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구출 -HELP-


느긋하게 구조체를 순찰하고 있는 주인공과 요오스케. 그날의 만남 이후, 바첼러는 약속한 대로 과격한 행동을 자제하고 있다. 페타오 역시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는 상태. 기지의 기능은 완전 회복, 야기사와 소대장도 퇴원이 멀지 않았다.
순찰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는 커다랗게 낙서가 적혀 있다. 그 중에서도 최근 눈에 자주 띄는 것이 바첼러에게 보내는 겐하의 음란하고 추잡한 메시지.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주인공은 다시 그녀의 아지트를 찾아가기로 한다.


휴일마다 바첼러의 아지트를 찾아오는 것도 벌써 대여섯 차례. 겐하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고 당부하자, 조금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겐하와도 호각으로 겨룰 수 있을 테지만… 어쨌든 지금은 바첼러가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AI가 경보음을 울린다. 아지트로 접근하는 침입자가 2명. 주변에 트랩이 설치되어 있다고 큰소리를 치면서도, 불안과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현실세계의 그녀는 아직 어린 여자아이일 뿐.
침입자를 노린 트랩이 작동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려온다. 바첼러를 방에 남겨두고 밖을 살펴보자….

미노리 : 토, 토오루씨… 살려줘요…!
아야네 : 토오루… 멍하니 보고만 있지 말고 어떻게 해 봐!
토오루 : …미노리, 아야네, 어떻게 여길…?
바첼러 : …아는 사람이야?
토오루 : 으응… 내 동료들이야. 내려줘.

어떻게 쫓아왔는지 둘을 다그쳐 보지만, 미노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신경이 쓰여서 뒤따라왔다'는 김빠지는 대답. 주인공은 일단 두 사람을 아지트에 들이기로 한다.
좁은 방 안에 꽉 들어찬 네 사람. 이렇다 할 대화도 없이 썰렁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토오루 : 있잖아 너희들… 다시 묻겠는데, 여기 와서 뭘 하려던 거야?
미노리 : 뭘 할 생각이냐니… 그게… 딱히….
아야네 : 그 유명하신 바첼러 얼굴을 구경 좀 하려고. 설마 날 쓰러뜨린 게 아직 가슴도 덜 자란 여자애였다니….
바첼러 : …내가 쓰러뜨린 사람이 이렇게 가슴 큰 언니일 줄은 나도 몰랐어.

한술 더 떠서 이번엔 험악한 공기까지… 미노리가 얼른 끼어들어, 좋은 곳이 있으니 놀러가자고 부추긴다. 바첼러의 대답은 역시 '토오루의 판단에 맡길래'.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아야네의 개그(??).
혼자서 상황을 수습하려
애쓰는 미노리.

1시간 후… 푸른 바닷물이 넘실대는 아름다운 해변. 환경개발구역이자, 가상 2인실의 모델이 된 곳이기도 하다.
아야네와 바첼러가 아까의 입씨름을 계속하며 배구 승부를 벌이고 있다. 이러니저러니 하면서도 결국 사이좋게 놀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노리는 문제아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처럼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배구를 하다 지친 바첼러가 미노리와 교대하고는 곁에 털썩 주저앉는다. 쥬스와 맥주를 마시며 일방적인 배구시합을 지켜보는 두 사람. 투덜거리면서도 바첼러의 얼굴은 즐거운 표정이다.

토오루 : 미안… 억지로 끌고 나와서.
바첼러 : 으응… 괜찮아. 이런 거, 어쩐지 재미있어.
(미노리와 아야네를 보며)저기… 토오루, 하나 물어봐도 돼?

토오루 : 뭔데?
바첼러 : 저기 있는 언니들 중에 누가 토오루 애인이야?
토오루 : 푸웁…!!
바첼러 : 뭐야! 지저분하게.
토오루 : 너야말로 갑자기 무슨 소릴… 둘 다 그냥 동료… 친구야.
바첼러 : 헤에… 아깝다아… 저렇게 미인이고 가슴도 큰데.
토오루 : 가슴도 크고 얼굴도 예쁘긴 한데… 안됐지만 그런 관계는 아냐.
바첼러 : 흐음~ 의외네? 토오루는 인기 좋아 보이는데… 예전에도 쯔키나란 애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고.
토오루 : 쯔키나는 그냥 소꿉친구야… 모두 단순한 친구들이고, 특별히 인기좋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바첼러 : …그치만 좋겠네. 넌 친구가 많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부러워.
토오루 : 너도 그럴 마음만 있다면 친구가 될 수 있어.
바첼러 : 난 무리야….
예전부터 그랬어. 또래 애들하곤 말이 안 통하고, 나이많은 녀석들은 날 바보취급하고. 특히 내가 여자란 걸 알면….

토오루 : 나이나 성별같은 건 상관없다고 보는데?
바첼러 : 정말이야? 「초원의 늑대」 시절에 혹시 내가 어린 여자애란 걸 알았더라면…?

1. 농담처럼 대답한다
2. 진지하게 대답한다


바첼러 : 난 그저 함께 놀고 싶었을 뿐이야… 지금까지 8년 동안 늘 그렇게 생각했어.
토오루 : 그러고 보니 바첼러는 나보다 해커 경력이 길었지…?
바첼러 : 필요에 쫓겨서 그렇게 된 거야. 8년 전까진 시설에 있었어.
시설을 도망쳐 나온 후로는 살아가기 위해서 해킹을 계속해야 했어. 그러려면 나이도 성별도 속여야 했고….

토오루 : 힘들었겠구나….
바첼러 : 뭐… 그래서 난 남자가 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어.

쓸쓸한 웃음을 떠올리는 바첼러를 보며, 나는 얄궂은 사실을 눈치채고 말았다.
햇살을 등에 받으며 바람에 머리칼을 나부끼고 있는 바첼러는 매력적인 여자로 성장해 있다… 아마도 본인은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바첼러 : …토오루는 내 친구로 있어 주는 거지? …나이도 어리고 건방지고 가슴도 없는 여자애라도….
토오루 : …으응… 바첼러는 나이어리고 건방진 내 여자친구야.
바첼러 : …다행이다.(미소짓는다)

미노리와 교대하러 뛰어나가려다, 바첼러는 잠시 멈춰서서 이야기한다.

바첼러 : 토오루 말고도 8년 전에 친구가 하나 있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막 친구가 되려던' 애였지만.
토오루 : 헤에… 어떤 친구였어?
바첼러 : 같은 또래 여자앤데, 말도 안되게 엄청난 실력이었어… 지금 생각해 봐도 어떻게 했을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는 애였어.
토오루 : 굉장하군… 그래서, 그앤 어떻게 됐어?
바첼러 : 날 버려두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어….(해변으로 달려간다)
토오루 : 바첼러에 맞설 만한 천재소녀라….

무정한 세상… 해커가 사라지는 이유는 단 두 가지, 은퇴 아니면 뇌사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엔 후자의 확률이 높을 것이다.
바첼러 역시 그대로 계속 폭주한다면 똑같은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천재'란 것은 반드시 생존에 꼭 필요한 소양이라 말할 수는 없으니.

느긋하게 해변에서 놀고 아지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다음. 아야네와 미노리는 먼저 기지로 돌아가고, 주인공은 바첼러를 데려다주러 아지트까지 함께 왔다.

바첼러 : 고마워… 이렇게 즐거웠던 적은 오랜만이야.
토오루 : 그 말을 들으면 미노리도 틀림없이 만족하겠군.
바첼러 : 또 이렇게 느긋하게 놀 수 있음 좋겠다….
토오루 : 놀 수 있어. 바첼러가 정말로 그러고 싶다면.(돌아선다)
바첼러 : 토오루…!
또 놀러와 줘… 나, 그녀석들 말에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토오루 : 으응, 잘 자라. 또 놀러올게.
바첼러 : 잘 자, 토오루.


휴일이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훈련과 순찰의 일상.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세 사람에게 카이라가 짓궂은 농담을 던지며 장난을 친다. 한숨을 쉬며 정기순찰을 준비하는 주인공.

순찰을 위해 카이라와 함께 구조체에 몰입했는데, 그녀의 기체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않다. 콘트롤러를 업그레이드할 때 문제가 생긴 모양. 일단 카이라는 조정을 위해 넷에서 이탈한다.
이제부터 중점경계구역에 돌입. 범죄자들이 모여드는 넷 공간의 빈민굴과도 같은 장소이다. 주의를 당부하던 미노리의 교신이 갑자기 두절. 누군가의 통신방해가 틀림없다.

계속 몰려드는 적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한 점을 집중하여 돌파…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강제적으로 교신화면이 열린다. 그리고 화면에 나타난 중년 남자의 얼굴.

남자 : 기다려 주게. 오늘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야… 대화가 하고 싶네, 소우마 토오루군.
토오루 : 얘기라니… 당신은 누구지?
남자 : 내 이름은 쿠웡. 페타오의 리더.
토오루 : 쿠웡이라고?!
쿠웡 : 요점만 묻겠네. 자네는 바첼러가 있는 곳을 알고 있지?
토오루 : 글쎄… 바첼러가 누굴까?
쿠웡 : 시치미떼지 말게. 난 바첼러의 적이 아니야… 그녀를 돕고 싶네.
토오루 : 돕는다고…? 그쪽이야말로 능청떨지 마시지. 당신 부하인 겐하가 바첼러한테 무슨 짓을 하겠다고 떠벌리고 다니는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쿠웡 : …그 일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사과하지… 그런 일도 있고 해서, 나는 그녀를 보호하고 싶다.
토오루 : 보호라니… '감금'을 잘못 말한 거 아니야?
쿠웡 : 고집부리지 말게! 그녀를 혼자 놔두면 위험해. 자네도 그 사실은 알고 있겠지?
토오루 : 확실히 혼자 놔두면 위험하겠군… 당신네같은 자들이 노리고 있으니까.
쿠웡 : …아무리 해도 믿어 주지 않는 모양이군….
토오루 : 쳇, 이래서 광신자들은 싫다니까. 대화를 하는 게 아니었나!
쿠웡 : 물론 그럴 생각이다… 무장을 해제하도록. 나머지 이야기는 우리 아지트에서 하세나.
동료를 지키려다 내가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토오루 : 싫다고 한다면?
쿠웡 : …어쩔 수 없지. 이것도 운명인가….(이탈한다)
토오루 : 비겁한 녀석… 이렇게 되면 한 대라도 더 길동무로 삼아 주지!
카이라 : 토오루, 도와줄게! 매복이라니, 성격 한번 좋군 그래.

카이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주인공. 일단 순찰을 중단하고 이탈하기로 한다.
이탈 직전, 쿠웡이 바첼러를 '그녀'라고 부르던 것이 생각난다. 그는 바첼러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자신이 그녀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콘솔 위에서 눈을 뜨자 미노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순찰중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그녀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미노리 : 그런… 어째서 쿠웡이?
토오루 : 이쪽에서 하고 싶은 질문이야… 바첼러 녀석,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지?
미노리 : 사실은 그 일 말인데요….
(귓속말로)'8년 전의 사건'이란 게 궁금해서 군 데이터 베이스를 조사해 봤어요.

토오루 : 수확은 있었어? 끔찍한 수법의 데이터 베이스 교란이었던가… 대장님은 그렇게 말했는데.
미노리 : 끔찍하고 어쩌고 할 문제가 아녜요… 연속적인 DOS 공격(Disconnect of Silvercode Attack)… 사망자 숫자만도 수천 명에 달하고….
토오루 : DOS 공격?!

넷 공간상에서의 신경가스와도 같은 무차별적이고 최악인 수법… 페타오에서조차 사용하지 않는 무차별 살육수단이다. 그 효과가 무차별적이고 매우 광범위하며, 실행하기 위해서는 A급 인공지능을 해킹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

미노리 : 네… 군 보고서에는 그렇게 나와 있어요. 저도 그애가 그런 짓을 했다고는 생각 안 하지만….
토오루 : 동감이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은 되겠지만.

전자체와 실체 사이에는 논리적이고 전자적인 접속이 존재하며, 이것을 속된 말로 '생명줄(실버코드)'이라 부른다. 그 어원이 된 오컬트용어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전자체(영혼)와 실체(육체)를 연결하는 명줄이 절단되었을 경우, 몰입중이던 인간은 100% 뇌사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뉴로잭을 잡아빼는 것이지만, 넷의 법칙을 관장하는 A급 인공지능의 활동을 방해하여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DOS 공격. 넷 공간의 법칙에 부하를 가하여 일시적으로 넷과 외부 사이의 링크를 절단하면, 구조체 내부에 몰입해 있는 인간은 확실히 제거할 수 있으며, 단순히 접속해 있는 상태의 인간에게도 커다란 부하를 준다.

토오루 : 역시 난 믿을 수 없어….(나가려 한다)
미노리 : 기다리세요! 어디에 갈 건데요?!
토오루 : 대장님께 물어보겠어. 그게 제일 빠를 거야….
미노리 : 대장님은 내일까지 출장입니다….
토오루 : …그럼 바첼러한테 다녀오는 수밖에.
미노리 : 지금은 아직 근무시간이예요!
토오루 : …어떻게 미노리가 얼버무려 줄 수 없겠어? 소등시간까지는 돌아올 테니까….
미노리 : …….
할 수 없군요. 협력하겠다고 말을 꺼낸 건 저니까….

토오루 : 미안… 은혜는 잊지 않을게.


밤이 되어 아지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기가 꺼져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새파랗게 질린 바첼러가 문을 열더니, 사정을 묻는 주인공을 자신의 방으로 안내한다.
방 안에 있는 모니터에는 빈민가 곳곳의 영상이 수초 간격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얼굴에 붉은 칠을 한 사내들이 거리를 이잡듯이 뒤지고 다니는 가운데, 그 중에는 겐하의 모습도 있었다. 이제 추적의 손길은 아지트 근처까지 바짝 다가와 있다….
바첼러의 AI가 탈출을 위한 시간과 경로를 이리저리 계산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외부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것'.

토오루 : 외부라… 군에 알리고 도움을 받을까?
바첼러 : 아, 안돼! 군에선 날 살인범 취급하고 있단 말이야…!
토오루 : 알겠어… 도망칠 방법이 하나 있다.
바첼러 : 정말?!
토오루 : 그래… 하지만 도망치기 전에 솔직하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어.
바첼러 : 뭐, 뭔데…?
토오루 : 바첼러… 8년 전에 DOS 공격을 저지른 건 네가 아니겠지?
바첼러 : 설마… 토오루까지 날 의심하는 거야?!
토오루 : 아니, 믿고 있어… 믿기 때문에 더욱 본인 입으로 확실히 듣고 싶은 거야.
바첼러 : …그건 내가 아니야… 하나 더 말하자면 그건 DOS 공격이 아냐….
토오루 : 뭐? 무슨 뜻이야?
바첼러 : 말해도 믿지 않을 거야….
토오루 : 들어 보지 않으면 몰라.
바첼러 : 머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걸… 당사자인 나조차 믿을 수 없으니까.
그래도… 이것만은 믿어 줘! 그건 내가 한 게 아니야! …정말이야, 믿어 줘!

토오루 : 알겠어… 난 바첼러를 믿어.
(휴대단말로 전화를 건다)부탁한다… 거기 있어 줘…!
쯔키나 : (졸린 목소리)네에… 사사기리입니다… 누구야? 이런 시간에….
토오루 : 쯔키나… 미안해. 일생일대의 부탁이 있어!!

테러리스트와 늑대…
둘 중에 더 위험한 것은?
쯔키나와 통화를 끝낸 후, 어두운 방안에 웅크리고 있는 두 사람. 바첼러는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내내 품 안에 달라붙어 있다.

토오루 : 쯔키나가 차를 준비해 준대. 이제 곧 올 거야.
바첼러 : …와 줄 거라곤 생각 안 했어… 고마워 토오루.
이젠 끝장이라고 생각했어… 미칠 것 같은 기분으로 계속 네가 오기만 빌고 있었어….
그랬더니 정말로 와 준 거야. 널 봤을 때 울고 싶은 걸 참느라 고생했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았어… 날 도와준 건 토오루가 처음이야….

토오루 : 이런 빈민가에 처박혀 있지 않고… 매일 해킹만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으면 도와줄 녀석들도 친구도 더 빨리 찾았을 거야.
바첼러 : …그럴지도 몰라… 그치만 바깥세계가 무서운 걸….

바첼러는 현실세계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인식이 가슴속에 깊이 파고든다.
넷에서의 건방지고 불손한 언동이나 지나치게 대담한 행동, 모두 다 현실에 대한 공포가 투영된 것일지 모른다.


토오루 : 근데 쯔키나 녀석 늦네… 어디서 딴청을 부리는 거야?
바첼러 : 이러는 동안에도 녀석들이 여기로 들이닥칠지 몰라….
토오루 : …어이, 재수없는 소린 하지 마라.
바첼러 : 있지… 내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서 태어난 걸까…?
토오루 : …….
바첼러 : 내 호적도 이름도 전부 엉터리야… 시설에서 도망친 후에 내가 위조해낸 가공의 존재… 정확히 말하면 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야….
토오루 : 바첼러는 여기에 존재하고 있잖아….
바첼러 : '바첼러'란 이름도 그저 가명… 진짜 이름은 나 말고는 아무도 몰라.
토오루 : …진짜 이름이 뭔데?
바첼러 : 아사쿠라 히카루(朝倉ひかる)… 그것도 사실은 시설에서 멋대로 붙였는지 어떻게 알아….
토오루 : 히카루… 좋은 이름이잖아.
바첼러 : 토오루…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부탁할 입장은 아니지만…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토오루 : 재수없는 소린 하지 말랬잖아… 뭔데…? 말해 봐.
바첼러 : 우, 웃지 말고 들어야 돼… 저기, 나 말야… 하나도 여자답지 않지…?
토오루 :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데….
바첼러 : 으응, 괜찮아… 일부러 남자애처럼 행동하고 다녔으니까… 그치만….
토오루 : …그치만?
바첼러 : 저기… 연애영화같은 데서 꼭 나오는 장면 있잖아?
토오루 : 꼭 나오는 장면?
바첼러 : 그러니까… 그게, 남자랑 여자가 맨 처음에 하는 거!
토오루 : 아… 키스하는 거?
바첼러 : 으, 응… 그래서, 그게… 나도 일단 성별은 여자니까….
토오루 : 아아… 바첼러는 여자야. 그게 어때서?
바첼러 : …그러니까… 그… 죽기 전에 한 번은 경험해 보고 싶어….
토오루 : 뭐야… 키스해 보고 싶은 거야?
바첼러 : 그게… 친구사이에 키스라니 이상하지? …그리고 나같은 선머슴애는 싫어하는 거 알지만….
그러니까… 신경쓰지 마… 그냥 말해 보고 싶었어….

토오루 : 바첼러… 네가 오해하는 게 하나 있어.
바첼러는 귀여운 여자애야… 선머슴애가 다 뭐람?(끌어안고 키스한다)
바첼러 : ……토오루….

아지트 밖에서 요란스레 울리는 경적소리. 짐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자, 문 앞에는 V·S·S 로고가 찍힌 차량이 서 있다. 오면서 여기저기 부딪혔는지 곳곳이 찌그러진 모습으로. 쯔키나의 재촉에 굴러들어오듯 자리에 앉는 두 사람.

토오루 : 후우… 살았다… 그런데 어째서 네가 직접?
쯔키나 :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이런 시간에 빈민가 안쪽까지 들어올 택시가 있겠어?(출발한다)
토오루 : …쯔키나, 너 면허는 있겠지?
쯔키나 : 없는 거 토오루도 알잖아… 자아, 간다앗!!
바첼러 : 앗, 쯔키나, 앞에 테러리스트가…!

질주하는 차 앞에 나타난 겐하….

쯔키나 : …어떡해… 치어버렸어!!
토오루 : 괘, 괜찮으니까 달려… 멈추지 마! 저녀석은 이 정도로는 절대 안 죽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예리함을 발휘하는 쯔키나.
차선역행, 신호무시, 기물파손으로 얼룩진 환상의(?!) 드라이브 끝에, 녹초가 되어 목적지인 옛 아지트에 다다른 세 사람. 뒤늦게 자기소개를 하는데,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라며 쯔키나가 고개를 갸웃한다. 당황해서 얼버무리는 두 사람을 놔두고, 그녀는 피곤하다며 엉망이 된 차를 몰고 기지로 돌아간다.

토오루 : 자아… 그럼 나도 기지로 돌아갈까.
바첼러 : 엣?! 돌아가는 거야?!
토오루 : 당연하지. 무단외박을 했다간 영창행이라고.
바첼러 : …….
토오루 : 괜찮아. 녀석들도 여기까진 쫓아오지 않을 거야. 여기도 나름대로 보안시스템은 설치돼 있고.
바첼러 : …역시 안돼!
토오루 : …바첼러….
바첼러 : 미, 미안… 그래도, 무서워서….
토오루 : 정신차려 바첼러… 그러고도 넷을 뒤흔들었던 해커 맞냐…?
바첼러 : 그치만… 그런 얘길 해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야….
왜 그러지? 지금까지 아무것도 무서운 게 없었는데, 갑자기 혼자 있는 게 무서워져서… 나도 이유를 모르겠어….


어느샌가 바첼러는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본 느낌… 예전에도 이런 광경이 있었던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 이 광경은 확실히 예전에 보았던 것이다.
.
.
.

??? : 훌쩍… 히잉… 으아아앙….

나뭇잎새로 비치는 햇살 속에서, 나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어린 소녀의 손이 내 손을 힘주어 꼬옥 쥐고 있다.

토오루 : 이젠 울지 마… 앞으로도 계속 함께 지낼 수 있으니까.
소녀 : 훌쩍… 정말이야…? 오빠….
토오루 : 당연하지. 우리들은 단 둘뿐인 가족이니까.
소녀 : 흐윽… 오빠… 으아아아앙….

달래려고 한 말에 오히려 울음을 터뜨리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
.
.
이건 도대체 무슨 기억이었을까? 나한테는 여동생이 있었던 적은 없는데….
바첼러의 울음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린다. 견디지 못하고 오열을 흘리며, 바첼러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가만히 머릿결을 만져 본다. 흠칫 몸을 떨면서도, 그녀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 홀로 지내온 바첼러… 지금 와서 혼자가 되는 것이 무섭다며 울고 있다. 혹시 그것은 내가 원인일지도 모른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계속 감추고 있던 '응석부리고 싶다'는 감정이, 오늘밤의 사건으로 인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녀를 여기에 혼자 두고 갈 수는 없다….


토오루 : …알았어. 오늘밤만은 함께 있어 줄게.
바첼러 : …정말?
토오루 : 그래… 그러니까 이젠 울지 마.
바첼러 : 고마워 토오루… 난… 나는… 으아아앙!

더욱 크게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바첼러… 나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그저 멍하니 서 있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움이 지금은 기분좋게도 느껴진다….

토오루 : 아아~ 나도 돌아가면 엄청 깨지겠군….
바첼러 : 흑… 훌쩍… 미안… 미안해….

그 후로 얼마 동안, 울다 지쳐 잠들 때까지, 바첼러는 내게 매달린 채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