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파트너 -PARTNER- 딱딱한 콘솔의 쿠션 위에서 잠을 깬 주인공. 얼떨떨한 기분도 잠시, 어제 일로 무단외박한 사실을 떠올리자 눈앞이 캄캄해진다. 탈영 보고를 막기 위해 기지로 전화를 걸자, 어제 2박 3일의 휴가원을 받았다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통신을 끊어버리는 소대장. 바꿔 말하면 사흘 동안 바첼러를 지키고 있으라는 뜻이다. 옆 콘솔에서는 바첼러가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다. 이렇게 잠든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단신으로 군과 테러리스트를 농락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어린 소녀의 모습. 문득 바첼러의 입술을 보고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는 사이,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다. 이유모를 두근거림을 느끼며 애써 당황함을 감추는 주인공. 느긋하게 지나가는 오후시간. 바첼러는 아지트에 설치된 기기들을 흥미있다는 듯 만지작거리고 있다. 오랜만에 전문용어들이 난무하는 회화를 나누며 즐거워하던 도중, 문득 그녀의 뒷모습에 눈이 못박혀 버린 주인공. 그리고 시선을 눈치챈 바첼러와 가벼운 말다툼. 예전에 저질렀던 악질스러운 장난들을 끄집어내면 달리 변명거리도 없다. 바첼러 : 그런 토오루네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지내던 유우야도 대단하군…. 토오루 : 그녀석은 세상 일에 동요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니까….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이름… 바쁜 생활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친구를 잃은 슬픔은 아직 치유되지 않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잠들어 있다. 바첼러 : 미안… 악의는 없었어. 토오루 : 괜찮아… 그녀석 이름이 나올 때마다 우울해져 봐야 소용없잖아. 바첼러 : 저기… 토오루… 난 유우야 대신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외로울 때는…. 토오루 : 아하하, 그렇게 진지한 얼굴 하지 마. 이젠 별로 신경 안 쓰니까…. 바첼러 : 그래도…. 토오루 : 무엇보다, 나이어린 여자애한테 위로나 받고 있으면, 그거야말로 유우야한테 웃음거리가 될 거야. 바첼러 : '나이어린 여자애'라니, 너무하잖아. 난 심각하게 말했는데….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경험이 더 많은 부분도 있고. 토오루 : 헤에… 꽤나 자신있는 모양이군. 그래도 넌 거의 다 가상체험이잖아. 바첼러 : …그게 어때서? 다 알면서 구세기 인간처럼 말하지 마. 지금 시대엔 중요한 일은 전부 가상공간에서 일어난다고. 난 이것저것 많은 걸 봤어… 넷에 깔린 감시망은 보고 싶지 않은 거라도… 아니, 보고 싶지 않은 것만 잔뜩 담아서 보여주니까. 토오루 : …보고 싶지 않은 것? 바첼러 : 더러운 어른들의 세계지… 안 보이는 데선 모두들 끔찍한 짓들을 하고 있어. 폭력, 부정, 음모… 추잡한 일투성이야. 토오루 : 인간은 깨끗한 일만 해선 살아갈 수 없으니까…. 가상이라곤 해도, 너 역시 그런 것들을 이용하며 살아왔잖아. 바첼러 :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난 더러운 어른이 되긴 싫어. 토오루 : 더럽혀지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 없어… 나도 아마 그럴 거고. 바첼러 : 토오루는 달라… 다를 거야…. 화제는 다른 쪽으로 옮겨가고… 경험도 없으면서 아는 척 하지 말라는 주인공의 말에, 자신이 정말 귀엽냐고 물어보는 바첼러. 정말로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어젯밤에 들었던 겐하의 말을 떠올리며 분한 표정을 짓는다. 바첼러 : 난 여자애가 되기 싫었어… 그래서 이런 차림을 하고, 남자같은 말투를 쓰고…. 그런데도 이럴 때는 난폭한 꼴을 당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슬프고 분해서…. 정신을 차려 보니까 어쩔 줄을 모른 채 혼자 울고 있었어… 어째선지 머릿속이 토오루 생각으로 가득해서… 와 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토오루는 와 줬어…. 그때 알았어… '난 역시 여자였구나'라고…. 바첼러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숙여버린다… 그런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사랑스럽다고? 나는 자신의 마음이 바뀐 것에 놀란다. 귀여워도 결국은 꼬마…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키스를 했던 건데…. 지금 난 이 자그마한 여자아이에게, 확실한 이성으로서 사랑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바첼러 : 이상하지…? 지금 와서 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안, 갑자기 이런 말 해서…. 토오루 : 이상하지 않아. 바첼러는 어엿한 여자인 걸….(끌어안는다) 바첼러 : 미안… 토오루… 이상한 말 해서…. 토오루 : 괜찮으니까… 아무 말 안 해도 돼. 어느덧 해가 저물고, 느긋하고 평화로운 하루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각. 무엇을 할지 생각하는 두 사람. 1. 바첼러가 무언가 제안하기를 기다린다 2. 전자체 상태로 몰입하자고 제의한다 오랜만에 슈미크람이 아닌 전자체 상태로 몰입하기로 했다. 장소는 '추억의 그곳'. 고층빌딩들이 우뚝 솟은 구조체. 네온사인이 휘황한 도시에 비할 만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유우야, 바첼러와 함께 해킹을 위해 드나들던 그 시절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다. 먼 하늘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기는 두 사람. 이윽고 바첼러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낸다. 바첼러 : …지금까지 일부러 말을 안 했는데… 너, 유우야 원수를 갚으려고 군에 입대한 거지? 토오루 : …어떻게 알았어? 바첼러 : 나라도 그 정도는 알아. 유우야가 군 슈미크람에게 죽었다는 이야긴 들었으니까. (손을 잡으며)나라면… 널 위해 원수를 갚아 줄 수 있어. 네 복수를 도와줄 수 있다고. 토오루 : ……. 바첼러 : 얼른 원수를 갚아버리고, 「초원의 늑대」를 새로 결성하는 거야. 그럼 동료들도 다시 모여들 거고…. 토오루 : …바첼러…. 바첼러 : 유우야를 대신할 순 없겠지만, 내가 파트너가 돼 줄게. 우리가 힘을 합치면 최강의 팀이 될 거야. …일순간 마음이 흔들린다. 즐거웠던 해커 시절…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군대 따위 때려치워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토오루 : …바첼러, 이미 늦었어. 「초원의 늑대」는 이제 끝난 거야. 바첼러 : 그런! …절대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그럴 생각만 있다면…! 토오루 : 난 네가 말하는 '더러운 어른'이 되어버렸나 봐… 이젠 그때처럼 멋모르고 해킹만 하고 있을 순 없어. 바첼러 : 토오루는 더럽지 않아…. 토오루 : 바첼러, 들어 봐… 계속 생각했던 게 있어. 유우야를 죽인 군인도 우리처럼 임무 때문에 싸웠을 뿐이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싫다고 하는 유우야를 끌고 나온 건 바로 우리들… 우리가 그녀석을 죽인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는 원수를 갚을 자격은 없어… 그리고 난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을 해쳤어. 나는 유우야에게 사과하듯 유품인 펜던트를 꼭 쥔다…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에서 복수는 앙상한 뼈다귀만 남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입밖에 내어버린 지금, 나는 두번다시 복수 따위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바첼러 : …토오루라면 더럽혀져도 상관없어…. 토오루 : 바첼러… 울고 있니? 바첼러 : 토오루는 날 도와주고 계속 격려해 줬어. 나도 널… 토오루한테 힘을 줄 수 있어…!(키스한다) 나, 나도 여자라고… 귀엽다고 말한 적 있지? 그러니까 틀림없이 나도 토오루를 위로해 줄 수 있어. 토오루 : …그만둬 바첼러…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돼. 바첼러 : 놀리지 마…! 날 어린애 취급하지 마… 이렇게 보여도 난 진심이란 말야! 나도… 남자랑 여자가 서로 좋아하면 뭘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 토오루 : …그래도 그렇게 떨고 있잖아. 사실은 무서운 거지? 바첼러 : 당연히 무섭지! …얼마 전까진 더럽다고까지 생각했어. 그치만…. 나도 역시 여자였어… 그걸 가르쳐 준 건 토오루잖아…! 이런 나라도… 귀엽다고 말해 준다면 난 널 달래줄 수 있어. …토오루, 그러니까 계속 곁에 있어도 되는 거지? 날 지켜주는 거지? 바첼러는 날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런 인식이 다시금 내 마음을 채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랑스러움이 가슴속에 가득찬다… 유우야를 잃어버린 구멍을 메우듯, 거칠어진 마음에 따스함이 충만해 온다. 그런 마음에 이끌려 나는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토오루 : 바첼러… 너한테 사과할 게 있어. 아무래도 약속은 못 지키겠다…. 계속 친구로 있겠다고 약속했는데… 친구로는 만족할 수 없을 거 같아. 바첼러 : ……토오루…. …훌쩍… 괜찮은 거지? 정말 함께 있어도 되는 거지? 토오루 : 괜찮고말고… 그러니까 지금은 이러고 있게 해 줘… 바첼러. 바첼러 : 부탁이야… 지금만은 '히카루'라고 불러 줘.(키스한다) 토오루 : 괜찮은 거지…? 히카루, 후회하지 않는 거야? 바첼러 : 으, 으응… 절대 후회 안 해…. 토오루 : 알았어… 장소를 바꾸자. 가상공간의 2인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 . . 바첼러 : …어쩐지 꿈만 같아… 그제까지의 내가 봤다면 틀림없이 깜짝 놀랐을 거야. 토오루 : 그렇겠지… 나라도 역시 놀랐을 거야. 바첼러 : …있지, 토오루… 쓸데없는 이야기지만 들어 줘…. 나, 요양시설에서 자랐어. 친척도 친구도 없이… 그러던 나한테 요양시설 선생님이 단말을 쓰도록 허락해 줘서, 난 금세 열중하게 됐어. 하지만 무료로 다운받는 게임은 2~3개월이면 전부 끝내버리고… 난 게임에 빠져서, 좀 더 어려운 게임에 도전하고 싶었어. 토오루 : …그래서 해킹을 시작한 거야? 바첼러 : 응… 그러는 동안에 해킹 자체가 습관이 돼 버렸어… 그 당시 나한테는 넷 공간 자체가 잘 만들어진 게임처럼 보였거든. 바첼러는 단말을 통해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화폐 위조나 슈미크람 싸움도 그녀에게는 단지 '할 만한' 게임에 불과했겠지…. 바첼러 : 그렇게 게임을 계속하던 중에 널 만났어. 넌 '내가 남자였다면' 하고 상상하던 이상적인 모습에 가까웠고…. 토오루 : 내가…? 바첼러 : 응… 어쩌면, 난 그때부터 널 정말 좋아했는지도 모르겠어… 지금 와선 그렇게 생각해…. 토오루 : …그럼 그때 정체를 밝혔으면 더 빨리 이렇게 됐을지도 모르겠군. 바첼러 : 나, 귀여운 여자가 될 거야… 널 위해서라면…. …이윽고, 바첼러는 내 품에서 잠든 채 조용히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0장 파트너 -PARTNER- 끝 |