게 울고 말이야.
토오루 : …….
겐하 : 그럼, 오늘도 귀여운 비명소리를 들으러 가 볼까?(자리를 뜬다)

넷에서 돌아오자, 량이 자리에 와 있었다.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아키라가 희생한 일을 사과하는 그녀에게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말하며 애써 덮어두지만….
무언가 말하려던 량이 면목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또 주인공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이다. 말다툼과 농담 비슷한 대화가 잠시 이어지고… 다시 침울한 얼굴로 돌아간 량.

량 : 미안해… 그냥 솔직하게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었던 건데… 역시 난 엄청 바보인가 봐….
토오루 : …괜찮아. 신경쓸 필요 없어. 덕분에 마음이 좀 편해졌는 걸.
량 : 그럼 좋겠는데….
나, 바보라서 잘 말하진 못하겠지만, 진심으로 토오루한테 감사해.
그녀석들한테 계속 시달리고 있었으면, 아마 반나절도 못 버텼을 거야.
뼈저리게 느꼈어. 나도 여자란 걸… 그게 정말로 분했어.
계속 고문당할 일을 생각하니까 무섭고, 괴롭고 슬퍼서… 정말로 죽어버리고 싶었어….

토오루 : …량….
량 : 그래도 토오루가 구하러 와 줘서… 눈물이 나올 만큼 기뻤어.
나, 겁쟁이가 됐나 봐…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무섭고… 정신을 차려 보면 토오루를 생각하고 있는 걸….
바보같아… 이제 와서 보통 여자애들처럼… 난 정말 바보야….


눈물을 머금은 채 미소짓는 량…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꽉 조이는 것만 같다.
운명의 장난으로 친구들을 배신하고, 그들을 죽게 만들어 버린 나… 그런 날 필요로 해 주는 여자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량을 끌어안고 있었다….


량 : …토, 토오루?!
토오루 : 정말 바보라니까… 량도 평범하고 귀여운 여자면서….
량 : 야… 부끄럽잖아… 끌어안고 그러는 거 이상해. 상대가 난데도?
토오루 : …량이니까 안고 있는 거야.
량 : 어째서 나같은 애를… 덜렁이에다 멍청하고….
토오루 : 귀여워 미치겠어. 덜렁거리고 멍청한 량이 말이야.
량 : '귀엽다'… 그런 말 해 주는 건 토오루밖에 없어….

뺨을 맞댄 상태에서 가벼운 키스… 그것만으로도 량은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토오루 : …이대로 끌어안고 있게 해 줘. 안 그러면 나도….

고뇌를 잊어버리려는 듯이, 나는 힘껏 량을 끌어안는다. 이러고 있는 동안만큼은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량 : …좋아. 토오루가 그러고 싶다면….

그대로 우리들은 서로 껴안은 채 바닥의 쿠션에 쓰러져….

량 : 아파파파… 타, 타임!!

갑자기 분위기를 깨는 비명을 지르며 량이 튕겨일어선다.
놀라는 내 눈앞에서, 량은 손으로 엉덩이를 누른 채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량 : 훌쩍… 그 암여우….
토오루 : 어떻게 된 거야…?
량 : 그녀석들이 그런 짓을 해서… 아직도 아파….
웃지 마!! 정말 아프단 말이야! …목욕탕 들어가는 것도 고역이었다고!!

토오루 : 미안미안… 그만 무심결에….

나는 웃음을 참으며 량을 손짓으로 불러, 엉덩이에 체중이 실리지 않도록 옆을 보고 눕게 한다.

량 : …젠장, 그 암여우! 언젠가 똑같은 꼴로 만들어 줄 테다!!
토오루 : 아아, 그때는 도와줄게.
량 : …분해서 잠도 안 올 거야….
토오루 : 괜찮아. 1시간만 지나면 새근새근 잠들어 있을 테니까.
량 : 그렇지 않… 후아아암…
…음냐… 절대로 그런 일 없….


어느샌가 량은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토오루 : 하하… 1시간은커녕 1분도 못 버텼군….

…그리고, 나도 꿈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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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 '각성몽(覺醒夢)'이라고 했던가?
옅은 꿈 속에서, 나는 조용히 꿈을 지켜보고 있다.


??? : 훌쩍… 흐으으… 으아아앙….

나뭇잎새로 비치는 햇살 속에서, 나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어린 소녀의 자그마한 손이 내 손을 꼭 쥐고 있다.

토오루 : 이제 울지 마… 앞으로도 계속 함께 지낼 수 있어.
??? : 훌쩍… 정말로… 오빠…?
토오루 : 당연하지. 우린 단 둘뿐인 가족이니까.
??? : 흐흑… 오빠… 으아아앙….

달래려고 한 말에 오히려 울음을 터뜨리자, 나는 당황하며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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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오루 : …….

…옅은 잠에서 깨어나 멍한 머리로 생각해 본다. 뭘까… 그리운 기분이 들지만, 딱히 떠오르는 기억은 없다.

??? : 훌쩍… 으으… 으아아앙….

…현실에서도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나는 퍼뜩 몸을 일으킨다.
내 곁에서 량이 울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두 손으로 눈을 부비면서….


량 : 훌쩍… 훌쩍… 여기 어디야…?
토오루 : 어디냐니, 량… 설마…?
량 : 몰라… 아무것도 모르겠어… 무서워, 무서워어… 으아아앙….

량의 목소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혼란상태에 빠질 것만 같은 느낌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여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살며시 감싼다.

토오루 : 괜찮아… 무섭지 않아. 조금만 있으면 전부 생각날 거야.
량 : …훌쩍… 정말이야 토오루?
토오루 : 봐, 내 이름 기억하고 있잖아.
량 : …정말… 나, 토오루 이름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
토오루 : 그럼 괜찮아… 오늘은 이만 자자.
량 : 으응… 그치만… 어쩐지 무서워….
토오루 : 괜찮대도… 내가 계속 옆에 있으니까.
량 : …꼭이야….
절대로 손 놓지 마… 토오루….


…그리고 량은 또다시 잠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천진난만한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타치바나 사장의 말을 떠올렸다.


곤란하게 됐군. 간신히 되찾은 실험체인데…
다른 세 사람도 테러리스트가 돼 있던가?

'실험체'라는 뜻모를 단어, 그리고 량의 발작… 량에게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그 외에도 아야네, 아까 꾸었던 이상한 꿈 등등… 지금의 내게는 신경쓰이는 일이 너무나 많다.

토오루 : …젠장, 생각해 봐야 쓸모없는 일뿐이잖아…!!

나는 모포를 끌어 덮고는 억지로 꿈 속에 돌입한다….
…그날 밤, 나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